2025.4.3~2025.5.4, 예그린씨어터
시를 읽는 인구가 현저히 줄어들고 있는 현대 사회에 시가 살아남는 방법은 무엇일까. 연극 <기형도 플레이>는 시와 더 이상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시와의 접점을 친절하게 만들어 준다. 총 아홉 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연극은 매일 다섯 개를 무작위로 선별해 공연한다. 이와 같은 공연의 형식은 한 편의 시집을 무작위로 펼쳐서 나온 시를 하나씩 읽어 나가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공연을 관람한 관객이라도, 순서와 구성이 완전히 다른 공연을 볼 수도 있는 것이다.
5월 3일 14시 공연은 <질투는 나의 힘>, <흔해빠진 독서>, <기억할만한 지나침>,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조치원>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었다. <질투는 나의 힘>에는 20대 초반에 연인 관계였지만, 이제는 40대가 되어버린 두 남녀가 등장한다.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는 남성과 이제는 어른이 된 여성이 등장해, 관객들도 살면서 한 번쯤은 보고 느꼈을 어떤 남성의 모습을 풍자한다. 두 인물과 함께 무대에 배치되어 있는 행인은 관객의 반응을 대변하며 남성의 한심함을 증폭시킨다. <흔해빠진 독서>에는 명절의 두 자매가 등장한다. 아픈 어머니와 당직 중인 형부 덕에 단 둘이 남은 자매는 자연스럽게 옛날 이야기를 하며 현재의 문제를 직면한다. <기억할만한 지나침>에는 해고를 통보 받는 비정규직 노동자와 통보를 하는 정규직 노동자가 등장한다. 밥은 같이 먹을수도 있지만 장례식에는 결코 가지 않는 적당한 회사 동료 사이지만, 10원을 아끼겠다는 이유로 차가운 해고 문자를 전송한다. ‘다음에 밥 한 번 먹자’는 말로 무마해보려고 하는 정규직의 모습은 너무나도 공허해 민망할 정도이다.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에는 비현실적인 사건을 겪고 다시 마주한 두 인물이 등장한다. 두 인물은 각자 겪은 공개적인 살인사건과 거부할 수 없는 책에 대한 이야기를 공유한다. 판타지 같은 이야기 속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낯익은 일상의 감각을 공연은 포착한다. <조치원> 속 두 인물은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목적지가 불분명한 두 인물들은 서로가 죽음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 차린다. 자신의 죽음에는 무감각했지만 상대의 죽음은 안타깝게 여기며 삶을 지속할 이유를 만들어주고자 한다.
각기 다른 다섯 개의 공연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도 않고, 공연과 공연 사이에 어떠한 맥락이 존재하지도 않는다. 단 하나의 공통점은 모든 이야기가 일상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나마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가 다소 비현실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긴 하지만, 이 또한 궁극적으로는 ‘일상’적인 이야기에 해당한다. 선생이라는 이름으로 미성년자를 추행하는 남성이나 하나의 책으로 삶이 뒤바뀐 사람의 이야기는 뉴스에서든, 우리 주변에서든 살면서 한 번쯤은 접해 봤을 법한 이야기이다.
공연에는 글을 쓰거나, 읽거나, 팔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글을 쓰는 것이 어렵고, 작가로는 살아남기 힘들다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는 이들이 다루는 장르는 대체로 소설이다. 시에 매개해 살고 있는 연극 속 인물들마저도 시보다는 소설에 의지해 사는 이들이 대부분인 것이다. 이처럼 시는, 글 중에서도 대중들이 찾지 않는 장르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시-가뭄 시대에 시가 살아남기를 택한 방법은 무엇일까?
연극을 통해 기형도의 시는 일상이 되어 친숙하게 다가온다. 시로 연극을 만들었다고 했을 때 자연스럽게 떠올렸던 난해한 내용이 아닌,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상에 한 두 줄씩 침투한 시 구절로 공연을 구성했다. 상황과 절묘하게 들어맞는 시 구절은 현대 사회에서 시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가리키고 있다. 그것은 바로 시를 체험하는 것이다. 누구나 한 번쯤 겪을 법한 일상적인 상황에 적절한 시를 덧붙임으로써, 시가 우리 삶과 밀접하게 닿아있는 매체임을 일깨워준다. 그것은 시를 즐기는 방법을 잊은 현대의 관객 혹은 독자에게 시를 즐길 수 있는 새로운 방법론으로 다가온다.
공연을 보면서 깨달은 점은 시의 고유한 형태가 현대에 매우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짧게 편집된 숏폼 미디어가 대세로 떠오르고 있는 현대 사회에 시의 짧은 구조는 강력한 장점이 될 수 있다. <기형도 플레이>는 이와 같은 시의 장점을 포착해 무대 언어로 구현해 냈는데, 잠시의 암전을 통해 이어지는 다섯 가지의 이야기는 마치 숏폼이 넘어가는 듯한 모습을 띄고 있었다. 약 20분마다 이야기가 바뀌는 구조 덕에 100분이라는 시간은 마치 숏폼 비디오를 볼 때와 마찬가지로 아주 짧게 느껴졌다.
무대 한 켠에 위치한 직사각형의 큰 구조물과 에피소드가 바뀔 때마다 켜지는 직사각형의 조명은 이 공연이 책을 기반에 두고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꾸준히 일깨워준다. 이 때문에 구조물을 지나 무대로 걸어 나오는 인물들은 마치 책 속에서 걸어 나오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직사각형의 무대 구조물은 휴대폰 화면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숏폼 형식으로 잘게 잘린 타인의 일상 한 부분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핸드폰 화면이 켜지면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처럼, 연극 역시 비슷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시를 기반에 둔 공연은 시와 공연, 나아가 영상 매체의 경계를 흐리며 관객에게 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이처럼 연극 <기형도 플레이>는 시 자체를 연극으로 풀어낸 것이 아니라, 시를 우리 삶에 위치시키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무대의 인물들과 관객이 시를 읽는 대신 직접 살아내게 만들면서, 이제는 멀어진 ‘시’라는 매체를 보다 친숙하게 느끼기를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기형도의 시를 통해 일상을 풀어내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점은 아쉽게 느껴진다. 기형도의 시에서 출발한 공연이지만, 일상 속 드라마에 머물러 있어 굳이 기형도의 시가 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느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와 관객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형도 플레이>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볼 수 있다. 관객에게 익숙한 일상과 매체 언어로 시를 재해석한 <기형도 플레이>는 우리가 시를 읽지 않는 시대에도 시가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있음을 증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