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오래오래
“우리 여행 갈 때 되지 않았냐?, 나 요즘 힐링이 필요해!”
“하하하, 그래, 가자, 가!, 갈 때 됐다. 어디로 가고 싶은데? 생각해 둔 곳은 있고?”
“몰러~ 이제부터 생각해 볼게~”
봄이 끝나갈 무렵 닉네임 ‘활기찬 경’에게 전화가 왔다. 경이는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닉네임이 ‘활기찬 경’인 이유는 제발 좀 활기차게 살아갔으면 하는 나의 바람이었다. 친구와 지인이 여럿 있지만 십여 년 전부터 비정기적으로 연 1회 의식을 치르듯 둘이 여행을 갔다. 초반에는 목적지선정부터 숙박, 운전까지 내가 주도했다면, 후반부로 갈수록 경이가 더 적극적으로 여행을 계획하고 추진했다.
홍매실이 연분홍으로 익어갈 때 진도로 향했다. 진도 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었다. 광주송정역까지 SRT로 이동해, 그곳에서 다시 경이 차로 이동했다. 어디로 가느냐보다, 누구랑 함께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위로 삼으며. 내려가는 길에 목포 북항에서 나름 유명짜한 뻘낙지 비빔밥을 먹을까? 했는데, 정기 휴무일 덕분에 얻어걸린 맛집에서 맑은 대구탕과 맛깔스러운 밑반찬으로 입 호강하며 에너지를 보충했다. 가는 내내 이슬비가 내렸고, 소소하고 자잘한 우리 이야기는 의식의 흐름대로 끊이지 않았다.
진도는 20년 만에 가는 듯했다. 이 정도면 앞으로 ‘언제 또 갈까 싶다.’, ‘좋으니까, 다음에 또 가야지’ 하지만 그러기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지금이 내생에 마지막인 것처럼’ 최선을 다해 즐겁고, 행복하게 보내고 싶어졌다.
데스크에서 숙소 배정을 받고 나오니 비가 더욱 세차게 내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숙소에 짐을 내려놓고 부랴부랴 우산만 챙겨서 나왔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답게 섬들이 옹기종기, 아기자기 참 예뻤다. 비가 내려 노란 금계국은 더 샛노랗게 바람 따라 흔들거렸다. 분홍바늘꽃은 꽃잎 끝에 매달린 빗물이 꽃 눈물 같아 발걸음을 붙잡았다. 고등학교 때 웃픈 사건을 이야기하며 깔깔 웃었다. 별일 아닌데도 마음을 나눈 친구를 만나면 웃음이 헤퍼진다.
<고등학교 1학년, 비가 오는 어느 점심시간, 감성 충만한 두 소녀가 우산을 쓰고 운동장을 걸었다. 나름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 마침 외출했다가 돌아온 체육선생이 학교 정문에서 우릴 보고 오라고 손짓해 무방비 상태로 갔더니, “엊그제 운동장에 모래 깔았는데, 다 망치려고 걸어 다니냐, 미친년들같이.” 욕을 한 바가지 퍼부었다. 그러면서 우리가 들고 있던 우산을 뺏어 당신이 쓰고 가면서 “교무실로 따라와” 하는 것이다. 우리는 비를 홀딱 맞으며 졸졸 따라갔다. 비 맞고, 욕먹고, 감기 걸리고> 그날 일은 시간이 훌쩍 지났어도 두고두고 회자하는 이야기다. 지금 생각하면 학생 인권 운운하며 큰일 날 일이지만, 80년대는 선생들이 훈육을 빙자해 폭언과 폭행이 부지기수로 자행됐던 터라 이상하지도 않았다.
아무튼 즐거운 산책을 마치고 숙소로 복귀하니 아담한 과일바구니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 이게 뭐지? 배달이 잘못 온 것 같아!” 내 말에 경이가 대꾸했다. “제부가 보냈나?, 사실 여기 숙소 제부한테 예약을 부탁했거든, 그래서 마음이, 쓰였나?” 과일바구니를 보며 마음 씀씀이가 따뜻한 경이네 가족이구나 싶었다.
저녁 성찬을 즐기며, 우리의 이야기도 꽃을 피웠다. 경이는 결혼 전 두어 번의 창업 실패로 경제적인 손실과 더불어 자존감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도피처로 처음 선본 남자랑 한 달 만에 결혼이란 극단적 선택을 했다. 자신에 대한 회의감과 정체성 혼란으로 결혼생활 동안 만족하지 못했다. 늘 생각이 많고, 그늘이 있어 보여 옆에서 보는 사람도 안타까웠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언니를 잃고 힘들어했었다. 여수로 위로 여행을 갔을 때 정신을 차렸단다.
결혼 후 20년 만에 용기를 짜내어 남편대출로 피부관리샵을 열었다. 전쟁보다 더 무서운 코로나19가 터졌다. 실패에 대한 압박감에 잠을 설치는 날이 많았다고 했다. ‘내가 하는 일이 그렇지 뭐’ 하는 열패감에 잠시 휘청거렸다고 했다. 핑계나 합리화, 그리고 변명 뒤로 숨지 않고 고객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정성을 쏟았단다. 이제는 어엿한 창업 6년 차. 직원도 한 명 있고,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어 효능감도 생겼는지 얼굴에서 빛이 났다.
“정아! 이래도 되나 싶게 요즘 행복하다. 그리고 이제는 언니 몫까지 꿈이 생겼어!” 경이의 말에 나는 순간 울컥했다. 그러다가 생뚱맞게 “요즘, 나 자신에게 실망이야!”, “무슨 말이야?” 영문을 몰라 물었더니“얼마 먹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렇게 배가 부르니 말이야! 흐흐흐”, “푸하하, 나도 나도 나도” 우리의 대화는 맥락 없이 한동안 더 이어졌다. 창문을 열고 베란다에 나가보니 비는 잦아들고 안개비가 가라앉았다. 몽환적인 풍경이 낮과 다르게 낯설고, 이국적이었다. 다음 날 아침, 하늘은 쨍하니 맑고 높았다. 1박 2일의 짧은 아쉬움보다 앞으로 더 즐거운 날들을 기대하며 우리는 일상으로 복귀했다. 꽃들도 활짝 피는 절정의 시기가 다르듯, 사람도 저마다의 인생에서 꽃처럼 활짝 피는 시기가 오겠지. 다만, 사람마다 그 시기가 다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