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시시한 행복

살아야 할 나름의 이유

by 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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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부터 효능감이 바닥을 쳤다. 살아야 할 나름의 이유가 있고, 또 이유 없이 살아야겠지만, 근래는 환영받지 못한 구겨진 포장지 같았다. 휴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도망치듯 떠날 구실을 찾고 있었다. 제주 애월 해안가에 직원 복지 차원에서 회사 숙소가 있었다. 명절 연휴인데도 마침 예약자가 없었다. 누가 예약하면 어쩌지? 조급해하면서 며칠 고민하다 제주행 비행기를 예매했다. 떠난다는 마음만으로도 벌써 기운이 났다. 명절 연휴에 개인 연차휴가까지 넉넉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기간에 비해 짐은 최대한 가볍게 샀다. 긴 명절 연휴로 인천공항에서는 출국심사에 3시간 이상 걸렸다는데, 제주공항에 도착하니 생각한 것보다 한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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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간을 넉넉하게 즐기고, 소박하게 먹고, 나에게 집중하기 위해 제주에 왔기 때문에 급할 게 없었다. 웬만하면 걷고, 10km 이상 멀면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공항에서 102번 급행버스를 타고 애월고등학교 정류장에서 795번 지선버스로 환승하기 위해 내렸다. 날씨가 끄물끄물 폭풍이 몰아치기 직전처럼 바람이 심상치 않았다. 버스정류장에 예순은 넘어 보이는 아줌마가 작은 백을 크로스로 메고 서있었다. 그 모습이 조금은 쓸쓸해 보였다. 언뜻 보기에도 제주에서 물질하는 해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세련돼 보이지도 않았다. 쓸쓸한 중년의 여인은 더 외로워 보이는 여행자에게 바다 풍경이 멋진 카페를 몇 군데 소개하겠다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면서 그는 바다 보러 애월에 간다고 했다. 낯가림 있는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가정사를 줄줄 말했다. “나는 서울이 고향이에요, 남편이 공직에 있어 남편 따라 제주에서 40년 살게 됐어요, 지금은 나만 제주에 살고, 남편은 육지에 살아요. 명절인데 애들은 커서 이젠 볼일 본다고 안 내려오네요. 바람이 거셀 때 바다를 봐야 진짜 살아있는 바다 같아요. 잔잔한 바다는 너무 심심해요” 나름대로 바다에 대한 개인 취향이 확고해 보였다. 그러는 사이 버스는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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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객 없이 달렸던 버스 기사는 때마침 우리가 반가웠던지 “차가 좀 늦었습니다! 여행 오셨어요? 바람이 심상치 않은데, 많이 기다리셨나요?” 대답하기도 전에 기사는 혼잣말을 했다. 낯선 사람에게 서슴없이 말하는 게 친절하다는 느낌보다 ‘다들 외롭구나!’ 생각했다. 버스는 5분간 꽁지 빠지게 골목길을 달렸다. 순간, 괴물 같은 바다가 하얀 물거품을 철철 흘리며 등장했다. 바다가 퍽퍽 슬픔을 토해내고 있었다. 흡사 그 모습이 ‘내 마음 같다’고 느꼈다. 바다는 눈보라와 강풍을 맞으며 스스로 살아있음을 증명했다. 살아서 아우성치는 바다를 보며 나 역시 연말 실적 마감을 위해 치열하게 분투했음을 상기했다. 그 전쟁에서 얻어맞으며 나름 승전고를 울렸지만, 전리품을 챙기지 못해 효능감이 떨어졌음을 감지했다. 그러는 사이 쓸쓸해 보이는 중년의 여인과 나는 고내남또리포구 정류장에 내렸다. 거센 바람 사이로 감사하다는 어정쩡한 인사를 남기자 그는 카페가 보이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 뒷모습이 더욱 쓸쓸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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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인적 드문 애월 바닷가에서 평화롭게 제 갈 길 가는 돌고래 떼를 만났다. 혼자서 돌고래 떼를 만났다는 설렘에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뒤늦게 사진을 멋지게 찍으려다 놓쳤다. 돌고래 떼를 만나면서 바닥에 떨어졌던 효능감은 잊어버렸다. 돌고래 영접으로 올해는 행운만 가득할 것 같아 기분까지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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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겨울 해풍에 낮고 낮게 핀 해국, 돌 사이 개똥과 뒤섞여 아무렇게나 핀 방가지똥, 흔하디 흔한 노란 금잔화 꽃이 참 곱다. 조만간 폭풍이 할퀴고 지나간 바다는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순딩순딩 해질 것이다. 세상이 나를 찌른 것도 아닌데 혼자 찌르고 할퀴면서 못내 서러워했던 나 자신에게 싱거운 웃음이 나왔다. 효능감이 낮은 사람이 아니라 효능감 낮은 날들이 몇 날 있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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