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올레길 19코스

동행

by 서정

“제주 출장이 잡혔는데, 같이 갈래?”, “좋아!, 근데 난 업무 끝나고 밤 비행기로 갈 수 있을 듯!, 우리 주말에 올레길 걷자!”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처럼 계획에도 없는 밤 비행기를 탔다. 출장 업무를 마치고 혼자 심심해 좀이 쑤셨던 친구는 공항까지 마중 나왔다. 색다른 곳에서 친구를 만나니, 반가움에 웃음부터 나왔다. “넌 확실히 돌-아이가 분명하다!”, “왜?”, “사람들이 대부분 오른쪽으로 나왔는데, 넌 왼쪽에서 나왔잖아!”, “애가 또 멀쩡한 사람을 잡네!” 만나자마자 티키타카를 주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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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북쪽 바다는 탄산수처럼 톡 쏘는 생동감이 느껴졌다. 제주올레 19코스는 탄산수 같은 바다에서 숲으로 숲에서 마을로, 마을에서 밭으로, 밭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날것 그대로 제주를 온전히 즐기기에 충분했다. 우리는 김녕서 포구에서 조천만세동산까지 걷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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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흘동 버스정류장에 내려 김녕서 포구에 다 달았다. 달개비꽃이 새초롬하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 ‘어서 와!’ 다정하게 눈인사를 나누며 가볍게 몸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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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로를 걸으며 시골 출신답게 친구는 밭작물에 대해 모르는 게 없었다. 당근, 콩, 무는 기본이고 어린 새싹을 보고 양배추와 배추를 단번에 구분했다. 나는 친구가 마냥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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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태콩은 바스락바스락 가을이 왔음을 알렸고, 몽글몽글 하얀 메밀꽃은 흐드러지게 피었다. 수줍게 핀 하얀 메밀꽃을 친구랑 걷는 길에서 만나니 반가웠다. 마을 입구 돌담에 핀 붉은 백일홍은 미모를 한껏 뽐냈고, 새파란 노지 귤은 그에 질세라 한없이 도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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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서 곶자왈로 접어들었다. 마치 산소 탱크 속에 들어온 듯 청량했다. 혼자 곶자왈을 걸을 때는 앞만 보고 걸었다. 을씨년스러워 빨리 통과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다 사람이라도 만나면 더욱 긴장됐다. 친구랑 함께 걸으니, 마음이 편안했고 서두르지 않아서 좋았다. 숲 속을 걷다 박노해 시인의 ‘걷는 독서’ 중 멋진 문구를 새긴 팻말이 중간중간 길잡이를 해줬다. 그중 ‘좋은 동행자가 함께하면 그 어떤 길도 멀지 않는 법이다’ 글귀에 우리는 서로 공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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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만한 공간을 찾지 못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 걸었다. 그늘진 모퉁이 길 안쪽에 외투를 깔고 서로의 등을 기대고 앉았다. 가방에서 사과를 꺼내 반으로 쪼개 나눠 먹으며, 놓치고 지나온 사소한 추억을 이야기했다. 어쩌면 우리는 아주 다른 별나라에서 왔기 때문에 서로 맞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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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햇빛에 쨍하게 빛나던 바람은 나와 친구, 나뭇잎 사이에서 탱고를 추듯 하늘거렸다. 풍력발전기 13호도 쉼이 필요한지 날개를 접고 휴가를 떠났다. 이제 와서 고백하건대, 주체 못 하는 열정과 남다른 센스 그리고 남의 뒤에서 비굴하지 않아 나는 친구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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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아담한 북촌리 등명대를 만났다. 등대 이전의 등대로 제주 원주민들이 현무암을 쌓아 세운 최초의 민간 등대다. 지금은 기능을 다했지만, 존재만으로도 가치와 의미를 발휘하고 있었다. 잔잔한 푸른 바다 너머로 손에 잡힐 듯 ‘다려도’ 라는 무인도가 한가롭게 기지개를 켰다. 바다는 마을 앞마당까지 불쑥 마실 나왔고, 파도도 바다를 버리고 마을로 나왔다. 한적한 포구마을에 개들은 하품이 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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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리를 들머리로 푸른 바다를 친구 삼아 가파른 길을 쉬엄쉬엄 걸었다. 어느덧 서우봉 뒷자락에 닿았다. 소나무가 빼곡한 숲길은 흙과 솔향이 버무려져 머리를 맑게 했다. 가을 첫 자락, 낙조 전망대에 서서 함덕해수욕장을 내려다봤다. 서핑과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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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고 투명한 옥빛 바다를 오래오래 볼 수 있어 눈이 즐거웠다. 서우봉은 고려시대 삼별초와 관군의 전쟁,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절벽에 파 놓은 수십 개의 진지동굴, 4.3의 피비린내까지 순탄치 않은 세월이 서려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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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세월을 견디면서 아름다운 함덕 바다를 품었다. 바다색이 예쁘기로 유명한 함덕해수욕장은 아기 엉덩이 같은 하얀 모래 풀등을 훤히 내 비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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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 서서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을 유지하며, 행복하게 오래 얼굴 보며 살자!’고 말했다. 저물어가는 관곶의 해몰이 풍경을 뒤로하며 발걸음은 점점 무거워졌다. 한풀 꺾인 태양도 어느덧 조천포구에 걸려 우리의 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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