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산도 1
잔뜩 흐린 날 흑산도에 갔다. 쾌속선 안은 사람들의 열기로 답답할 만큼 유리창이 뿌옇다. 창가에 앉아 고상하게 바깥 풍경 감상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잔잔하게 항해하던 배가 어느 지점에서부터 거센 파도가 살아서 꿈틀거렸다. 덩달아 내 속도 울렁거렸다.
마른오징어를 먹으면 멀미를 진정시킬 수 있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던 기억이 났다. 뱃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중심 잡기도 어려워 비틀거리며 매점에 가서 마른오징어를 사 왔다. 짭조름한 오징어를 입에 넣고 있는 동안 울렁거림은 견딜만했다. 배가 아직 선착장에 닿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이미 출구 쪽에 진을 치고 서 있었다.
이모는 마른오징어로도 속이 울렁거린다며 자리에 앉지 못하고 입을 막고 서 있었다. 그 와중에 허리 굽은 노인에게 다가가 “이 짐, 할머니 거예요?, 들어드릴까요?” 친절하게 묻는다. 돌아오는 것은 환대보다는 냉대에 가까웠다. 노인은 눈 하나 끔적이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일관했다. 검은 낯빛과 처진 눈으로 앞만 응시하며 몹시 경계하는 표정이었다. 노인의 무응답에, 옆에 있던 노인이 더 멋쩍어 “자기 짐, 가져갈까 봐 안 그라요!” 대신 대답을 해줬다. 이모는 선착장에 배가 정박하자 물건 주인이 반기지도 않은데, 기어코 노인의 짐을 들고 배에서 내렸다.
부둣가에는 예약한 숙소 매니저가 내 이름이 적힌 안내판을 들고 서 있었다. 5호차 관광버스로 안내하길래 이모한테 빨리 오라고 손짓했다. 노인의 짐을 들고 집까지 따라갈 기세였던 이모는 그제야 짐을 바닥에 내려놓고 노인에게 겸연쩍게 인사하고 내가 있는 방향으로 왔다.
관광객을 기다리는 대여섯 대 버스 중 5호차에 오르자마자 맨 앞자리에 풀썩 앉았다. 숙소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내리고 싶었다. ‘일단은 좀 쉬었다가 나와야겠다!’ 생각했는데, 아주 큰 착각이었다.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얼떨결에 섬 일주 버스 투어에 참여하게 됐다. 버스는 출발하자마자 굽이굽이 고갯길로 접어들었다. 흑산도 관광의 첫 관문인 듯 흑산도아가씨 노래비에서 버스가 줄줄이 멈췄다. 분초 사회도 아니고 숨 쉴 틈 없이 시간에 쫓기는 관광객들은 우르르 내렸다가 사진 몇 장 찍고 우르르 차에 올랐다.
교각 없이 하늘 도로를 세우는데 20년이 넘게 걸린 사연이며, 칠 형제 바위, 옥섬의 전설, 정약전 유배지 등 운전기사의 뛰어난 말솜씨와 흑산도에 대한 자부심은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안개비가 바다 위에 하얗게 내려앉듯 꺼져가는 정신은 내 육체의 괴로움을 이기지 못했다.
날씨가 흐려 풍경은 분별하기 힘들었고, 관광버스는 휘청휘청 곡예하듯 도로를 달렸다. 혼미해진 정신은 이미 한계에 이르렀다. 옆자리에 앉은 이모가 “바다에서는 잘 참더니, 육지에서는 쥐약이네!” 하며 킥킥 웃었다. 한 시간 남짓 정도의 섬 일주 투어가 끝나고 숙소에 도착했다. 체크인하는데, 섬 일주도로 관광 비용을 계산하란다. 사전에 어떤 안내도 없이 ‘비용 청구라니!’ 황당해서 울고 싶었다.
관광객이 한차례 휩쓸고 간 흑산도는 고요보다 적막에 가까웠다. 주황빛 노을은 아니지만 바다 위로 해무가 적당하게 내려앉아 어둑해진 바다는 신비로웠다. 우리처럼 흑산도만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 오는 사람에게는 일주도로 관광 시기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했어야 했다. 느낌을 중요하게 여기는 까탈레나에게 컨디션이 엉망인 채로 쾌속선에서 쫓기듯 버스에 올라 흑산도를 대면하게 한 것은 큰 실수였다.
찰지고 싱싱한 홍어에 흑산도 할매 막걸리, 감칠맛 나는 밑반찬은 흑산도의 매력도를 한층 높여줬다. 기본 욕구가 충족되니 불편했던 낮에 기억은 지우개로 지우듯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숙소에 들어와 이것저것을 검색하다 두 가지 정보를 얻었다. 하나는 여행사를 통해 홍도 관광을 메인으로 하고 흑산도는 홍도를 거쳐 가거나 거쳐오는 중간 다리쯤으로 일주 버스 투어가 포함됐고, 그리고 호텔에서 조식이 무료로 제공된다는 사실이었다.
안내데스크로 전화를 걸어 확인하고 싶었지만 받지 않았다. 조급증이 난 이모가 홈페이지를 찾아 대표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혹시, 아침 조식 무료로 제공되나요?” 물어보니 전화선 넘어 남자가 웃으며 “특별히 무료로 드리겠습니다. 아침에 식당으로 오세요!” 이런다. 우리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쾌거를 이룬 듯 신났다.
다음 날 아침 무료로 제공해 준 죽과 나물 반찬으로 조식을 든든하게 먹었다. 커피 충전이 필요해 안내데스크에 커피 두 잔을 주문하고 계산하려는 찰나, 낯익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나타나 “커피도 특별히 무료로 드릴게요!” 한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어제저녁에 조식을 무료로 주겠다는 사람이었다. 저세상 맑은 표정으로 우리를 봤다. 얼떨떨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2박 3일 일정으로 흑산도에 왔는데, 기상악화로 2~3일간 배가 뜨지 않는다고 했다. 반강제로 마지막 배로 육지로 나와야 했다. 가방을 휴게 공간에 두고 우리만의 방식으로 흑산도 투어를 시작했다. 영화세트장 같은 마을 여기저기를 산책했다. 보조출연자 길고양이도 만났다.
신들의 정원이라고 불리는 진리당 옆 오솔길은 밤새 안개비가 내려 청량감을 주었다. 적당히 젖어 있는 흙길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반그늘 오솔길 돌 틈에, 대나무 사이에 기품 있어 보이는 석위를 처음 봤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듯 요즘 식물에 관심을 갖다 보니 여러 식물에 호기심이 생겼다. 사진을 찍어서 검색해 보고, 초점 맞춰 정성스럽게 다시 찍고, 이리저리 살펴보는 통에 요즘 여행지에서 부쩍 발걸음이 느려진다. 미니멀한 용왕당에서 몰려다니는 구름 덕분에 맑았다, 흐렸다 시시각각 변하는 바다 풍경을 바라보며 흑산도에 와 있음을 실감했다.
붉은 동백꽃이 뚝뚝 떨어진 12 굽이 도로를 숨을 헐떡이며 걸어 올랐다. 버스 안에서 구불구불 고갯길을 오르는 것과 바람결을 느끼며 쉬엄쉬엄 고갯길을 오르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켰다. 숨은 찼지만 상쾌했고 한가로워 좋았다.
간간이 관광버스가 들이닥쳐서 갓길로 대피해야 했지만 그마저도 즐거웠다. 흑산도아가씨 노래비 맞은편 산성길을 따라 올라가면 상라산성 전망대에 도착한다. 장보고가 해상 무역을 벌일 때 전진기지로 삼았다는데, 1,200년 전 어떻게 이런 곳까지! 대단하고 놀랍다.
구불구불 12 굽이 도로가 한눈에 들어왔다. ‘와!’ 짧게 탄성이 나왔다. 거센 바람에 몸이 휘청거렸지만, 다도해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