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수리

by LISA

소원수리라니 군대도 아니고 명칭이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다. 입사 직후부터 희망 부서 적어내는 것에 왜 소원수리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신기해했다. 그 후로도 한동안 어쩐지 그걸 낸 후에는 관심병사가 될 것 같은 느낌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소원수리가 늘 그렇듯이 내봤자 딱히 소원대로 된 적도 없어서 어느 순간 연차가 차면서부터는 윗선의 희망대로 내거나 뻗대느라 아예 안 내는 일도 생겼다. 이제 연말부터는 데스크 자원으로 분류될 테니 운신의 폭은 점점 더 좁아질 게 뻔했다.

그럼에도 이번에는 대관만큼은 그만하고 싶어서 몇 군데 상의를 해봤지만 역시 돌아오는 답은 시원하지 않았다. 함께 일해보고는 싶지만 네 인사가 그리 쉽겠냐- 수준이었다. 다음에는 반드시 빼준다고 했던 인사권자들은 어어- 일단 한 번 써봐- 로 태도가 바뀌었다. 문득 저연차 때 만난, 워라밸 중에 라이프에 무게추가 한참 더 쏠린 선배가 한 말이 생각났다. "우리 회사는 우는 애한테 떡 하나 더 주게 돼 있어." 그렇게 해본 적은 없지만 이번엔 미친 척하고 한 번 드러누워 볼까 잠깐이나마 상상도 해봤다.


마침 소원수리를 내자마자 회사에 큰 사고도 터졌다. 다른 회사의 한 대관 담당자는, 대관으로 인정받고 싶으면 제 힘으로 수습 가능한 수준의 적당한 리스크를 만들어낸 뒤 그걸 해결하는 걸 반복해서 보여주면 된다고 했었다. 하지만 나는 이 일을 전혀 계속하고 싶지 않은데 계속 리스크가 생겨난다. 심지어 적당하기는커녕 수습이 어려운 수준이다. 공교롭게 딱 인사 시즌에 맞물려 터졌다는 측면에서도 헛웃음이 났다.


하지만 DNA는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워라밸에 골몰하는 선배보다는 나를 오랫동안 격려해 준 선배가 최근에 날 다독이며 한 말이 더 와닿았다. 그 선배는 과거 나의 상관이 하극상으로 내쫓긴 일을 언급하면서, 결국 모든 것은 실력의 문제라고 했다. 성격이 어떻든 팀 구조가 어떻든 업무 내용이 무엇이든 일을 잘하는 게 답이라고. 너의 상관도 결국은 업무적으로 장악을 못했기 때문에 하극상이 벌어졌고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에는 중간관리자였던 너의 마음조차 얻지 못한 것이라고. 그렇다. 어디에 있든 본질에 충실하면 된다. 집 근처 자동차 수리점 벽에 걸린 문구가 떠올랐다. '좋은 기술자는 백 마디 말보다 결과로 말한다.' 다음 주 내가 어디에 있든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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