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초대 대통령 별장, 화진포의 성(북한 김일성 별장)이 있는 곳
강원 인제⸱고성 문학기행
지금까지 내게 여행이란 일상에서 훌쩍 떠나 좀 더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하나의 행위였다. 꿈에 그리던 소위 ’ 자유로운 영혼‘ 이라던가 또는 ‘하루 동안의 일탈’ 등 갖가지 핑계와 그럴듯한 사유로 포장해서 다녔다. 어느 때는 아무 의미 없는 여행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여행은 내겐 무척이나 유의미한 여행이다. 봄은 '~을 보다'라는 말이 어원이라고 한다. 사계절의 첫 번째인 봄은 '새로운 시작을 보라'라는 뜻에서 '봄'이라고 한다. 봄은 ‘따뜻해져서 사물들이 뛰고 움직이기 시작하여 새롭게 바라보는 계절’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겠다. 4계절 중 앞줄에 이름 올린 봄이 무르익어갈 무렵, 해는 길어만 가도, 갈수록 짧아지는 계절의 봄, 그래도 봄을 즐기는 사람들은 넘쳐나고 바람은 실바람에 봄 여인들의 마음은 한껏 물올랐다.
인제가 낳은 시인 박인환 그리고 '목마와 숙녀'
이 봄에는 누구나 시인이 되며 수필가가 되고 소설가가 된다. 평소 마음에 두고 있는 스타가 있더라도 오늘은 박인환이다. 당시의 작가들은 왜 그렇게 하나같이 이야기가 많은지 끝없이 이어지는 인연 속의 인물들이 마음에 와닿는다.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난 박인환은 지금도 멀다고 느껴지는 두메산골에서 태어났다.
오전 일찍 기념관을 들러 50여 년 전 문학을 논했던 명동 백작들의 일상을 읽으며 현재와 비교도 해 본다. 풍요 속의 빈곤(?)에 내겐 절박함이란 없다. 그저 취미일 뿐이다. 당시의 문인들에겐 펜과 종이, 술병이 명동 행차의 필수품이었으며 작가 이봉구는 자기 작품 "명동"과 "명동백작"에서 명동이 있고, 문학이 있고, 술이 있었기에 행복했었다고, 그 시절을 회고하고 있다. 저녁이 오면 하루의 일과를 마친 문인과 예술인들이 편안한 분위기, 그리고 싼 술값과 후한 인심 덕에 이곳 포엠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모나리자는 전쟁의 상흔으로 폐허가 된 명동에서 가장 먼저 문을 연 다방으로 장르를 막론하고 명동의 많은 문화인이 출입하던 유명한 다방이었다.
목마와 숙녀는 박인환의 대표작이다. 영국의 여류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의 죽음을 애도하는 만가 형식의 시라고 할 수 있다고 나온다. 박인환은 버지니아 울프의 죽음을 통해 인생의 허무감을 제시하고 그것을 전쟁으로 인한 사람과 인생, 문학의 죽음이라는 우리 현실에 비유적으로 관련시키고 있다고 한다.
버지니아 울프가 절망적인 현대적 성향 때문에 인간에 대한 모든 가치와 신뢰를 상실하고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듯이 시인의 현실 역시 문학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만큼 절망적이며 이는 곧 전쟁으로 인한 가치관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인연으로 만난 만해마을 '님은 갔지만...'
기념관을 뒤로하며 만해마을로 향한다. ‘목마와 숙녀’의 깊은 뜻을 음미하는 시간은 뒤로하고 심우당 앞에 섰다. 한 동자가 소를 매개로 한 깨달음의 과정을 그린 심우도에서 이름 지어진 듯한 심우당은 만해마을 앞편에 있다.
한용운은 1879년에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한학을 배우며 자랐고 청년 시절에는 동학 농민운동에 참여도 했다. 동학 농민 운동이 실패로 끝난 뒤 설악산의 오세암에서 불교를 공부했고, 1905년에는 백담사에서 승려가 되었다. 1910년에 한일 강제 합병으로 나라를 빼앗긴 뒤에는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1913년까지 중국과 만주, 시베리아 등을 돌며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독립군 부대를 방문해 격려하기도 했다. 1919년 3‧1 운동 때는 민족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참여했다. 그는 이 일로 인해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투옥되었다. 집을 지을 때는 조선 총독부 쪽으로는 창문도 내지 않았다고 한다. 감옥에서 풀려난 뒤에 한용운은 늘 일제의 감시를 받았으나 독립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았다.
신간회 조직에 앞장섰고, 창씨개명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으며, 조선 총독부의 탄압에 맞서 한국 불교를 지키기 위해 싸웠다. 그러다 1944년에 해방을 불과 1년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고성 건봉사에 그의 시비가 있다. 자료에 보면 그는 건봉사에도 인연이 있었다.
격동기 역사를 쓴 이들이 쉬던 곳, 여전히 아름다운 호수와 해변
점심 식사 후 화진포 해변으로 달려갔다. 명사십리 고운 백사장에는 봄빛이 완연하고 나들이 나온 사람들로 넘쳐나고 완연하고 동해 푸른 바다는 하얀색 너울로 오늘의 상태를 알려준다. 화진포 해변은 여느 해변과 좀 다르다. 대부분 곡선 해변을 가졌으나 화진포는 거의 직선으로 시원한 느낌이 많이 든다. 이곳에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은 백사장이 유달리 희다는 것이다. 이는 수많은 세월 속에 조개껍데기 분해되어 모래와 섞여서 더 희다고 한다. 화진포의 파도를 보고 있자니 나 자신이 그 속으로 빨려드는 듯한 느낌이다. 해변 양쪽에는 '화진포 사랑'이라는 노래비가 있다. 또 우리 근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유명 인사들의 별장들이 즐비하다.《화진포의 성》은 김일성의 별장이라고 하며 내부에는 6.25 전후 격동기의 기록이 전시되어 있다. 동족에게 총부리를 겨눈 전쟁은 70여 년이 흘러도 아직도 곳곳에 상처가 남아 있다. 당시의 주인공(주연이든 조연이든)은 이제 이 세상을 떠나고 역사만 남았다. 수년 전 전쟁 세대이신 분의 넋두리가 떠오른다. 고성 향로봉에 동행할 일이 있어 모시고자 했는데 고개를 강하게 저으며 ’나는 그곳에 못 간다. 전쟁의 아픔이 떠올라 그 이름만 들어도 몸이 굳어진다. ‘는 말씀에 모시기를 포기했다. 전쟁은 이렇게 수많은 민초에겐 커다란 상처가 된다. 그들은 어쨌는지 몰라도...
시대는 영웅을 만들고 문인은 역사를 글에 담는다. 암울한 한 시대를 꿰뚫은 거물도 세월은 피하지 못하는 법, 생자필멸의 앞에서 겸허해진다.
해변에 인접하여 석호인 화진포 호수가 잔잔하게 우리를 맞아주었다. 노송이 즐비한 도로변을 따라 호수는 그렇게 물을 가두어 철새 놀이터를 만들어주고 우리에겐 자연의 신비함을 보여주고 있다. 봄이면 도로변의 해당화 향기가 십리는 가리라.
화진포는 바다다
파도는 봄빛이다
바람은 마음이다
하늘은 구름을 밀어내고
마음은 향기를 품고
눈동자도 열었다
조개 부서져 가루 된
아기 속살 같은 모래
영겁을 넘는 시간을
한 알 한 알 쌓아
모래성이 되었다
이 자리 이 순간 만남은
천 년의 인연인가
봄 햇살에 시간 녹듯
화진포 성 녹슬어 간다
아침이슬 연꽃잎에 구르듯
순간을 이은 인연을 쌓아
화려한 재회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