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은 봄을 느끼기에 참 좋은 날씨였다. 立春이 지나고 우수가 다가오니 바람 속에 살짝 온기가 느껴지고 햇살은 북벽의 흰 눈을 녹여가고 있다.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휴일에 봉사활동 차 강원도 철원의 전방부대에 다녀오는 귀경길에 노동당사 유적지가 있어 잠시 들러 보았다.
영욕의 장소 노동당사
노동당사는 1946년 북한노동당이 당시 철원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당시 이 지역은 철원의 중심지였는데 한국전쟁으로 모든 건물이 파괴되고 노동당사만 남아 전쟁의 참혹함과 상처를 상징처럼 보여주고 있다. 건물 내부는 곧 무너질 듯 훼손이 심하다. 75년여 세월의 영욕 속에는 수많은 사연이 묻혀있겠지. 당시의 서슬 퍼런 권력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 안에서 벌어졌을 수많은 일은 세월이 지나고 보니 한 줌도 안 되는 인간의 욕망이었건만 누구에겐 영광이요. 누구에겐 돌아보기 싫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동서의 냉전이 열전으로 불붙은 장소가 하필이면 우리 국토라니, 죄 없는 민초들은 어쩌라는 말일까?
영원할 것 같은 권력도, 견디기 힘든 한때의 고통도 시간 속에 묻혀 잊혀 간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있지만, 등장인물과 배경이 다르다. 지난 일은 지난 일일 뿐이다. 그때는 그런 인연들이 있었다고 기억하면 그만이다. 우리는 가끔 지난 역사적 일을 소환하여 지금의 시각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무섭게, 또는 어리석게도 지금의 관점에서 재단한다. 역사를 이해하려면 스스로 그 시대로 시간여행을 하여 그때의 사람이 되면 도움이 된다. 우리가 현재의 잣대로 시시비비를 가리고자 하여 실체를 밝히려는 것은 이해하나 객관성이 담보되어야 하리라.
우리는 과거로부터 왔지만, 과거에 얽매여 살 수는 없다. 언제까지 과거에 머물러 있겠는가. 미래 지향적인 생각이 세상을 바꾼다. 백 년도 못 사는 시간을 과거의 일에 매몰되어 낭비하지 말자. 역사는 미래의 일을 결정할 때 참고하면 된다. 노동당사를 돌아보며 느낀 작은 소회를 적어본다.
철원의 옛 '노동당사' 모습
멀고 먼 물리적 거리, 평양 215.1km, 서울은?
노동당사 앞 도로변에 검은 돌기둥이 서 있는데 가까이 보니 도로원표(元標)다. 검은 돌에 음각된 글씨는 많은 마모와 총탄 자국에 의해 조각들이 떨어져 글자를 알아보기 어렵다. 전쟁 당시 이곳이 격전지였다는 것을 방증하는 표지석은, 보는 이의 마음을 무겁게 하기에 충분하다. 돌기둥의 한 면에는 세로로 평강 16.8km, 김화(금화) 28.5km, 원산 181.6km, 다른 면에는 평양 215.1km, 이천 51.4km,라고 쓰여 있다. 그러나 포천은 총탄에 의한 듯 거리는 지워졌다. (여기서 이천伊川은 경기도 이천이 아닌 북한 강원도의 이천군을 말함)
이 도로원표는 일제감점기에 세워진 것으로 당시 옛 철원읍은 매우 번성한 도시로 경원선과 금강산 철도가 지나는 교통요충지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도로원표는 기종점(起終點)을 표시하는 것으로, 도, 시, 군청 등이나 교통중심지에 설치하여 지역 간 거리를 알 수 있는 역할을 한다. 특이하게 이 도로원표에는 서울까지의 거리는 표기되어 있지 않다. 검색해 보니 서울까지는 79km로 평양까지 215.1km의 절반도 안 되는 거리인데도 말이다.
총탄에 지워진 '도로원표' 표지석시공간을 뛰어넘는 마음거리
지난 시절 '코로나'로 '사회적 거리두기'도 그러하다. 지역과 지역,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물리적 거리가 있는가 하면 너와 나를 잇는 '마음의 거리'도 있다. 마음의 거리는 시공간을 뛰어넘어 우리의 마음을 쥐락펴락 요술을 부린다. 마음속에 파동을 일으켜 사람과의 거리를 멀어지게 하거나. 가까이하며 밀고 당기기를 한다. 마음 거리가 가까워지려면 서로의 마음을 알아야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정확하게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음의 사전적 의미는 '감정이나 생각, 기억 따위가 깃들이거나 생겨나는 곳'이라 나온다. 이러한 마음을 상대나 특정인에게 있는 그대로 보여주어 서로 교감을 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우리가 자주 쓰는 '마음자리' '마음씨' '마음결' '마음 씀씀이'가 모두 마음을 바탕으로 파생된 말이다. 마음자리는 바탕을, 마음씨는 모양을, 마음결은 움직임을, 마음 씀은 마음의 發現을 뜻한다고 한다. 마음자리는 心源이라 하는데 마음의 근본을 이룰 뿐 밖으로 나타난 것이 아닌 관념적 인식의 대상이라 한다. 즉 고요하고 湛然 (담연) 한 것이다.
이 고요한 마음자리는 外物에 감응되면 물결을 일으키다 가라앉으면 본연의 상태로 돌아간다. 마음자리는 겉으로 나타나지 않지만, 마음결은 외물에 감응되면 쉽게 물결을 일으키는 속성이 있다. 그 물결을 일으키는 상태를 마음결이라 한다. 마음가짐이나 마음보라고도 한다.
마음 약함을 탓하며
인생이란 평범함은 없어 보인다. 그저 그런 인생은 무미건조한 의미 없는 삶이기에 나태해지고 긴장감 없이 개성도 없을 것이고 자기만의 색깔이 없어 별로 반갑지 않다. 오늘은 죽을 만큼 힘들어도 내일 조금이라도 호전되면 살 것 같은 마음이 우리 인간의 마음이다. 인생은 롤러코스터같이 오르락내리락 굴곡이 있게 마련이다. 고요한 마음자리에 외물이 감응되어 물결치는 것을 요동친다고도 표현하는데 이것도 표현이 그렇지 우리 마음의 상태인 마음결일 뿐이다. 어제보다 오늘이 조금 힘들면 내리막 인생이라 느낀다. 사람의 마음이란 '간사하다'란 말이 있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나 생각은 시시각각 오감으로 느낄 뿐이다. 살다 보면 내 진심을 다하여 마음을 주었는데 그 상대에게 상처받았을 때의 감정은 복잡 미묘하다. 잔잔한 물결이 아니라 폭풍이 휘몰아치고 소용돌이에 말려든다. 절망과 좌절에 빠진다.
가까이 더 가까이
그러면 이런 감정을 절제할 수 있는 마음가짐의 자세는 무엇일까. 우선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면 안 된다. 쉽지는 않지만, 인생, 거기가 거기다. 마음 준 것은 내 생각일 뿐이다. 상대는 그것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을 수 있다. 불교에서는 마음의 본체에는 상(相)이 없다고 했다. 지난날의 마음을 잡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잡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잡을 수 없다(반야경)고 한다. 또 마음은 안에도 있지 않고 중간에도 있지 않다(유마경). 그러니 있지도 않은 마음을 주었을 리 없다. 내 생각일 뿐이다. 착각하고 사는 것이다. 어떤 사물이나 현상이라는 외물이 마음자리에 들어오는 순간 물결이 일고 내 주관(편견)이 들어간다. 그리고 순간의 감정들을 용감하게 내뱉는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과 믿고 싶은 것만 취하는 이기적인 동물이다. 또 그것이 진실이라고 굳은 신념을 갖는다. 더구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편견을 갖고 있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말은 찌르지만, 마음은 찢긴다. 그래서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다는 말이 회자된다.
어쨌거나 마음을 주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마음결(움직임)이 생기고 그것이 마음 씀으로 발현되어 고통을 느끼는 것이 우리 인간이다. 그래도 마음씨 곱게 써서 손해 볼 것 없으니 모든 일을 너그럽고 자애롭게, 넓은 아량으로 매사 긍정적으로 살아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