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후배가 꽃다발을 건네주었다. 특별한 날도, 기념할 만한 이유도 없었다. 그래서 더 의외였고, 평소 정이 가던 여자 후배라 그 마음이 고맙게 다가왔다. 꽃을 들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내내 기분이 가벼웠다. 자리에 앉자마자 포장을 풀었다.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 묶여 있던 리본을 푸는 손길마저 괜히 조심스러워졌다. 줄기를 다듬어 꽃병에 꽂고 나니 책상이 전보다 조금 밝아진 것 같았다. 잠깐 자리에 앉았다가 다시 일어나 창가 쪽으로 옮겨 보기도 하고 형광등 아래와 햇빛 아래를 번갈아 보며 어디가 더 어울리는지 고민했다. 휴대폰을 꺼내 몇 장의 사진을 찍으면서도 이걸 누구에게 보낼 생각은 없었다. 그저 오늘 하루의 기분이 생각보다 좋았다는 사실을 스스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 기분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하루를 마치고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문득 꽃이 떠올랐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정말 별 뜻 없이 꽃 이야기를 꺼냈다. 오늘 꽃을 받아서 하루가 꽤 괜찮았다고 했다. 그 순간 그의 반응이 조금 빨랐다. 누가 준 꽃이냐는 질문이 먼저 나왔고 이어서 남자가 준 건 아니냐는 말이 따라붙었다. 왜 그런 선물을 받았느냐는 질문까지 이어지자 상황이 조금 재미있게 느껴지면서도 동시에 설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애매하게 넘어가면 오히려 더 이상해질 것 같았다.
여자 후배에게 받은 선물이라고 그냥 고마운 마음으로 받은 꽃이라고 차분하게 말했다. 말을 이어가는 동안 그의 표정이 서서히 풀어졌다. 긴장이 빠진 얼굴을 보며 괜히 안심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아주 잠깐 정말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간 표정이 있었다. 안도와 함께 섞여 있던 질투였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완전히 숨기지는 못한 표정. 말은 없었지만 숨기지 못한 마음이 얼굴에 잠깐 스쳤다. 그 짧은 표정 하나가 생각보다 솔직하게 느껴졌다.
그 뒤로 대화는 다시 평소처럼 흘러갔다. 특별히 더 할 말도 없었고 그날의 일은 거기서 끝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짧은 오해의 시간마저도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그에게서는 붙잡으려는 말 대신 잠깐 머뭇거리는 표정으로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 질투는 부담스럽기보다는 조심스러웠고 그래서 더 사람답게 느껴졌다.
며칠이 지나 꽃은 하나둘 고개를 떨구었다. 물을 갈아주면서도 이제 곧 시들겠구나 싶었고 결국은 꽃병을 비우게 되었다. 그런데 꽃이 사라진 자리를 보며 그날의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 꽃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나를 바라보던 그의 얼굴. 그 표정만큼은 시간이 지나도 쉽게 흐려지지 않았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아마도 이렇게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렇지 않게 지나갈 수도 있었던 하루 속에서 서로의 마음이 잠깐 겹쳐지는 순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