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여지고, 버무려지고, 익어가는 삶에 대하여 –
해마다 이맘때면 아내는 몹시 부산하다.
주방과 베란다를 오가며 구시렁구시렁 혼잣말을 해대기 일쑤다.
“배추는 어디 걸 써야 하나”, “무는 어디 게 맛있지”, “달랑무는 해야 하나”,
“젓갈은 어디 걸로 써야 하고…”
분명 나 들으라고 한 말인데, 나는 대꾸할 수 없다.
한마디 거들면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나선다고 타박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일주일가량 이어지는 깊은 시름이 지나면,
아내는 그 복잡한 퍼즐을 마침내 완성하고야 만다.
주부 33년차의 내공을 지닌 아내도 1년 농사 앞에서는
언제나 돌다리를 두들기는 심정이 되고 만다.
조촐한 아침 밥상에서 아내가 느닷없이 말한다.
“횡성 고랭지를 가야겠어.”
아무래도 김장용 배추는 직접 보고 사야 한단다.
지난해 마트에서 산 절인 배추가 숨이 죽지 않아
다시 소금을 뿌리고 반나절이나 뒤집는 등 난리를 쳤던 까닭이다.
이번에는 작년보다 더 절이겠다는 말에
그만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꼼짝없이 아내와 단둘이 하루 종일 김장해야 한다는 생각에
고민이 깊어졌다.
입동 무렵이면 집집마다 김장 준비에 여념이 없다.
김치냉장고가 보급됐느니, 식습관이 바뀌었느니 해도
김장은 일단 해놓고 볼 일이다.
김장의 시작은 배추를 씻어 절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빳빳한 배추에 간수 뺀 천일염을 사정없이 뿌려주면
배추의 숨이 죽는다.
배추는 그렇게 한 번 죽어야
비로소 김치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그런데 숨이 멎은 배추는 혼자 살아남지 못한다.
파, 마늘, 무, 생강, 갓, 젓갈, 고춧가루가 어우러져야
비로소 생명이 깃든다.
외형이 완성됐어도 방심은 금물이다.
정성이 담뿍 담긴 손맛이 있어야 진짜 김장이 된다.
화룡점정은 따로 있다.
푹 삶은 돼지고기 편육에 굴과 생채를 곁들인 한상차림,
갓 지은 백미에 시원한 배추된장국 한 그릇이 빠져서야
어디 김장을 했다 할 수 있겠는가.
생각해 보니 김장은 인생의 축소판이자 일생의 단면 같다.
배추가 소금에 절여져야 제맛을 내듯,
사람도 고단한 시간을 지나야 깊은 맛을 낸다.
억지로 서두르지 않고, 때를 기다리며, 정성과 손맛으로 완성되는 것이 김장이듯,
우리네 삶도 그 기다림과 정성의 시간 속에서 조금씩 익어간다.
또한 짠맛과 매운맛, 달큰한 감칠맛이 어우러져야 김치로 거듭나듯,
기쁨과 슬픔, 성취와 좌절이 뒤섞여야 인생의 맛이 나지 않겠나.
그 모든 세월의 맛을 버무린 한 포기 김치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수고와 마음을 다시 떠올린다.
그리고 이 계절,
그 한 포기 김치가 우리에게 건네는 말이 있다.
“조금은 힘들어도, 결국엔 익어가고 있다”고.
김치소와 편육 한점 얹은 쌈을 입안 가득 욱여넣을 일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입고리가 씰룩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