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운인가? 시스템의 폭력인가?

‘운도 실력이다’라는 문장 뒤에 숨은 비겁

by 박동환

평소 운동과 스포츠 관람을 즐기는 필자가 놓치지 않고 보는 분야가 올림픽이다. 세계 최고의 기량을 겨루는 선수들의 경쟁도 볼만하지만, 그 속에 투영된 스포츠맨십과 인간 승리의 과정이 고스란히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기를 보다 보면 맥이 빠지고 허탈해지는 순간이 있다. 바로 심판의 판정이다. 이번 이탈리아 밀라노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혼성계주 준준결승이 그랬다. 우리 선수단이 상대 선수의 실수에 휘말려 넘어졌음에도, 2위가 아닌 3위로 달리고 있었다는 이유로 구제받지 못하고 탈락했다.

함께 경기를 펼친 선수의 실수에 휘말린 것은 분명 '불운'이다. 하지만 억울함을 호소하는 코칭스태프의 이의신청조차 가로막은 심판진의 태도는 '운'의 영역이 아니다. 소통의 단절과 권위주의를 운으로 치부하는 순간, 스포츠의 공정성은 끝내 사라지고 만다.


‘운도 실력’이라는 비겁한 프레임

사람들은 곧잘 ‘운도 실력이다’라며 자조 섞인 말을 하곤 한다. 본래 이 말은 승자가 자신의 행운에 감사하며 쓰는 겸손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 문장은 시스템의 실패를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비겁한 프레임’으로 변질되었다.

이 말의 가장 큰 피해자는 역설적으로 이길 실력을 갖춘 뛰어난 선수들이다. 심판의 오심, 이의신청을 받아들이지 않는 행정의 무능, 시스템의 구멍을 전부 ‘운’이라는 단어로 퉁쳐버림으로써 책임자들은 비난에서 자유로워진다.


이러한 횡포는 비단 스포츠 현장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일상 곳곳에도 만연해 있다. 취업 준비생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면접관 운’이 대표적이다. 평가 기준이 면접관의 기분이나 개인적 편향에 따라 널뛰는 상황을 우리는 너무 쉽게 운이라 부른다. 하지만 이는 운이 아니라, 평가의 표준화를 담보하지 못한 채용 시스템의 직무유기다. 밤새 기획안을 다듬은 직원이 시스템 오류나 행정 착오로 기회를 잃었을 때, 상사가 "그것도 네 복이다"라고 말하는 순간 조직은 개선의 기회를 잃고 인재는 냉소를 배운다.


멈춰버린 1초, 그리고 시스템의 실력

우리는 14년 전 런던 올림픽에서 펜싱 국가대표 신아람 선수의 눈물을 기억하고 있다. 이른바 ‘멈춰버린 1초’ 사건이야말로 설명되지 않는 공백과 시스템의 폭력이 동시에 터진 비극이었다. 종료 1초를 남기고 상대의 공격을 세 번이나 막아냈음에도 전광판의 시간은 흐르지 않았다. 훗날 국제펜싱연맹은 오심을 인정하면서도 결과는 번복할 수 없다며 ‘특별상’을 제안했다. 이는 실력으로 쟁취하려던 메달의 가치를 모욕하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운’의 정의를 다시 세워야 한다. 문명사회에서 운의 진정한 정의는 통제할 수 없는 우연이 아니라, ‘시스템이 미처 다 설명하지 못한 공백’이어야 한다. 진정한 시스템이란 그 공백이 발생했을 때 “어쩔 수 없었다”며 개인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즉각 작동하는 복구 회로를 갖추는 것이다.

신아람 선수의 사건이 불운이 아닌 시스템의 폭력이었던 이유는, 기계적 결함이라는 명백한 공백 앞에서 누구도 책임지고 스톱워치를 되돌리거나 상식적인 판정을 내릴 ‘시스템적 용기’를 발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운이 실력을 잡아먹지 못하도록

결국 운이 실력을 잡아먹지 않게 만드는 것이 바로 ‘시스템의 실력’이다.개인이 마주한 불운의 크기를 최소화하고, 만약 불운이 닥쳤더라도 그것이 한 사람의 인생을 통째로 무너뜨리지 않도록 정교한 안전망을 설계해야 한다.

운과 실력 사이에는 분명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공백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공백을 피해자에게 떠넘기는 사회는 발전할 수 없다. 선수들이 4년간 쏟은 땀방울을 단지 운이 없다고 치부하기엔 심판진의 무책임과 행정의 불통은 너무나 무례했다.

우리는 이제 ‘운도 실력이다’라는 문장의 비겁함을 직시해야 한다. 부정을 눈감는 경영진, 공정성을 포기한 면접관, 책임 회피에 급급한 행정가들이 더 이상 운이라는 단어 뒤로 숨지 못하게 해야 한다. 설명되지 않는 억울함을 데이터와 투명성으로 치환해 나가는 것, 그리하여 실력 있는 이들이 눈물 흘리지 않게 만드는 것. 그것이 우리가 갖춰야 할 진짜 시스템의 실력이다.

이전 11화입춘(立春), 곰배령의 봄을 듣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