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가 머물던 골목

사라지는 것들을 위한 정월 대보름의 기억

by 박동환


초고층 아파트의 거대한 그림자가 도시의 지형을 바꿔놓은 자리, 내 기억 속에는 아직도 백여 미터 남짓한 좁은 골목길이 살아 있다. 사람 둘이 간신히 비껴갈 수 있었던 그 길은, 사실 서로의 어깨를 스치며 온기를 확인해야만 통과할 수 있었던 다정한 검문소였다. 아이들은 그 골목에서 숨바꼭질을 하며 숫자를 외쳤고, 그 숫자들은 놀이의 규칙이라기보다 시간이 멈추길 바라는 작은 주문처럼 들렸다. 땅바닥에 흩뿌려진 구슬들은 손바닥만 한 꿈이었고, 골목은 그 꿈을 잠시 맡아주던 가장 안전한 공간이었다.

이제 그 길은 지도에서도, 현실에서도 사라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곳에서 울리던 소리들만큼은 아직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채, 기억의 바닥 어딘가에 머물러 있다.


그 시절 명절은 달력 속 하루로 끝나지 않았다. 정월 초하루부터 대보름에 이르기까지, 거의 보름 동안 마을 전체가 하나의 리듬으로 움직였다. 새벽 공기를 가르며 들려오던 “복조리 사려—” 하는 외침은 명절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돈을 받지 않고 복을 먼저 대문에 걸어두고 가던 그 장수의 발걸음에는, 계산보다 믿음이 앞서던 시대의 태도가 담겨 있었다.

밤이 되면 골목은 다시 소리로 가득 찼다. “찹쌀떡—”, “메밀묵—” 하고 이어지던 장수들의 외침은 하루의 끝을 알리는 생활의 리듬이었고, 그 소리는 집집마다 흘러들어 저녁 식탁의 불을 밝혔다. 골목은 단순한 통로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잇는 소리의 길이었다.


골목이 사라진 자리에 관계의 결도 함께 풀려나갔다. 작은아버지, 큰아버지, 이모, 고모, 당숙부까지 이어지던 촘촘한 호칭들은 이제 ‘삼촌’이나 ‘친척’이라는 단어 속에 뭉뚱그려졌다.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았고, 사정을 묻지 않아도 마음을 짐작하던 관계는 점점 설 자리를 잃었다.

마을 어귀에 앉아 흰 수염을 쓸며 “공자왈 맹자왈” 하시던 촌로의 모습은 아이들에게 세상의 질서를 가르치는 풍경 그 자체였다. 무슨 뜻인지 다 알 수는 없었지만, 그 말들에는 삶이 쉽게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는 어른들의 기도가 담겨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것은 훈계가 아니라 공동체가 아이들에게 건네던 보호의 언어였다.


내 기억 속에서 가장 아릿하게 남아 있는 장면은 정월 대보름 새벽이다. 어머니는 동이 트기 전 정한수를 떠놓고 가족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가며 기도를 올리셨다. 토정비결을 봐주는 어른에게서 받아온 종이 꾸러미를 펼쳐 들고, 아버지는 술과 음식을 조심하라 하시고, 자식들은 저마다 조심해야 할 달을 일러주셨다.

그 말들은 잔소리가 아니라 험한 세상을 건너기 위한 안내였다. 그 엄숙한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대보름의 식탁이 차려졌다. 아홉 가지 나물과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오곡밥을 지어 이웃과 나누어 먹으며 서로의 건강을 빌던 풍경. 쥐불놀이의 불꽃 아래서 부럼을 깨물며 웃던 아이들의 얼굴에는, 한 해가 무사히 흘러가길 바라는 마을 전체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시간이 흐르며 세상은 훨씬 편리해졌다. 이제 장성한 자식들은 차례도 없고, 만둣국도 없는 명절이 조금 아쉽지만 오히려 부담 없다고 말한다. 그 말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만둣국 한 그릇이나 형식적인 의례가 아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누군가 나를 위해 새벽잠을 설쳐가며 복을 빌어주던 그 지극한 정성,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안부를 전하던 관계의 온기다. 물리적인 공간은 포크레인 한 번에 사라질 수 있지만, 기억 속에 기록된 풍경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나는 이 글을 통해 사라지는 것들의 뒷모습에 조용히 손을 흔든다. 소리가 떠나고 적막만 남은 도시에서, 우리가 다시 복원해야 할 것은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던 그 좁고도 뜨거웠던 마음의 길이다. 한때 그 길 위에서는 “복조리 사려—” 하는 외침이 새벽을 깨웠고, 그 소리는 마을 전체를 하나로 묶어주었다.

우리는 다시 그 골목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 골목이 품고 있던 마음만큼은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란다. 정월 대보름의 달빛 아래서, 잊힌 소리들이 다시 한 번 우리의 삶을 두드리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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