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끈한 세상에서 지문을 생각하다
내 손끝에는, 내가 모르는 내가 새겨져 있다.
오늘 아침, 스마트폰 화면 위에 남은 지문을 한참 바라보았다.
알람을 끄고, 뉴스를 넘기고, 메시지를 확인하는 동안 무심히 남겼을 흔적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자신의 지문을 찍으면서도, 그 모양을 제대로 들여다본 적은 없다. 화면에 번진 그 자국은 얼룩이 되어 금세 닦여 나간다. 매끈함을 방해하는 흔적은 곧 지워야 할 것이 된다.
요즘 우리 사회의 풍경도 어딘가 그렇게 매끄럽다. 기술은 ‘심리스(Seamless)’를 지향하고, 모든 저항과 이음새를 제거하는 데 몰두한다. 우리는 불편함이 사라진 세계를 진보라고 믿는다. 클릭 한 번이면 연결되고, 터치 한 번이면 인증된다. 마찰 없는 속도는 편리하고, 매끈한 화면은 세련돼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렇게 매끄러운 세상에서 우리의 말은 점점 더 거칠어졌다. 세대와 세대가 부딪히고, 익명성 뒤에 숨은 문장들이 서로를 찌른다. 우리는 프로필 사진과 몇 줄의 텍스트로 상대를 판단한다. 눈을 마주치지 않고, 손을 맞잡지 않은 채 말을 주고받는다. 접촉이 사라진 자리에는 온기도 함께 사라진다. 마찰이 없으니 머무름도 없고, 머무름이 없으니 이해도 없다. 우리는 매끈한 유리벽 너머에서 서로를 향해 날 선 말을 던진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서로의 지문처럼 다른데, 왜 그 차이를 할퀴는 데 사용할까.
지문은 거칠다. 확대해 보면 수많은 능선이 굽이치며 얽혀 있다. 그러나 그 거칠음은 상처를 내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붙잡기 위해,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만들어진 구조다. 손바닥이 완전히 매끄럽다면 우리는 컵 하나도 제대로 쥐지 못할 것이다. 넘어지는 이를 붙잡을 수도 없을 것이다.
마찰은 소음이 아니라 존재의 증명이다. 서로 다른 결이 부딪힐 때 생기는 불편함은, 어쩌면 우리가 아직 서로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 화가 난다는 것은, 그가 내 세계와 전혀 무관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완전히 무관심하다면 우리는 분노조차 느끼지 않을 테니까.
진정한 하모니는 모든 음이 똑같아질 때 만들어지지 않는다. 서로 다른 음이 제 자리를 지키며 울릴 때, 비로소 화음이 된다. 사회의 정화 역시 차이를 지우는 데 있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 차이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나의 거친 문양을 칼날처럼 세울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를 붙잡는 손끝으로 남겨둘 것인지.
다음에 누군가와 부딪히는 순간, 나는 잠시 멈춰 보려 한다. 그 사람의 손끝에도 나와 다른 무늬가 새겨져 있음을 떠올리려 한다. 살아온 시간의 결이, 견뎌온 마찰의 흔적이 그 안에 담겨 있을 것이다. 차가운 비난을 던지기 전에, 우리가 서로 다른 질감을 가진 존재임을 먼저 인정해 보려 한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지문부터 바라봐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 거친 무늬가 상처가 아니라
지탱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