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은 겨울이 완성한 보고서의 첫 장이다
경칩(驚蟄)이다. 방송은 일제히 봄의 시작을 알린다. 대지가 기지개를 켜고, 겨울잠 자던 생명들이 깨어난다고 말한다. 마치 오늘부터 새로운 한 해의 막이 오르는 듯 세상이 들썩인다.
그러나 나는 조금 다른 자리에서 이 계절을 바라본다. 임산학(林産學)을 공부한 사람의 눈으로 보자면, 이 화려한 ‘봄의 서막’은 사실 지난겨울이 써 내려간 보고서의 첫 페이지에 가깝다. 시작은 오늘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푸른 잎이 돋아야 비로소 시작이라 말한다. 하지만 나무의 진짜 시작은 역설적으로 낙엽의 순간이었다.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나무는 단호해진다. 제 몸의 일부였던 잎을 미련 없이 떨구는 일. 그것은 계절에 밀려난 수동적 항복이 아니다. 수분 통로를 스스로 봉쇄하고, 체내 농도를 높이며, 혹한을 견딜 구조로 몸을 재편하는 능동적 결단이다.
비대함을 버리고 본질만 남기는 일. 나는 그 선택을 ‘거룩한 단절’이라 부르고 싶다. 나무는 버림으로써 살아남는다. 그리고 그 단절의 자리에서 비로소 다음 생을 향한 준비가 시작된다.
잎을 비워낸 자리에는 추재(秋材)라는 나이테가 새겨진다. 봄과 여름의 춘재가 빠른 성장으로 부풀어 오른 조직이라면, 겨울로 향하는 추재는 세포벽을 두껍게 쌓아 밀도를 높인 조직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은 없지만, 목질은 훨씬 단단해진다. 성장의 속도는 느리지만, 구조의 강도는 높아진다.
나무는 가장 추운 시간에 가장 치밀해진다. 내부의 압력이 최고조에 이르는 임계점을 통과하면서 비로소 다음 봄을 열 자격을 얻는다.
이 대목에서 나는 제주 유배지의 혹독한 겨울을 견뎌야 했던 추사 김정희를 떠올린다. 그는 권력이라는 잎사귀를 모두 떨군 뒤, 외딴 섬에서 스스로를 단단하게 벼렸다. 그 혹한의 시간을 지나며 탄생한 그림이 바로 세한도(歲寒圖)다.
앙상한 나무 몇 그루가 서 있는 그 적막한 화면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다. 그것은 한 인간이 겨울이라는 임계점을 통과하며 얻어낸 정신의 밀도, 곧 자신의 ‘추재’를 증명하는 기록이다. 마른 붓끝에서 번져 나오는 갈필은, 혹한을 견딘 나이테의 문양처럼 보인다.
오늘 막 돋아난 새싹은 연약하고 부드럽다. 그 싹이 장차 거목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미 단단해진 조직 덕분이다. 춘재가 현상이라면 추재는 본질이다. 봄이 발현이라면 겨울은 잉태의 시간이다.
경칩의 환한 햇살 아래, 우리는 깨어남을 축하한다. 그러나 진짜 질문은 따로 있을지 모른다. 나는 지난겨울 무엇을 떨구었는가. 무엇을 포기했고, 무엇을 봉인했으며, 무엇을 밀도 있게 쌓아 올렸는가.
나이가 들수록 봄의 환호보다 겨울의 침묵이 더 깊이 다가온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던 시간들이 실은 가장 치열한 준비의 계절이었음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그러니 오늘 경칩에 나는 들뜨기보다 돌아본다. 내 안의 겨울이 남긴 선(線)을 가만히 쓰다듬는다. 남들이 시작을 말할 때, 나는 이미 그 이전의 시간을 생각한다.
진정한 시작은 언제나 가장 고요하고, 가장 추운 자리에서 먼저 움튼다. 봄은 갑자기 오는 계절이 아니라, 겨울이 끝까지 버텨낸 뒤에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약속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