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立春), 곰배령의 봄을 듣다

봄은 오는 것이 아니라, 안쪽에서부터 들려온다

by 박동환

입춘(立春)이 지났다. 달력의 숫자는 이미 봄의 문턱을 넘었다고 말하지만, 내가 서 있는 곰배령 산정은 여전히 고집스러운 겨울의 한복판이다. 살을 에는 매서운 칼바람은 '입춘'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만큼 엄연하고, 시야에 닿는 모든 곳은 아리도록 눈부신 설국(雪國)의 영토다.

곰배령 트래킹을 앞두고 밤잠을 설친 건, 아마도 이 기묘한 계절의 경계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겨울 산행의 혹독함보다는, 겨울의 끝자락에서 피어날 새로운 풍경에 대한 막연한 기대. '천상의 화원'이라는 화려한 이름 뒤에 숨겨진 늦겨울의 민낯을 마주하기 위해 나는 인제군 진동리 설피마을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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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정원으로 들어서는 법

곰배령은 함부로 발길을 허락하지 않는다. 산림유전자원 보호를 위해 철저히 통제된 이곳은 사전에 허가를 얻은 소수만이 정해진 시간에만 입산할 수 있다. 그 금기(禁忌)가 주는 묘한 긴장감 때문일까. 점봉산 생태관리센터 입구에 서니 마치 임금의 사냥터나 깊숙이 숨겨진 비밀의 정원 입구에 선 기분이 들었다.

아이젠과 스페치를 채비하며 신발 끈을 고쳐 매자 장딴지에 팽팽한 긴장감이 차올랐다. 등산로는 다져진 눈과 결빙으로 단단했다. 차라리 계곡의 얼음길을 걷는 게 운치 있겠다 싶어 내려선 길, 두터운 얼음장은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쩡, 쩡’소리를 연신 토해내었다. 그 투박하고도 맑은 소리는 계곡의 바위벽을 퉁기며 서늘한 메아리로 되돌아왔다. 진동계곡은 이토록 꼿꼿하게 제 겨울을 포기할 수 없다는 듯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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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하는 숲, 기다림의 경이

신갈나무와 산뽕나무가 호위하는 낙엽활엽수 숲을 지나자, 전나무와 주목이 어우러진 혼재림 군락이 일행을 맞이했다. 허리춤까지 차오른 눈더미는 솜사탕처럼 폭신하게 숲바닥을 덮고 있었다. 쨍하게 시린 겨울 하늘을 비집고 쏟아지는 은밀한 햇살이 얼음 결정에 부딪혀 눈부신 향연을 펼쳐 보였다.

관목 숲이 걷히고 하늘 아래 첫 동네 같은 평원이 펼쳐졌을 때,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곰배령 정상이다. 옷섶을 파고들던 매서운 바람이 잦아드는 찰나, 그 정적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이 따스했다.

산등성이의 전나무와 주목들은 제 어깨에 내려앉은 겨울의 무게를 다 이겨낸 듯 보였다. 무거운 눈더깨를 억지로 털어내지 않고, 이 추위가 스스로 기운을 잃고 물러날 때까지 묵묵히 숨을 죽이며 견디는 시간. 그 인고의 과정이 새삼스레 경이롭게 다가왔다. 기다림이란 단순히 시간이 흐르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그 무게를 감내하는 일임을 나무들은 가르쳐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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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장 밑에서 밀어 올리는 봄

하지만 이번 산행에서 마주한 가장 큰 반전은 하산길에 있었다. 꽁꽁 얼어붙은 계곡의 틈새를 뚫고, 입춘의 기운을 받은 세찬 물줄기가 연신 하얀 거품을 토해내고 있었다. 겉으로는 죽은 듯 고요한 빙판 아래서, 곰배령은 이토록 격렬하게 봄을 밀어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귀를 기울여 본다. 얼음장 밑을 흐르는 저 힘찬 물소리는 노란 복수초의 잠을 깨우는 소리이자, 닫혔던 생명의 문을 두드리는 고동 소리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노란 꽃망울이 얼음장 밑의 물소리에 눈을 뜨고 기지개를 켤 것이다.

어깨의 눈을 억지로 털어내지 않아도 때가 되면 추위는 물러가고 물길은 터지기 마련이다. 서두르지 않아도 계절은 오고, 견디는 자에게 햇살은 공평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곰배령 설원 위를 비추던 그 눈부신 햇살과 얼음 밑 물소리를 마음 한 조각에 담아왔다. 겨울의 긴 터널을 통과하고 있는 우리 모두의 어깨 위에도, 곧 이 따스한 입춘의 햇살과 생동하는 물소리가 머물기를 소망해 본다. 봄은 오는 것이 아니라, 안쪽에서부터 들려오는 것임을 이제야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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