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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희정 Sep 09. 2024

[2] 내 몸은 천천히, 그리고 확실히 침몰 중

출판사를 그만둔 지 어느덧 세 달이 흘렀다. 특별한 일은 없었다. 처음에는 약간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이내 익숙해졌다. 아침 6시만 되면 눈이 저절로 떠지고,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나 거실로 간다. 아내는 출근 준비로 바쁘고, 딸은 학교에 갈 준비에 정신이 없다. 그 둘의 움직임 속에서 나는 유령처럼 떠다니고 있다. 그들은 바쁘게 움직이고, 나는 멀찍이서 그 모든 것을 구경하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다.


책상 위에는 노트북과 책들이 나를 노려보고 있다. 그러나 글은 좀처럼 써지지 않는다. 출판사를 그만둘 때는 이렇게 시간이 많으면 글이 술술 써질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생기니, 오히려 글은 더 멀어졌다. 몸은 무겁기만 하다. 하루에 겨우 한 시간씩이라도 글을 써보려 애써보지만, 쓰고 나면 기운이 탈탈 빠진다. 마치 글을 쓰는 것이 무슨 마라톤이라도 되는 양. 이제는 글을 쓰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부담스럽다. 혹시 내 의자에 숨겨진 자석이라도 있나? 싶을 정도다.


어느 오후, 도저히 집에 갇혀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집 근처 공원으로 나갔다. 공원에선 적어도 자유롭게 숨을 쉴 수 있을 줄 알았다. 출판사에 다닐 때는 이렇게 공원에 나갈 시간도 없었는데, 이젠 시간이 넘쳐난다. 문제는 내 몸이 이젠 그 시간을 거부하는 것 같다. 가벼운 산책을 시작해 보았지만, 몇 걸음 걷지도 못해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다리는 쇠처럼 무거워졌다. 몸이 마치 저항이라도 하는 듯했다.


벤치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가볍게 달리고, 아이들과 신나게 놀고 있었다. 그들과 비교하니 나는 무척 느리고, 묵직했다. 문득 내 몸이 물속에 잠기고 있다는 기묘한 생각이 들었다. 아주 천천히, 발끝에서부터 물이 차오르는 것처럼. 처음엔 발목이, 그다음엔 종아리, 이제는 허리까지 물에 잠긴 기분이었다. 그 물은 차갑지도 않았고, 오히려 따뜻했다. 하지만 그 따뜻함은 마치 나를 점점 더 아래로 끌어내리는 것 같았다.


그 벤치에서 한동안 꼼짝할 수 없었다. 물속에 갇힌 느낌이었다. 나를 감싸는 그 물이 점점 깊어졌다.

그날 저녁, 아내에게 말했다. "운동을 좀 시작해야 할 것 같아."

아내는 별다른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요즘 많이 힘들어 보이더라.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해."

‘천천히 하라니, 천천히 할 시간이 없는데.’ 내 나이 마흔을 눈앞에 두고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게 문제다.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영원히 시작할 수 없을 것만 같다. 그런데 내 몸은 이미 그걸 알아차리고, 나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피로 물질이 아니라 정말 물의 질감으로. 그 물은 점점 깊어져 가고, 나를 바닥으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며칠 후, 딸과 함께 놀이터에 갔다. 딸은 그네를 타고 높이 올라갔다 내려왔다. 나는 그 옆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문득, 그네가 나의 삶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네는 높이 올라가면 반드시 깊이 내려온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가끔 글을 쓰거나 몸을 움직이면 잠시 기운이 나는 것 같다가도, 곧 더 깊은 피로가 몰려온다. 마치 그네처럼, 위로 치솟았다가 이내 아래로 떨어지는 반복.

나는 딸에게 웃으며 말했다. "아빠는 왜 너처럼 계속 그네를 탈 수 없을까?"

딸은 나를 한참 바라보더니, 천진하게 말했다. "그럼 아빠, 내가 그네 밀어줄게."

딸의 말에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딸이 내 몸을 대신 밀어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내 몸의 무게는 내 몫이었고, 그 무게는 점점 더 깊이 가라앉고 있었다. 뭐, 할 수 있는 건 그저 버티는 것뿐이었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웠을 때 기어코 물속에 완전히 잠긴 기분이 들었다. 물이 목까지 차올랐고,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이 물속에서 나는 더 이상 헤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러나 그 두려움 속에서도 나는 잠이 들었다. 많이 피곤했나 보다. 물은 여전히 내 몸을 감싸고 있었지만, 나는 그 속에서 어쨌든 꿈을 꾸고 있었다.


아침 6시, 여전히 눈이 떠진다. 몸은 여전히 무겁고, 물속에 잠긴 듯한 느낌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그 물속에서 나는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 물은 나를 짓누르지만, 나는 그 속에서 어떻게든 움직이고 있다.(실제로는 수영을 할 줄 모른다.) 어쩌면 나는 그 물속에서 더 오랫동안 머물러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법을 배우기 전까지는, 그저 그 안에서 버티며 살아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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