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by 재윤

불과 1년 전만 해도 글을 쓰는 일은 나에게 고역이었다. 문제는 늘 소재였다. 매일 글을 쓰겠다고 다짐했고, 실제로 그 약속을 몇 달은 지켜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더는 쓸 말이 남아 있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책을 읽다 문득 떠오른 주제가 분명 있었는데, 막상 책상 앞에 앉으면 그 생각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때 고안해 낸 것이 휴대폰 메모장 기능이었다. 순간 떠오른 생각을 붙잡아 두기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소재 고갈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했다.


메모장에 적어 둘 때는 글의 방향이 또렷하게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실제로 글을 쓰기 시작하면 그때의 감정과 감성은 금세 흩어졌다. 그렇게 한동안 글을 멀리한 적도 있다. 그럼에도 다시 돌아와, 어찌어찌 오늘도 글을 쓰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마음이 힘들 때 글은 더 잘 써진다. 그 글이 결국 나 자신에게 건네는 위로이기 때문일 것이다. 감정은 또렷해지고, 어떤 날은 숨 돌릴 틈도 없이 글을 써 내려간다. 수정도, 편집도 없이 그대로 올린 글이 대부분이었다.


예술가들은 삶이 고단할수록 작품이 잘 나온다고 말한다. 나는 예술가는 아니지만, 감정에 민감한 인간이기에 그 말이 완전히 틀리지는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나는 지금까지 글을 써 왔다.


최근에 내가 찾은, 그리고 지금까지 꽤 요긴하게 쓰고 있는 방법이 하나 있다.

"아무 말이나 쓰는 것이다."


고명환 작가의 책을 보면, 김치찌개 레시피를 적다 보면 그것이 문장이 되고, 거기에 생각을 더하면 문단이 되어 결국 한 편의 글이 완성된다고 말한다. 그 문장을 읽고 용기를 얻었다. 그래서 요즘은 그냥 쓴다.


직접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매일 글을 쓴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이 일을 어느덧 5년째 하고 있다. 사실 이쯤 되면 누군가 출판 제안을 해줄 법도 한데, 아직은 내 글이 그만큼은 아닌 모양이다.


물론 운이 따라 한 번 책을 출간한 적은 있다. 하지만 가끔 그 책을 다시 펼쳐 보면 손발이 오그라든다. 도대체 무슨 말을 그렇게 써 놓았는지. 책이 많이 팔리지 않아서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 책 속의 나는 멋있는 척은 잔뜩 하면서, 정작 그렇게 살지도 못한 채 남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훈계를 늘어놓고 있었다. 스스로 졸작이라고 평가하면서도, 그 책을 미워하지는 못한다. 허세 가득한 문장들, 없어 보이는 문장들까지도 모두 내 삶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언젠가 내가 다시 책을 내고, 조금이라도 유명해진다면 그 책은 아마 나의 오점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인생은 오점을 통해 완성된다고. 실수와 실패, 낙담과 실망을 지나며 우리는 조금씩 사람다워진다고. 부족했던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지금부터 쌓아갈 나의 하루들이 결국 나의 미래를 만들 것이다.


여전히 글에 대한 갈증은 크다. 하지만 지난 글들은 모두 내 삶이었다. 치열했고, 처절했던 나의 기록이다. 끝까지 지켜봐 주길 바란다. 겨우 5년이 흘렀을 뿐이다. 어쩌면 오늘이 내일의 영광을 예고하는 전조일지도 모른다.


물론 내일도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글을 쓸 것이고, 또 내일이 오늘보다 조금 더 나아지기를 바랄 것이다. 그 반복 속에서, 글을 쓰는 매 순간이 점점 더 즐거워지고 있다. 내 생각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다.


어제의 글을 기점으로, 나의 글은 조금씩 밝아질 것이다. “더 이상 아프지 않다”고 써 내려가다 보니 정말로 덜 아파졌고, “불안하지 않다”고 써 내려가다 보니 어느새 불안도 나를 놓아주었다. 이것이 글의 힘이고, 글의 위대함이라고 믿는다.


올해 한 번쯤은 실패하더라도 다시 출판 기획서를 제출해 볼 생각이다. 안 되면 또 쓰면 된다. 실력이 부족하면, 더 쌓아 올리면 그만이다. 삶을 외면하던 시간을 지나, 반성을 마치고 다시 삶을 정면으로 마주한 지금. 내 일상은 감사함으로 조금씩 채워지고 있다. 나를 아프게 했던 사람도, 미워했던 사람도 이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 감정이 하루아침에 찾아온 것은 아니다. 아주 느린 속도로, 그러나 분명하게 나를 통과해 왔다. 무너졌던 마음이 다시 제자리를 찾기까지, 나는 매일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은 방식으로 하루를 기록했다. 그 반복 속에서 감정은 정리되었고, 생각은 단단해졌다.


오늘도 내 글을 읽어 주어 진심으로 감사하다.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무명의 작가가 세상에 빛을 비추게 된다면, 보잘것없던 시절에도 조용히 응원해 주던 당신들을 반드시 기억하겠다.


그리고 오늘도, 나는 글을 쓴다.

잘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 있기 위해서.


그것으로 충분하다.

오늘도 글쓰는 재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