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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착취, 그럴듯한 가면을 쓴 폭력!

by 재윤

우린 살다 보면, 스스로를 너무 쉽게 착취한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밤늦게까지 일하고, 남들은 쉴 때 혼자 미래를 준비한다며 또 다른 일을 벌인다. 그리고 그걸 멋진 삶이라 착각한다.


처음엔 분명 '성장'을 위해 시작했을 것이다. 조금 더 나은 내가 되고 싶어서,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사랑받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해. 하지만 문득, 내 안에서 이런 질문이 툭 튀어나온다.


"지금 나는 나를 돌보고 있나, 아니면 이용하고 있나?"


사실, 자기 착취는 성실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많이 일어난다. '열심히 사는 것'과 '스스로를 쥐어짜는 것'은 다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차이를 종종 모른 척한다.


남들이 '멋지다'라고 말할까 봐.


멈추면 죄책감이 덮쳐올까 봐.


쉬면 뒤처질 것 같아서.


그래서 오늘 나는 쉼 없이 나를 몰아붙인다.

심지어 자책까지 한다.


'나는 왜 이것밖에 못하지?'


'좀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이런 마음마저도 동기부여라 착각하며, 나는 나를 더 깊이 갉아먹는다.


그러다 문득, 모든 게 무의미해지는 순간이 온다. 열심히 했는데도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았다는 허무함. 쥐어짠 만큼 남는 건 피로뿐이라는 슬픔.


그리고 그제야 깨닫는다. 나는 지금껏, 나를 돌본 적이 없었다는 걸. 중앙대학교 김누리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더 이상 외부에서 억압당하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를 착취하는, '자기 노예화' 시대를 살아간다."


예전 노예 제도에선 채찍을 들고 노예를 감시하던 감독관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감독관이 내 안에 있다. 스스로를 일터에 내몰고, 스스로에게 쉼을 금지하며, 스스로를 못났다고 꾸짖는다.


나는 노동자이자, 감시자이고, 동시에 나 자신의 감옥이다. 자유롭다고 믿지만, 사실은 스스로에게 묶여 살아간다. 그렇게 나 자신을 착취하며 생산성이라는 신을 위해 기도하듯 살고 있진 않은가?


진짜 노력은 스스로를 해치지 않고도 할 수 있다. 진짜 성장은 스스로를 존중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오늘 하루, 당신은 자신을 얼마나 챙겼는가? 당신의 노력은 정말 당신을 위한 것이었는가?


혹시... 멋지게 포장된 자기 착취는 아니었는가?


자신을 갈아 넣어 만든 성취는 오래가지 않는다. 스스로를 지키며 버틴 사람만이, 끝까지 살아남는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은 당신을 돌보고 있는가, 아니면... 당신 안의 감독관이 또다시 채찍을 들고 있는가?


글 쓰는 재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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