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아이들은 부모에게 욕심나는 자식이고 싶다
어린 시절 내가 엄마에게 품었던 가장 큰 오해는 "엄마는 동생만 좋아해"였다. 한 살 어린 동생은 어릴 적부터 영특해서 부모님의 기대와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난 과외에 학원까지 다녀도 90점을 넘기기가 힘들었는데, 동생은 사교육 도움 전혀 없이 2~3일 밤샘공부로도 늘 100점을 받아왔다. 그래서였을까, 부모님은 없는 살림임에도 동생에게 과학고 준비를 권했고, 내겐 동생에게 공부하는 방법을 배우라고 했다. 굴욕적이게도 말이다.
어릴 땐 이게 사랑의 크기 차이에서 나오는 편애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다섯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있냐고 했지만, 다섯 손가락 중 하나인 자식 입장에서는 그 안에서 유독 엄마의 마음이 가는 아픈 손가락이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난 그게 똑똑한 동생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런데 내가 아이를 낳고 부모가 되어보니, 그것도 셋씩이나 낳은 엄마가 되어 보니, 그 말의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세 아이들 중 눈길이 더 많이 가는 자식이 있는 건 맞지만, 그 이유는 사랑이 아닌 '욕심의 크기'때문이었다. 자식의 비범한 모습에 괜히 설레발 쳐지는 부모의 욕심 말이다. 그리고 그 욕심은 대게 공부에 대한 욕심이었다.
아이가 하나일 때는 몰랐다. 아이가 하나면 비교대상이 없으니, 아이가 늦돼도 '원래 완벽주의 성향의 아이들이 조금 늦돼다더라'라고 합리화하며, 아이가 성장을 천천히 지켜봤다. 그런데 둘째가 생기니, 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첫째와 둘째의 발달 속도를 비교하고 있었다.
둘째는 첫째에 비해 모든 게 다 빨랐다. 원래 둘째가 첫째보다 빠르다고 하지만, 우리 집 둘째는 그 속도가 남달랐다. 8개월 만에 뒤집기를 한 첫째와 달리, 둘째는 4개월 만에 뒤집고, 10개월 만에 걸었다. 첫째는 말이 늦게 트여 영유아검사 때마다 '언어 추적검사 요함'이라는 문구가 따라붙었었는데, 둘째는 돌 때부터 말이 트이더니, 21개월이 된 현재는 웬만한 의사소통이 다 가능해졌다.
둘째 어린이집 선생님들도 '똑 부러지고 야무진 똑순이'라고 말해주니, 둘째를 향한 부모의 욕심은 날이 갈수록 커져갔다. 남편과 둘이서 서로를 닮았다며 우쭐해하며, 아직 두 돌도 안 된 애를 두고 "얘는 공부를 잘할 것 같으니, 대치동까진 못 가더라도 목동으로는 가자"며 이사 계획까지 세웠었다. 아이에 대한 데이터는 첫째가 전부인 우리 부부에게 둘째는 천재나 다름없었다.
혼자였을 땐 '완벽주의자 영재' 소리 듣던 첫째는 동생이 생기자 갑자기 평범한 3살, 4살, 5살 아이가 됐다. 둘째에겐 '나중에 의사를 시키네, 판검사를 시키네'하며 부모가 자식에게 품을 수 있는 모든 욕심을 다 부렸으면서, 정작 첫째에게는 아무 욕심 없이 그저 지금처럼 밝고 건강하게 크기만을 바랐다.
부모의 기대와 욕심을 먹고 자란 아이와
아무런 욕심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
둘 중 누가 더 행복한 아이일까?
요즘 '4세 고시'와 '7세 고시'라는 말이 심심찮게 들릴 정도로 유아 사교육 열기가 뜨겁다. 그리고 유아 사교육시장이 커질수록 소아정신과에도 전보다 많은 사람들이 몰리고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부모의 욕심으로 한창 밖에서 뛰어놀아야 할 아이들이 학대를 당한다며 안타까워하고, 부모는 '다 자식 잘 돼라'는 뜻에서 한 거라며 억울해했다. 뭐가 맞든 간에 확실한 건 지나친 기대와 욕심은 아이에게 짐이 됐다.
그럼 부모로부터 아무런 욕심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는 어떨까?
앞에서 말했다시피 내 밑에는 워낙 뛰어난 동생이 있어, 난 유년시절부터 부모님의 기대와 관심을 크게 받지 못하고 자랐다. 아파트 관리사무소 소장님이셨던 부모님은 대학을 나와도 취업난이 심하다는 걸 알고, 당시 고등학생던 내게 대학이 아닌, 주택관리사 시험 준비를 권했다. 그 후 몇 년 뒤 나의 고집으로 본 수능에서 원하는 만큼의 점수가 나오지 않아 재수를 하고 싶다고 말하자 부모님은 '재수는 10명 중에 2명만 성공한다'는 말로 재수 지원을 거절하셨다. 그리고 또 몇 년이 지나 취업을 준비할 때는 중소기업만 가도 대박이라며, 내가 대기업을 갈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1도 안 하셨다.
'그저 건강하게만 자라라'는 부모님의 말을 먹고 자란 나는, 부모님의 소망대로 신체적으로는 정말 건강한 어른이 됐다. 하지만 겉만 멀쩡했을 뿐 심적으로는 너무나 나약하고 위태로운 어른이 되어 있었다. 일 년 내내 감기로 이비인후과에 간 적은 없었지만, 오랫동안 품고 있었던 마음의 감기로 10년 이상 심리상담치료를 받았다. 나의 20대는 태산같이 높은 동생 밑에 드리워진 그늘과 세상의 평균치에 치이고 꺾여 실처럼 가느다란 뿌리로 자신을 지켜내고 있었다. 당시에는 내가 뭘 잘하는지도 몰랐고, 남들의 입발린 칭찬에도 홀라당 넘어갈 정도로 줏대가 없었다.
자식의 자존감은 부모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과 건네는 말에서 뿌리를 내린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식을 향한 부모의 욕심은 사랑과도 같다. 욕심도 받아본 사람이 자신에게 욕심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욕심을 받아본 아이들은 자신에 대한 기댓값이 높으니, '난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있다.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해, 넌 널 너무 과대평가해'라는 말을 듣고 자란 아이들은 늘 자기 의심에 둘러싸여 시작이 어려운 사람이 된다.
그러므로 자식을 건강히 키우기 위해서는 적당한 욕심 투영은 필수다. 이미 건강한 아이에게, '지금처럼 건강하게만 자라라'는 말은 욕심이 아니다. 오히려 그 말은 아이의 가능성에 한계를 짓고, 더 크게 날아오를 수 있는 날개를 꺾는 표현이다. 자존감은 스스로 키우는 거지만,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자아상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인정에서 꽃 피운다.
그동안 동생의 특출함에 잠시 가려져 있던 첫째를 가만히 바라봤다. 책 속 내용에 흠뻑 빠져 읽는 둘째와 달리, 첫째는 책으로 집을 짓고, 자동차를 만든다. 한 번은 "엄마, 엄마! 이리 와봐"해서 가보니, 종이벽돌블록으로 로봇경찰을 만들었다며 우쭐해했다. "우와~ 멋지다!"라는 엄마의 리액션에 그 작은 얼굴에서 꽃이 피어난다. 발갛고, 생기 넘치는 반짝반짝한 모습으로 말이다.
딸은 내 무릎에 앉아 "난 요리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리고, 높은 곳도 잘 올라가고, 영어도 잘한다"며 끝없이 조잘조잘 얘기한다. 다 한 번씩 내가 잘한다며 칭찬해 줬던 것들이었다. "그래, 맞아. 우리 OO이는 잘하는 것도 많고, 창의적이기까지 하지, 게다가 약속도 잘 지키고 말이야"하니 부모의 인정에 딸아이는 해사하게 웃으며 "맞아"라고 누구보다 크게 대답한다.
세상 모든 아이들은 부모에게 욕심나는 자식이 되고 싶다. 그러니 나도 '한 놈만 걸려라'가 아닌, 모든 놈이 다 잘될 수 있도록 세 아이를 한껏 욕심 있게 키워봐야겠다.
얘들아, 너희들은 모두 엄마, 아빠의 자랑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