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되니, 내 엄마가 용서됐다.
잘못을 덮어두는 걸 용서라고 착각하거나 아니면 잠깐 좋은 감정에 속아 자신이 상대를 완전히 용서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이는 진정한 용서가 아니다. 진정한 용서란 그 사람을 떠올려도 조금의 미운 감정 없이 평안한 마음상태가 유지되는 것을 말한다.
엄마를 진심으로 용서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엄마를 이해하고 싶었다. 엄마의 마음이 이해가 돼야 용서가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의 용서는 엄마를 위한 게 아니었다. 미워하는 마음 없이 온전히 평안하고 싶은 나를 위한 용서였고, 내가 내 인생을 위해 낼 수 있는 가장 큰 용기였다.
하지만 이해와 용서는 별개였다. 이해가 안 돼도 용서는 가능했다. 미워하는 데 많은 에너지가 드는 것처럼 한 사람을 용서하는 데도 큰 노력이 필요할 줄 알았다. 하지만 용서는 팽팽하게 긴장됐던 줄이 한순간 툭하고 끊기는 것처럼 갑자기 찾아오는 거였다.
엄마가 뭘 해서 용서가 된 게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게 두 딸이 생기니 나는 자연스럽게 내 엄마를 용서하고 있었다.
흔히 자식을 낳아봐야 부모의 마음을 안다고 한다. 나도 한때는 자식이 생기면 엄마를 이해할 수 있을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말은 내게는 해당사항이 아니었다. 나는 오히려 아이를 낳으니 엄마가 더 이해가 안 된 특이한 케이스였다.
자식을 낳고 알았다. 엄마와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우리는 이해가 아닌 다름을 인정하는 게 먼저였다.
유년시절 부모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 한 아이는 성인이 된 후에도 부모에게 애정을 갈구한다고 한다. 그동안 엄마에게 끊임없이 상처를 받으면서도 계속 잘 보이려 애썼던 이유가 유년시절의 결핍 때문이라는 것을 엄마를 이해하려는 과정에서 알게 됐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유년시절 결핍된 애정은 부모만이 채워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엄마가 된 후 난 매일매일 두 딸들에게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다. 자식이 부모에게 주는 이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으로 난 더 이상 사랑이 고프지 않다.
용서는 마음에 여유가 있고, 사랑이 많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었다. 마음에 사랑이 차고 넘치니 이제 더 이상 엄마가 밉지 않았다.
나의 용서는 이렇게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