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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명의 간호사와 함께 걷는 발걸음

by 너울

나는 임상 경험이 길지 않은 간호사다. 종합병원에서 만 4년을 근무했지만, 10년 넘게 일한 선배들 앞에 서면 그저 작은 점 하나 같았다.

간호사가 꿈도 아니었고, 종합병원에서 일하고 싶다는 소망도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어디에 있든 나는, 주어진 자리를 헛되이 두지 않으려는 열정 많은 사람이었다. 결국 그 열정을 오래 이어가지 못해 탈임상을 선택했지만, 그 시간들이 내 삶에서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지금은 안다.


종합병원 간호사로서의 경력이 이제 많은 곳에서 쓰이고 있다. 강사라는 직업군에 발을 딛게 해 준 가장 중요한 기반이었고, SNS를 통해 예상치 못한 기회로 확장되기도 했다. KG에듀원에서 간호사를 위한 법정 직무교육 이러닝 개발을 제안받았을 때가 그랬다.


임상 경력이 짧다는 이유로 꽤 오랜 시간 망설였다. 부족함이 드러날까 침묵을 택하기도 했다. 결국 자신감보다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간절함이 나를 움직였고, 그렇게 나는 이러닝 개발이라는 또 다른 파도를 올라탔다.


그 선택 덕분에 지금은 365 평생교육원에서 이러닝 개발자로 활동 중이고, 산업보건 전문인력으로 정식 등록되며 재택근무의 장점을 누리는 정규직으로도 일하고 있다. 그 자체로도 감사한 일이지만, 여정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러닝 과정 개발 후, 수백 개에 달하는 문제들을 내가 직접 출제했다. 객관식, 단답형, 서술형까지 — 학습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질문들로 과정의 밀도를 채웠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만든 이러닝 과정이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간호사 선생님들께 닿았다.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했다. 그런데 오늘에서야 문득 깨닫는다. 나는 지금 그분들을 직접 만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학습자들이 제출한 과제를 평가하고, 내가 의도한 바를 잘 이해했는지 살피며, 첨삭과 함께 응원의 메시지를 전하는 튜터 역할을 맡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365 평생교육원에서 튜터 경험을 했기에 익숙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KG에듀원의 시스템에 접속한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1차시에만 무려 431명이 등록해 있었던 것이다.

그 모든 분들의 과제를 한 달 안에 첨삭해야 한다는 사실 앞에 잠시 멍해졌다. 과연 이게 가능한 일일까? 고민할 틈도 없이, 나는 하나씩 과제를 열어보기 시작했다. 과제를 읽고, 정성스러운 피드백을 작성하며, 이름을 꾹꾹 눌러 마지막 줄에 적어 보냈다.


하지만 첨삭 건수는 좀처럼 줄지 않았다. 오히려 매일 들어갈 때마다 늘어나는 과제 수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정을 미뤄가며 이 일에만 집중하고 있다. 끝이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으려 애쓰면서.


의무감으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 일이 점점 감동과 맞닿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간호사라는 타이틀이 만들어준 감동임에 틀림없다.


요양병원 등 현장에서 치열하게 실무를 감당하고 계신 선생님들과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이 내게는 영광처럼 느껴진다. 과제를 열람할 때마다 진심을 담아 써주신 문장들과 마주할 수 있다. 물론 간혹 다른 이의 과제를 그대로 제출하는 분도 있지만, 정성 앞에서는 괜스레 마음이 뭉클해진다.


예를 들어 이런 메시지를 남긴 적 있다.

“학습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치매 대상자를 돌보는 데는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 그리고 인간애가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본 과제를 통해 그 진심이 느껴졌습니다. 정신행동 증상에 대한 정확한 서술, 가성치매를 함께 언급해 주신 세심함, 일반적 대처방안까지 잘 작성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러닝 개발자이자 평가자로서, 선생님의 과제를 읽으며 뿌듯함을 느꼈습니다. 본 학습을 통해 더욱 따뜻한 전문가가 되시길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한 번도 얼굴을 본 적 없는 분들이다. 하지만 나는 그분들에게 편지 쓰듯 마음을 담는다. 이름을 또박또박 써서 마지막 문장을 완성할 때면, 왠지 내 마음도 같이 전해지는 듯하다.


431명의 간호사들과 함께 걷는 지금 이 시간. 이 자리에 내가 쓰임 받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말할 수 없는 축복이다.


이러닝 개발자가 되길 참 잘했다. 간호사를 선택했던 나의 결정도 훌륭했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주고 싶다. 이 기회를 통해 다시 한번 나의 길을 확인하고, 소중함을 깨닫는다.


아직 200명 가까운 분들과 더 만나야 한다. 과제 숫자를 보며 부담을 느끼기보다는, 그만큼 더 많은 간호사 선생님들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싶다.


만남은 늘 새롭다. 그리고 그 만남은 언제나, 나를 깊은 깨달음과 잔잔한 감동들 속으로 초대한다.

나는 이 초대에 매료되어 새로운 기회가 올 때마다 거부할 수 없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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