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어서 미안하지만 그래서 전해줄 수 있는 것이 있다.

by 너울

막둥이 태권도 학원에서 학부모 참여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시작하기 전 총 관장님이 이런 말을 전했다.


“많은 아이들 중에서 유독 나의 눈을 사로잡는 아이는 내 아이 일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아이가 보이기도 할 겁니다. 내 아이보다 유달리 잘하는 아이입니다. 보이는데 억지로 보지 않으려 애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 기억해 주심 좋겠습니다. 유별나게 잘하는 아이들은 오래 못 가더라고요. 자신이 잘하는 줄 알고 자만심이 찾아와서 중도에 그만두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조금은 느리더라도 천천히 그 과정을 이겨내는 아이들이 끝까지 갑니다.”


관장님이 전해주신 말씀대로 역시나 내 눈도 그렇게 따라 움직였다. 세상에는 “이치”라는 것이 있다. 내용도 다르고 모양도 다르지만 이상하게도 비슷한 결과를 불러내는 것들이 있다. 어쩌면 그런 공통점을 이치라고 부르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태권도를 30년 동안 가르쳐온 관장님이 깨닫게 되었던 조금은 느린 속도로 가고 있는 이야기는 나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너무 잘해서 17년 동안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잘하지 못하니까 잘하고 싶어 몸부림치며 지켜온 자리가 지금 서 있는 강의장이다. 이제는 몸부림쳤던 순간들을 다시 회상해야 할 때가 이르렀나 보다.


강사 양성과정을 맡았다. 강사가 강사를 가르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조금 세게 말하면 잘난 체한다 할 것이고, 너무 약 자세로 나가면 별거 아니네 하며 만만하게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상 양성과정을 하고 싶지 않았으나 결국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강의 시수가 늘어나고 강의장이 여러 곳이 되다 보니 내가 없는 빈자리를 채워 줄 또 다른 강사들이 필요해졌다. 강사를 내가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임강사로서 양성은 내 몫이 되었다.

무슨 내용을 전해야 할지 참 많은 고민을 하게 했던 순간들이다. 그런데 막둥이 태권도 참관 수업을 하며 들었던 관장님 이야기를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동안 겪어왔던 조금은 느리기에 힘들었던 과정들, 그리고 그 과정을 견디기 위해 노력했던 내용들을 풀어내는 것이 내 과제가 된 것이다.


브런치와 블로그에 많이 써두었던 내용들이 있다. 트집과 말꼬리로 강의 경력을 만들었던 강사이다. 내가 하는 말에 수도 없이 트집을 잡아대던 학생들이 있었고, 불만을 담아 거하게 전해주던 분들도 있었다. 잘하는 사람이었다면 이런 어려움도 없었겠지만 난 아주 느리게 걷던 27살의 강사였기에 많은 경험들이 있었다.


나이가 어리다는 것이 단점이 되어 발목을 잡아대던 시간들이 오히려 지금은 애늙은이 같다는 말을 듣는 40대가 되게 했다. 설 익었던 강의가 제 맛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라고 말해도 조금은 어울린다.


있는 그대로 전하려고 한다. 처음 강의장에 서서 떨고 있던 모습부터 말꼬리에 잡혀 눈물 보따리를 터트릴 위기까지 갔던 상황, 졸음제조기라는 별명을 붙이고 다닐 수밖에 없었던 어려움을 모두 내려놓을 예정이다.


다정다감하다는 말보다 시크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 이유도 있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강사이다 보니 모든 분들의 말을 수용하기 어렵다. 좋은 말, 싫은 말 모두 듣고 사는 사람이니 언제나 필터 하나 정도는 가슴에 달고 산다.

학생들이 하는 말에 모두 반응하다 보면 이 자리를 지키기 어렵다. 필터는 기준이다. 그 누구의 기준도 아니고 나만의 기준이다. 기준에 부합되는 말이라면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기준에 미달되는 말이라면 거침없이 내던져 버리면 될 일이다. 내 자존감에 스스로 스크래치를 내서도 안 되고 학생들 평가에 스크래치를 당해서도 안 된다. 절대 무너트리지 말아야 할 것이 자존감 이기 때문이다.

그 자존감을 채워가는 방법은 내적성장을 목표로 두면 된다. 부끄럽지 않을 만큼은 공부할 수 있어야 한다.


강의를 잘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좋은 내용을 엄선하는 능력이고, 그 내용을 잘 전하는 전달력이다. 좋은 내용은 공부를 통해 만들어지고 전달력은 직접 경험을 통해 형성된다. 그러니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시간이다.


단기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느리더라도 그 시간을 잘 감내하며 갈 수 있는 마인드가 좋은 강사를 만들어낸다.


늦어서 참 미안했습니다. 내 첫 강의를 들었던 분들, 설 익은 강의를 듣고 답답하고 짜증 났던 분들에게 이제는 죄송하고 미안하다는 사과를 진심으로 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참 고마웠습니다. 트집을 잡아주던 순간, 불만을 쏟아냈던 순간들 덕분에 많이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 시간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이런 모습도 만나지 못했을 테니까요. 그 시간과 만나며 알게 되었던 것들을 이제 마음껏 전해주는 강사가 되어 보겠습니다.


어느 누구도 느림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느림만이 느끼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다.

스스로가 만든 답답함에 나조차 숨통이 막힐 때가 있었고, 아주 작은 공간이라도 뚫어보고 싶어 안달을 부리던 순간은 느림이 가져다준 귀한 시간이었다.

그러니 잘한다고 자만하지도 말고, 느리다고 속상해할 이유도 없다. 나에게 가장 좋은 속도로 오늘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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