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이라 부르지 못한 것들

이별 뒤, 내 안에 남은 잔해의 무게

by 서녘

이별은 생각보다 조용히 찾아왔다.

다툼도, 긴 대화도 없었다.


문장 몇 줄이 전부였다.

문자 속 짧은 인사처럼 건조한 말이 모든 걸 끝내버렸다.


“우리, 여기까지인 것 같아.”


그 말 이후 내 시간은 마치 비가 멈춘 뒤의 골목처럼 고요했지만,

이상할 만큼 지독하게 젖어 있었다.


나는 한동안 스스로를 의심하며 살았다.


내가 부족해서,

내가 별볼일 없어서,

내가 감히 그 사람 옆에 설 수 없어서.


“감히 너랑?”이라는 말이 귀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한 문장이 내 존재를 정의해버린 것 같았다.

그 말 한 줄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까지 바꿔놓은 듯했다.


이별 직후의 나는 엉망이었다.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울었고,

울다가 멈추면 다시 울었다.


잘 지내야지, 괜찮아야지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마트에서 물 한 병을 집어드는 순간에도 눈물이 터졌다.


그 사람과 함께 걸었던 길을 일부러 피해 다녔지만,

결국 돌아 돌아 그 길에 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이제 그만하자”는 말조차 하루에도 몇 번씩 번복했다.


그 시절을 지나며 알았다.

상처는 단순히 ‘그 사람을 잃어서’ 생긴 것이 아니었다.


그 사람이 나를 바라보던 방식이,

내가 나를 바라보던 방식까지 바꿔버렸기 때문이다.


그의 시선은 나를 하찮은 존재로 만들었고,

그 하찮음에 내가 동의해버리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존감이 무너진다는 건 그런 것이었다.


누가 나를 평가한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일. 가장 깊은 상처는 그렇게 생겼다.


하지만 아주 느리게, 정말 아주 느리게 깨달은 것도 있다.


그가 나를 떠난 이유가

곧 ‘나의 결함’은 아니었다는 사실.


그가 감당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나의 밝음이었고,

내가 가진 온기였을지도 모른다는 것.


내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그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것.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조금씩 숨이 트였다.


그 사람의 말과 태도가 나를 정의할 수는 없다는

단순한 사실이 내 삶을 다시 움직이게 했다.


그리고 언젠가,

아주 조용한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나는 그 사람을 그리워하는 게 아니라,

그때의 우리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책을 함께 고르고, 편지를 쓰고,

서로의 세계를 조금씩 엮어가던 시간.


그 시간 속에서 나는 진심이었다.

그래서 충분했다.


사랑을 잃은 것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 무엇인가를 배웠다.


아픔은 지금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이제는 그것이 나를 해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아픔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얼마나 깊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인지 보여주는 증거가 되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더 이상 부끄럽지 않다.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안다.

그때의 나는 실패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이었고,

그 진심이 나를 조금 더 단단한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이제 그 시간은 나를 붙잡아두지 않는다.

다만 내 안의 한 구석에서 조용히 빛나고 있을 뿐이다.


언젠가 내가 어떤 사랑을 다시 시작하더라도,

그 시절의 나는 거기서 그대로, 여전히 웃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