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비켜선 자리에서

말이 사라지고 마음만 남는 순간의 기록

by 서녘

저녁 공기가 조금 차가워지던 날이었다.


평소보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득 휴대폰을 들여다보다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사람을 기다리는 내 모습이

낯설 만큼 편안하다는 걸 깨달았다.


기다림이 초조하지 않고,

시간이 길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어쩌면 이 관계의 결은

처음부터 이렇게 조용했는지도 모른다.


그 사람은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설명도 길게 하지 않고,

감정을 언어로 풀어내는 타입도 아니다.


하지만 내가 내 마음을 말하지 않아도

조용히 곁에 앉아주는 사람.


그게 이 사람의 방식이었다.


그날 역시 그랬다.

멀리서 걸어오는 그 사람의 발걸음을 보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반가움보다 먼저 찾아온 건

익숙한 안도감이었다.


인사를 하고 나란히 걸었지만

둘 다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어색하지 않았다.


아무 말이 없어도 괜찮은 관계

말이 필요 없는 순간이 많아진 관계

그걸 그제야 알게 된 것 같았다


카페에 앉아 마주 보고 있었는데

그 사람은 휴대폰을 잠시 내려놓고

커피컵의 손잡이를 천천히 돌리고 있었다.


나는 그 움직임을 한참 바라보다가

문득 웃음이 났다.


우리 둘 사이의 침묵이

이렇게 부드럽게 흐를 줄은

예전의 나는 몰랐을 것이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마음의 속도가 빨라지고

말도 빨라지는 줄만 알았다.


하지만 이 사람과 있을 때는

말이 줄어들수록

마음이 더 가까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건 그 사람이 특별한 말을 해서가 아니라,

말을 하지 않는 시간에도

나를 놓치지 않는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내가 예민했던 날들에도

불안이 올라오던 밤에도


그 사람은 “괜찮아?”라는 짧은 한마디 대신

손등을 가볍게 건드리거나

침대 끝에 앉아 조용히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그 사람의 말은 늘 짧았지만

행동은 언제나 정확했다.


그런 사람이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이

어느 순간부터

나를 다시 사람들 속으로 돌려보냈다.


예전 같으면

대화를 통해서 확인하고 싶었던 감정들을

이젠 눈빛이나 움직임으로도

충분히 읽을 수 있게 되었고,


나 또한 예전처럼

속도를 앞지르려 하지 않게 되었다.


어쩌면 사랑은

말이 많을 때보다

말이 줄었을 때가 더 선명해지는지도 모른다.


그 사람의 옆에서 조용히 커피를 마시던 그날,

나는 그 사실을 천천히 이해하고 있었다.


말이 없어도 괜찮았던 이유.

말보다 오래 남는 감정들.


그런 것들을 비로소

내 마음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침묵의 부드러움 속에서

나는 아마 처음으로

“아, 이 사람과는 오래 가겠구나”

하는 마음을 느꼈다.


설레서가 아니라,

안아서가 아니라,


그저 같은 자리에서

조용히 함께 앉아 있을 수 있어서.


말이 비켜선 자리에서.


그 침묵이 내 마음을 가장 오래 지켜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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