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내 따돌림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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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소환된 세 사람 중 마지막으로 조사실에 들어왔다. 생경한 경찰서 조사실은 막연한 공포심을 일으킨다. 창문 하나 없는 실내가 낯설고 갑갑하다. 먼저 조사받은 조인영 과장님과 김정아 대리는 은행으로 다시 들어간 것일까. 우리 세 사람은 경찰서에 도착하자마자 각자 다른 대기 장소로 안내됐고 핸드폰까지 제출한 터라 서로 간에 어떤 정보도 나눌 수 없다.
그제 영등포경찰서 형사과로부터 참고인 조사차 출석요구를 받았을 때, 당연히 재무 사고가 터진 줄 알았다. 시중은행 본점 영업부 직원 세 사람이 나란히 경찰의 출석요구를 받을 일은 재무 사고 외에는 없을 터였다. 막내 고우림 씨가 이틀간 무단결근한 것 외에 영업부는 특별한 일 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제 오후 형사의 전화를 받은 건, 기업 대출 관련 미팅을 막 끝내고 금융상품 개발 회의에 참석하려던 참이었다.
“고우림 씨 자살미수 사건과 관련해 조사할 게 있습니다.”
공용 수화기 너머, 형사라고 밝힌 남자의 말은 범죄영화의 대사 같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우림 씨의 빈자리로 고개를 돌렸지만,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자살미수라면 그녀가 자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했다는 뜻이고, 참고인 조사라면 그녀의 자살 시도와 관련해 내게 진술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뜻이었다. 참고인으로 지목된 사람이 나와 조인영 과장님, 김정아 대리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난청 증세가 생긴 듯 형사의 말이 귓바퀴 밖에서 헛돌았다.
“우울증으로 자살 시도한 게 틀림없어. 거기에 물귀신처럼 부서 동료들까지 끌어들인 거고. 혼자 진상이더니 결국 큰일을 내고 말았네.”
조인영 과장님은 당황한 상황에서도 차분하게 사건의 추이를 진단했다. 자신의 촉을 굳게 믿는 그녀의 입술엔 차가운 조소가 스쳤다. 혹 우리 세 사람에게 불리한 일이 생길 수도 있다며 변호사를 법률대리인으로 위촉해 동행하자는 제의까지 했다. 말투엔 비장한 결의가 엿보였다.
그때 어쩌자고 반대했던 걸까. 어차피 우리에게 아무런 죄과가 없는 바에야 일 크게 만들지 말고 있는 그대로 진술만 하자고 주장한 건 나였다. 직장 동료로서 고우림 씨의 일상을 보고 느낀 대로 담담하게 말하면 될 거라 믿었다.
그런데 막상 조사실의 무거운 공기 속에 들어와 보니 내 판단이 지나치게 단순했던 것 같다.
“이미라 씨? 그제 전화했던 김현재 형사입니다.”
문을 열고 성큼 들어선 남자에게서 예리한 감각이 전해져온다. 낯선 환경이 괜한 두려움을 만들어낸다. 그는 형사 배역을 맡은 중견 배우 같고, 나는 영화 촬영장에 처음 나온 신인 배우 같다. 정작 형사와 마주 앉게 되자 피의자라도 된 듯 기분이 묘해진다. 그의 매서운 눈빛에 주눅이 든다. 폐쇄된 공간이 답답하다. 가빠지려는 호흡을 모아 입술 밖으로 살짝 내뱉었다.
“고우림 씨가 그제 새벽 두 시경, 커트 칼로 왼쪽 손목의 동맥을 끊고 극단적 선택을 했습니다. 다행히 같은 집에 사는 사촌 언니가 방을 들여다봐 일찍 발견됐습니다. 요즘 들어 불면증에 시달리는 고우림 씨가 걱정돼 들여다본 게 천운이었죠.”
어디까지나 참고인 진술이니 편안하게 생각하라던 당부와 달리 내용은 끔찍했다. 내 곁에 있던 사람의 자살 사건을 전해주면서 지나치게 덤덤한 그의 말투가 오히려 거슬린다.
“지금 고우림 씨 상태는 어때요? 괜찮은 거죠?”
“119로 이송돼 바로 접합수술 한 덕분에 생명에는 지장이 없답니다. 현재 입원해서 회복 중이고요.”
차분하고 단아한 분위기로 일하던 그녀, 고우림. 일상에서 활력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자살을 시도할 만큼 우울한 사람도 아니었다. 대학 졸업 후 입사 3년 차로 맡은 업무도 그럭저럭 무난하게 해냈다. 다른 직원들과 활발하게 어울리지는 못했어도 외로움이 자발적 선택으로 보일 만큼 자존심도 강했다. 우울보다는 냉소가 어울리는 여자다.
“고우림 씨가 자살 시도 전 남긴 유서입니다. 한번 보시겠어요?”
다행히 유서가 되지는 않았지만 한 인생이 죽음을 가정하고 남긴 글이라니 섬뜩해진다. 일상에서 보아오던 사람이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는 건 공포다. 결과와 상관없이 스스로 생을 끊어내고 싶을 만큼 현실이 가혹했다는 뜻일 테니까. 냉방기를 가동하지 않았는데도 등이 서늘해진다.
얌전히 접어놓은 쪽지를 펼치자 고우림 씨의 성품을 보여주듯 작고 단정한 글씨가 오롯하다.
직장 내 따돌림으로 내내 외로웠습니다. 라이트 오렌지, 오리지널 핑크, 웜 그레이 그녀들 때문에 아팠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면 웜 그레이… 그녀 때문에 더 아팠습니다. 직장은 내 청춘의 결정체이고 꿈의 정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들의 거절을 겪으며 세상 어디에서도 수용될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여기가 아니라면 그 어느 곳도 아닐 테니까요. 부모님께는 정말 죄송합니다.
그녀들이라 했으니 고우림 씨를 제외하면 영업부 여직원은 조인영 과장님과 김정아 대리, 그리고 나 셋뿐이다. 셋 중 한 사람은 그녀를 더 아프게 만든 ‘웜 그레이’가 되는 셈이다. 극단적 선택을 감행한 지인의 유서에 등장하는 기분은 섬뜩하다. 이름 대신 컬러로 표현해놓은 게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 속내는 다분히 앙큼하게 느껴진다.
“고소는 고우림 씨 본인이 아닌 사촌 언니가 했어요. 가해자들의 죄과를 꼭 밝혀 달라 요구하더군요. 이미라 씨, 직장 내에서 고우림 씨를 따돌린 적 있습니까?”
물론 혐의가 발견되면 피의자 신분으로 전환될 거라고 형사는 미리 못을 박았다. 생각해 보니 조인영 과장님의 진단은 정확했다. 자살 시도로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자기를 챙겨 준 사람까지 유력 피의자로 만든 거라면 고우림 씨의 행동은 말 그대로 진상일 테다.
“난 절대 따돌린 적 없습니다.”
단호한 대답에 형사는 반응 없이 오른쪽 입꼬리만 찡긋한다. 조롱 섞인 조소에 진정성을 의심받는 것 같아 속상하다. 이런 곳에서 이런 대접을 받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오 년간 직장생활 하는 내내 난 누구와도 나쁜 관계로 지낸 적 없어요. 내 성격이 원래 그래요. 본점 직원들 아니, 전근 간 직원들까지 다 탐문해 보셔도 같은 답이 나올 거예요. 자신 있어요.”
따돌린 적 없다고만 하면 되는데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은 것 같아 얼굴이 달아오른다. 쓸데없는 말에 의구심만 키운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고우림 씨 자살미수 사건에 피의자가 되는 건 정말이지 억울하다. 매일 아침 출근하면 말없이 앉아있는 그녀에게 다가가 먼저 인사를 건넨 건 나였다. 조인영 과장님이나 김정아 대리는 모닝커피를 사서 돌릴 때도 고우림 씨 것만 제외했지만, 나는 분명히 그녀 것까지 살뜰히 챙겨주었다. 단언컨대, 그녀가 카페모카를 좋아하는 걸 아는 직원은 영업부에서 나뿐이다. 바쁜 출근길에 사 들고 간 모닝커피를 받으면서, 환한 미소 대신 엉거주춤 고개만 숙인 건 오히려 고우림 씨였다.
“그렇다면 유서에 적힌 따뜻한 회색, ‘웜 그레이’는 누구를 가리키는 걸까요? 고우림 씨 본인을 제외하면 조인영 씨, 김정아 씨, 이미라 씨 중 한 사람일 텐데요.”
숫자를 거듭 강조하는 형사의 질문 속에서 나는 이미 피의자가 되어 있다. 하지만 그건 숫자의 덫일 뿐이다. 고우림 씨를 자살까지 몰고 간 ‘웜 그레이’는 결코 내가 될 수 없다. 적어도 나는 그녀를 따돌렸다는 컬러에서 제외되어야 할 사람이다. 가슴 안으로 스멀스멀 배신감이 차오른다.
따돌림 문제라면, 우선 떠오르는 건 조인영 과장님이다. 고우림 씨와는 평소 서로 아침 인사도 생략하는 관계였다. 고우림 씨가 뻔히 보고 있는 걸 알면서도 내 자리에 아이스아메리카노를 갖다 놓으며, 이미라 대리! 오늘도 즐거운 하루, 라고 큰소리로 인사하곤 했다. 두 사람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던 데에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처음부터 조인영 과장님은 고우림 씨가 마땅치 않았고, 고우림 씨도 상사인 조인영 과장님에게 싹싹하게 굴지 않았다. 어느 한쪽이 나쁜 사람이라기보다 서로 맞지 않는 성격 유형이라는 게 정확한 진단일 테다.
그렇다고 조인영 과장님이 고우림 씨를 눈에 띄게 따돌린 적은 없었다. 두 사람은 그냥 형식적인 업무 관계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학창 시절에 빗대자면 ‘프렌드’가 아닌 ‘클래스메이트’ 같았다. 함께 일하지만, 정서 나눔은 전혀 없는 관계였다. 어쩌면 고우림 씨가 느낀 고립감은 우리 세 사람의 강한 유대관계에 반비례한 상대성일 수 있다.
“영업부에서 유일하게 고우림 씨를 챙긴 여직원은 나예요. 업무분장 회의에서도 공평한 인사 처리를 하자고 주장한 건 나뿐이었다고요. ‘웜 그레이’가 누군지 궁금하시면 이렇게 추궁하지 말고, 고우림 씨에게 직접 물어보면 되잖아요. 혹시 고우림 씨가 나라고 지목하던가요?”
“‘웜 그레이’가 이미라 씨라고 단정한 적 없습니다. 아, 물론 고우림 씨에게 누구를 가리키는 거냐고 여러 차례 물어봤지만 입을 열지 않습니다.”
“말하지 않을 거면 왜 유서에 남겼대요?”
초반부터 격해진 참고인의 감정에 당황했는지 형사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탁자 위에 놓인 자판기 커피 믹스를 내 쪽으로 당겨놓으며 마셔보라고 권했다.
“이미라 씨가 방금 말씀하신 업무분장 회의 말인데요, 고우림 씨가 결국 인공지능 기술부 업무를 맡게 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때 세 분은 기술팀 업무를 맡을 수 없는 명분을 만들어 미리 입을 맞춰 놓았다죠?”
압박을 가하는 형사의 눈이 매섭다. 틀린 말은 아니다. 지난 5월, 우리 은행과 주식회사 K엔터프라이즈는 인공지능 기술 협업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인공지능 기술 적용이나 지원은 협약 회사에서 해주지만 영업부에서도 한 사람은 기술부에 배속돼야 했다. 금융정보를 검색하고 편집해 발송하는 일 외에 고객 마케팅, 감정서 심사, 금융상품 등록 등 영역이 방대하다 보니 다들 생소한 미래형 업무에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업무분장 회의가 있기 이틀 전, 조인영 과장님은 저녁 회식을 핑계로 김정아 대리와 나를 따로 불러냈다. 기술부 인공지능 업무가 도입 단계라 만만치 않을 것 같다며 영업부에 남을 명분을 미리 만들어 놓자고 했다.
“김정아 대리는 전공도 전혀 관련이 없는 데다 기존 업무도 다 익히지 못한 상태라고 피력해. 이미라 대리는 기업 대출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일관된 관리가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기업들의 요구는 내가 대변해 줄게.”
조인영 과장님은 극비사항을 누설하는 사람처럼 어깨를 잔뜩 웅크리고 목소리까지 낮췄다. 그때 그녀의 번득이는 눈은 어두운 동굴 안에 갇힌 나를 탈출구로 안내하는 불빛처럼 보였다. 그 따뜻한 인도에 나를 맡길 수 있다는 사실에 지극한 안도감을 느꼈다.
“영업부 남자들은 다들 4050이고… 그렇다면 누가 기술부에 합류하죠? 설마… 고우림?”
김정아 대리가 분장 결과를 미리 추정하며 놀랍다는 듯 두 손으로 자기 입을 틀어막았다.
“우리 각본대로라면 그렇게 되겠지? 어차피 걘 전공도 전산 쪽이잖아. 우리보다 적응이 훨씬 수월할 테니 걱정하지 마.”
조인영 과장님의 대답에 우습다며 풉, 두 손바닥 안으로 입바람을 뿜어내는 김정아 대리의 모습은 연극의 한 장면처럼 과장돼 보였다. 세 사람을 둘러싼 공기가 긴장 대신 안도로 바뀌려는 순간, 괜히 나서서 고우림 씨의 입장을 대변한 건 나였다.
“전공이 전산 쪽이라고 해도 워낙 생소한 업무라 고우림 씨도 힘들 텐데…. 요즘 불면증으로 잠을 못 자는지 컨디션도 별로인 것 같고….”
대상이 고우림 씨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 해도 마찬가지였을 테다. 그 자리에 없는 사람에게 힘든 일 떠맡기자고 밀약하는 건 내 인격이 깎이는 행동 같아 탐탁지 않았다. 순간, 조인영 과장님의 미간이 일그러졌고 얼른 입에서 두 손을 뗀 정아 씨가 과장님의 눈치를 살폈다. 세 사람 사이로 싸한 냉기가 번지려던 찰나, 조인영 과장님은 움츠렸던 어깨를 펴면서 호탕하게 웃었다. 의외의 반전이었다.
“뭐, 고우림에겐 AI를 다루는 기술부가 더 적격일지도 몰라. 걔 행동 보면 인간보다 인공지능에 더 가까운 것 같지 않아? 직원들이랑 의사소통이 전혀 안 되잖아. 차라리 대인 업무보다 기술 업무가 적성에 맞을 수도 있어. 또 우리 중 가장 젊은 데다 막내야. 예전에 우리가 그랬듯 막내니까 궂은일도 해 봐야지. 안 그래?”
‘가장 젊은 데다 막내’라는 말에 이상하게 안심됐다. 종일 정물화처럼 앉아 일만 하는 고우림 씨라면 정말 인공지능 관련 일에 어울릴지도 모른다는 안도감이 스몄다. 따지고 보면, 나는 그날 조인영 과장님이 저녁을 산다고 해서 별생각 없이 동석한 것뿐이다. 의도적으로 고우림 씨에게 부당한 처사를 행하겠다고 계획한 적도 없었다. 물론 내 뜻도 아니었다. 더구나 조인영 과장님은 업무를 나누고 고과를 부여하는 상사인데, 고우림 씨를 위해 상사에게 끝까지 반기를 들며 감쌀 수도 없었다.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맞다. 고우림 씨는 가장 젊은 데다 영업부 막내였다. 그때 기회를 민감하게 포착해 부정적인 기류에 편승한 건 김정아 대리였다.
“고우림 씨 원래 우울한 성격이잖아요. 나한테 인사 한번 밝게 하는 거 못 봤어요. 불만이 많은 건지 아님, 사회성이 부족한 건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니까요. 그러니까 아무도 안 끼워 주지.”
추임새를 넣듯 조인영 과장님이 때맞춰 혀를 찼지만, 나도 더는 감싸줄 명분이 없었다. 고우림 씨가 사내 친교에 소극적인 것도 맞고, 가끔 우울해 보인 것도 사실이니까.
나는 그때 편치 않은 마음에 레스토랑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활짝 핀 5월의 장미 무더기가 눈에 들어왔다. 저녁 화단에 핀 여러 컬러의 장미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골드피쉬, 하젤, 컨츄리퀸, 실루엣, 핑크파티, 야나라가 어우러져 탄성이 나올 만큼 멋진 화단을 조성하고 있었다. 다양한 컬러라서 더 아름다웠다. 세상에 한 컬러로만 존재하는 장미는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하여, 다양하게 어우러진 장미가 정말 예쁘지 않느냐며 화제를 전환했다. 두 사람의 눈이 장미로 쏠렸다. 결국 그렇게 고우림 씨를 향한 부정적인 기류를 제지한 사람은 나였다. 부정적 기류에 편승하는 건 쉬운 일이지만 한껏 달아오른 뒷담화를 냉각시키는 건 대상을 아끼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업무분장 회의가 있던 날 고우림 씨는 조퇴했죠? 결국 기술부 업무를 고우림 씨가 떠맡게 된 걸로 조사됐습니다. 사촌 언니를 통해 들은 증언입니다. 업무분장으로 힘들어하는 고우림 씨를 위해 부서 직원들에게 적극적인 변호는 해 주지 않으셨나 봅니다.”
비아냥대는 형사의 취조성 발언이 비위를 건드린다.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간 인간 취급이다. 결론부터 내려놓고 서서히 근거를 찾아 들어가는 연역법이 이렇게 냉정한 추리법인 줄은 몰랐다. 결국 고우림 씨는 ‘자살미수’라는 형사 사건을 일으켜 나를 범죄의 카테고리 안에 가둬버린 거다.
“누구나 그렇듯 신입 때는 당연히 힘든 일을 맡곤 해요. 형사님은 직장에서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업무분장까지 다 챙기시나요?”
“아뇨. 못합니다. 그래서 이 질문은 이미라 씨뿐 아니라 지금 나에게도 던지는 질문입니다.”
객관적인 조사에 어울리지 않는 대답이 머쓱했는지 형사도 피식 웃는다. 경찰서 조사실이 형사와 참고인이 인간관계 원론을 담화하는 자리는 아닐 테다. 그의 웃음이, 한 걸음 후퇴해 반격 포인트를 노리는 맹수 같아 서늘해진다.
“그날 조퇴한 고우림 씨에게 괜찮냐고 톡 보내준 것도 나예요.”
“알고 있습니다. 고우림 씨 핸드폰도 이미 조사했으니까요. 이미라 씨는 세 사람 중 가장 따뜻한 동료였더라고요.”
따뜻한 동료라니… 반어법적 표현에 섬뜩해진다. 오히려 ‘웜 그레이’에 한 발짝 더 다가선 느낌이다.
“그런데 왜 내가 여기까지 와서….”
“아, 말씀드렸듯이 어디까지나 참고인 진술일 뿐입니다.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세요.”
형사는 다시 두 손을 흔들며 감정 상승을 제지한다. 고우림 씨가 숫자 3도 못 헤아리는 저능아가 아니라면 나는 분명 가해자인 셈이다. 커피믹스가 든 종이컵을 들어 올리다가 손이 떨려 얼른 다시 내려놓았다. 정말 강한 자에겐 아무 말도 못 하면서, 따뜻하게 챙겨 준 나에게 오히려 화살을 겨누었단 생각에 분노가 치민다.
업무분장 회의가 있던 날 밤, 전체 회식을 마치고 귀가하니 피곤이 몰려왔다. 샤워하고 침대에 누우면서 그대로 꿀잠 속으로 빠져들고 싶었다. 혼곤해지려는 순간, 문득 병 조퇴를 내고 일찍 귀가한 고우림 씨가 떠올랐다. 침대에서 억지로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안부 톡을 보냈다.
―우림 씨, 좀 쉬었어요? 몸은 괜찮아요?
부담스러운 업무를 떠맡은 막내까지 챙기는 배려가 스스로 생각해도 기특했다. 오지랖 떨다가 도리어 사람에게 상처받을지도 모르겠다며 혼자 피식 웃었다. 밤 열 시도 안 됐는데 일찍 잠이 든 건지 내내 답이 없다가 아침에 일어나보니 톡이 와 있었다. 발송 시간을 보니 새벽 두 시 즈음이었다.
―몸이 아팠던 건 아니에요. 속상해서 은행에 있을 수가 없었어요.
어린애 투정 같았다. 기껏 생각해서 보낸 안부의 답치고는 성마른 문장이었다. 안부 톡 보내줘서 고맙다거나 하는, 사회인의 의례적인 예의가 빠져있었다. 뜬금없는 장미 얘기까지 급조하며 조인영 과장님이나 김정아 대리의 비난을 무마했던 행동이 오지랖이었단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일주일 전 출근길에 모닝커피를 사서 돌렸을 때도 그랬다. 일찍 출근해서 직원들의 자리에 커피를 미리 놓아두고 사내 메신저를 통해 아침 인사를 건넸다.
―와! 미라 대리님 고마워요.
―앗! 내가 좋아하는 카라멜마끼야또,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이미라 대리, 당신은 사랑입니다․♡
발랄한 답 메시지들 속에서 고우림 씨가 보낸 답은 받는 사람도 우울하게 만들었다.
―나까지 챙겨 주네요… 고마워요….
말줄임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한데다 감사인지 자조인지 묘연했지만, 그때도 역시 성격 탓이려니 했다. 그녀에게 카페모카를 건네기 위해 조인영 과장님의 못마땅한 눈총도 기꺼이 감내했다. 이제 와 생각하면 카톡이든 사내 메시지든 고우림 씨 자신의 힘든 감정을 호소한 것일 수도 있겠다 싶지만, 그녀에게 직장 동료로서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웜 그레이’ 컬러 말인데요. 따뜻한 회색이잖아요. 이 컬러의 특징이 뭘까요?”
형사가 상체를 바짝 앞으로 당기며 묻는다. 뭔가 캐내려는 눈동자가 부담스럽다. 당신은 이미 한 사람을 자살로 몰고 간 사람이야, 정죄의 메시지를 뿜어내고 있다.
“글쎄요. 우린 셋 다 어두운 사람 아니에요. 오히려 고우림 씨가 영업부에서 유일하게 어두운 성격이죠.”
“그레이가 명도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행동 방식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를테면….”
“….”
“그러니까, 뚜렷한 자기 컬러 없이 이쪽이나 저쪽 뭐든 좋다는 행동? 혹은 시시비비가 없는 행동? 양다리 방식의 행동?”
“여기가 심리상담실 같네요.”
‘양다리 방식’이라는 말에 적개심이 올라왔다. 참고인 조사에 형사의 심리 해석까지 필요할 줄은 몰랐다. 점점 피곤해진다.
‘웜 그레이’… 흰색도 검은색도 아닌 중간지대의 색. 분명 절반의 검은색을 내포하고 있으면서 때론 하얀색에 가까운 것처럼 구는 엉큼한 컬러. 게다가 어울리지 않게 따뜻함까지 겸비한 컬러라니.
정확히 내 기분이 상한 건, 만약 고우림 씨가 죽었다면 유서가 되었을 쪽지에서 ‘웜 그레이’라는 단어를 본 뒤부터다. 분명하고 적나라한 ‘라이트 오렌지’, 유아처럼 단순한 ‘오리지널 핑크’에 나를 대입해봐도 일치하지 않는다는 직관이 뇌리를 스쳤다.
“사안 조사를 위해서라면 심리적 해석도 동원해야죠. 고우림 씨가 죽었다면 심리부검이 가장 중요한 조사내용이 됐을 겁니다.”
“모호한 해석으로 선의의 피해자가 생길 수도 있잖아요.”
“이미라 씨, 사건은 정직합니다. 증거 없이는 단죄하지 않습니다. 또 고의로 한 사람을 자살로 이끄는 사람도 없고요.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사람을 절망하게 만드는 실수는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실수라고요?”
실수라면 오히려 고우림 씨가 가장 많이 저질렀던 것 같다. 작고 사소한 것들이지만 매번 부서 분위기를 가라앉힌 건 그녀였으니까.
한 달 전쯤 고우림 씨가 국책은행에서 받아 보관해 둔 돈을 기업에 잘못 발송한 일이 발생했다. 무려 백만 원의 착오가 생겼다. 수령액 중에 백만 원이 빈다는 기업 측의 전화를 받으며 조인영 과장님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 다들 제때 퇴근도 못 하고 확인을 거듭한 끝에 고우림 씨의 실수로 밝혀졌다. 하필 인공지능 기술 업무협약 체결로 지점별 감원이 있을 거란 소문이 돌기 시작한 때였다. 인공지능시스템 도입 반대 시위를 준비 중이던 직원들의 열의도 고우림 씨의 실수로 무색해지고 말았다. 새 시스템이 도입되면 발송 실수 따위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관리 소홀의 책임을 지게 된 조인영 과장님은 고우림 씨를 불러놓고 A급 시중은행 본점의 대외 이미지를 운운하며 크게 나무랐다.
“우리 중 누군가 당장 감원되는 꼴을 보고 싶어?”
“….”
“인공지능시스템이 도입되면 당장 지점당 한두 명을 잘라내야 해. 고과를 못 받는 사람이 감원 대상이 될 텐데, 고우림 씨가 이런 실수를 하면 고과를 부여하는 내 입장이 더 힘들어져. 본인이 감원 대상이 돼도 괜찮겠어?”
“….”
고개를 푹 꺾고 꾸지람을 듣고 있는 그녀를 의식해 다들 자기 일에 열중한 척했다. 이래저래 백 퍼센트 무결점 처리가 가능하다는 인공지능의 필요성만 증명된 사건이었다.
사실, 그 정도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다. 나도 입사 직후 송금 실수를 한 적이 있었다. 기업 대출 통계 때문에 정신이 팔려있었다며 거듭 죄송하단 말로 사과했다. 앞으로는 실수 없도록 하겠다고 싹싹하게 굴었더니 은행 일에는 한두 번의 실수가 필수라며 오히려 다독여 주었다. 그때 시원시원하고 뒤끝 없는 과장님이 정말 고마웠다.
고우림 씨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렇다고 미안한 얼굴도 아니었고, 적극적으로 해명하려 들지도 않았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채근당하다가 딱 한마디만 대꾸했다.
“송금 업무만 삼 년째인데… 저만 계속 이 일을 해야 하나요?”
“뭐? 그럼 내가 부당하게 고우림 씨에게만 힘든 업무를 맡겼다는 건가? 그런 뜻이야? 우리 중에 쉬운 업무 하는 사람이 있어?”
조인영 과장님의 힐난에 고우림 씨는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게 얼마간 정적이 흐르는가 싶었는데 황당한 대꾸가 이어졌다.
“인공지능시스템 때문에 본점에서 누군가 감원이 돼야 한다면 제가 1순위가 되겠네요.”
입사 삼 년 차 직원의 말치고는 무모한데다 안쓰러울 만큼 자조적이었다. 지방에서 올라와 어렵게 대학을 마치고 재수 끝에 입사한 사람이 쉽게 내뱉을 말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그녀의 처세 방식이었다. 제삼자가 끼어들어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었다. 천성적으로 처세에 둔감한 성격 같아 보였다. 물론 자주 일어나는 실수도 아니어서 그녀의 사회적 행동 방식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는 않았다. 다만 요즈음 신입들이 대개 그렇듯 업무분장에 과하게 반응하는 부분이 있으려니 여겼다. 대부분 일 년 정도 맡는 업무를 삼 년째 하고 있다고 해서 그 일만 어려운 업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수라고 변호해 주지 않은 건 미안하지만 나도 조인영 과장님에겐 부하 직원일 뿐이다. 화가 나 있는 조인영 과장님에게 반감을 표했다가 도리어 화살이 나에게로 옮겨올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매사 직설적으로 말하고 감정도 쉽게 풀리는 뒤끝 없는 과장님이라 그러려니 했다. 솔직한 성격 유형의 사람이 대부분 그렇듯 조인영 과장님은 호불호가 분명한 편이다. 자기 사람이라고 여겨지면 최선을 다한다. 물론 경계 밖의 사람들에겐 소외감을 줄 수 있지만, 경계 안의 사람들에겐 더없이 고마운 사람이다. 경계 안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녀의 보호 속에 살 수 있다. 퇴근 후 사적인 모임을 주도하는 것도, 매번 밥값이며 술값을 흔쾌히 계산하는 것도 과장님이다. 과장님 덕분에 맛있는 저녁 먹고 수다 떨면서 직장생활의 스트레스를 풀어왔다. 그녀의 당찬 주도성을 인정하고 따르기만 하면 누구든 품어주는 사람이다. 최소한 그녀의 신경을 거스르지만 않는다면 어떻게 보면 쉬운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형사님 말씀은 나도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고우림 씨에게 상처를 줬다는 뜻인가요?”
“직접적으로 상처를 주진 않았어도 저 사람 역시 내 편은 아니라는 절망감은 줄 수 있지 않을까요?”
그의 말에 뼈가 있다. 직접적으로 따돌리지는 않았다 해도 수수방관한 게 당신 아니냐는 투다. 한 사람의 외로움을 덜어 주기 위해 기존 관계를 다 던지고 그녀만의 친구가 돼 줘야 했다는 비난으로 들린다. 어이가 없다. 자신도 할 수 없는 일을 왜 참고인에게 강요하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김정아 대리처럼 단순하게 인간관계를 정의하는 게 덜 억울할 것 같다.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확실하게 한쪽 편이 되어준다면 고민도 없을 테니까. 조인영 과장님이 고우림을 못마땅해할 때마다 김정아 대리는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과장님, 걘 나한테도 그래요. 아침에 걔랑 얼굴 마주치고 나면 종일 심란해요. 에너지를 빼앗아가는 얼굴이랄까요? 무표정에 일만 하는 기계 같아요. 벌써 우리 본점에 AI가 들어온 느낌이라니까요.”
더 강화된 말로 동조함으로써 비난을 시작한 사람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배역 말이다. 김정아 대리가 옆에 있어서 조인영 과장님은 매번 나쁜 인간에서 제외될 수 있었다. 미운 사람만 빼놓고 커피를 사다 주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와 친한 사람들에게만 커피를 돌리는 사람으로 희석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김정아 대리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게 잘해 주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람이니까. 상대방이 특정인과 관계가 나쁘다 해도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좋은 사람인 거다. 예외란 없다. 김정아 대리는 자기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 충실하게 공감해줬을 뿐이다. 조인영 과장님 입장에서 보면 김정아 대리는 지극히 단순하고 지극히 좋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형사님, 한 사람의 외로움을 덜어주기 위해 기존의 친분을 무시해야 하나요? 그게 쉬운 일일까요?”
“외로운 사람의 친구가 될 순 없어도 상처 주는 가해자를 제지할 수는 있지 않을까요? 고우림 씨도 외로운 사람이던데….”
외로운 사람이란 핑계로 형사는 이미 내게 선고를 내리고 있다. 조인영 과장님이나 김정아 대리를 말리지 못한 건 너야, 라는 선언과 다를 바 없다. 고우림 씨의 현재 사생활이라면, 사촌 언니가 작은 집을 매수하면서 방 한 칸을 그녀에게 월세 놓았다는 정도만 알고 있다. 지방의 가난한 부모님과 떨어져 사는 외동딸 처지가 이 상황에서 왜 언급돼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이미라 씨, 그럼 이렇게 해 보면 어떨까요? ‘라이트 오렌지’와 ‘오리지널 핑크’를 먼저 세 분에게 대입해보고 남은 한 사람이 ‘웜 그레이’가 되는 겁니다.”
라이트 오렌지! 강렬한 레드와 위험할 만큼 선명한 옐로우가 결합해 만들어진 컬러. 자신만만하고 오만한 컬러다. 다른 모든 컬러를 단숨에 압도하는 존재감은 우리 세 사람 중 누가 봐도 조인영 과장님이 적격이다. 그녀는 영업부의 상징이고 카리스마로 사원들을 아우르는 관리자다.
오리지널 핑크! 단순해서 영원히 철들지 않을 것 같은 컬러. 매사 1차원적으로 생각하는 김정아 대리라고 해도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진 못할 것이다.
지난 6월, 본점에서는 사원들의 대인 업무 능력 향상을 위해 상담심리학 교수를 강사로 초빙해 연수 시간을 가졌다. ‘색채로 알아보는 인간 심리’가 주제였다. 강사는 우리에게 자기 자신의 퍼스널 컬러는 무엇인지 고민해보라고 했다. 곰곰이 생각해도 내 정체성에 부합하는 컬러가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맞은편에 앉은 고우림 씨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빙긋이 입술로만 웃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묘한 웃음이라 의아했지만 나도 빙긋이 웃어주었다. 혹시 그때 고우림 씨는 내 얼굴을 보며 어떤 컬러를 떠올린 걸까.
“‘웜 그레이’는 과연 누굴까요?”
그렇다면 이제 남은 한 사람… 내가 된다. 순간 움찔해서 형사의 눈을 마주 보는데 그의 눈동자가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다. 피하듯 시선을 옮겨 종이컵 속 커피믹스를 내려다봤다. 식어버린 커피 위로 허연 프리마가 둥둥 떠다닌다. 마시지 못하게 된 커피 때문인 것처럼 눈살을 찌푸렸다.
“글쎄요, 형사님. 짐작이 안 돼요. 사람이란 어떤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양한 컬러가 될 수 있을 테니까요.”
*
결국 고우림 씨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 발을 들여놓고 말았다. 문안은커녕 그녀의 얼굴을 다시 대하고 싶지 않았는데 여기까지 왔다. 상관하지 않아도 될 일에 끼어드는 오지랖이 항상 문제다.
어제 새벽 세 시경 문득 잠이 깼는데 상념 속에 끼어든 고우림 씨가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어둠 속 대지를 향해 쏟아지는 빗소리가 창을 두드렸고 방안은 눅눅한 습기로 젖어있었다. 습기 속에 녹아들지 못한 회색 덩어리들이 방안을 둥둥 떠다녔다.
내내 뒤척이다가 결국 다섯 시쯤 침대에서 일어났다. 미명 속에서 그간 고우림 씨와 나눈 톡창을 열었다. 그녀의 프로필 공간은 온통 하얀색으로 채워져 있었다. 형태 없는 짙은 화이트가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해 섬뜩했다. 복잡한 의식을 깨끗하게 지우고 싶단 뜻인지, 무망의 세계로 도피하고 싶단 뜻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상태 메시지 글귀는 ‘비 내리는 숲’. 언뜻 그녀의 이름 뜻이란 짐작에 잠깐 울적해졌다. 비 내리는 숲속에 갇힌 하얀 새 이미지가 떠나질 않았다.
자살미수 사건 전, 서로 톡을 나눌 때만 해도 그녀의 프로필 사진은 푸른색 사람 모양의 기본 형태로만 남아 있었다. 스물여섯 살의 아가씨가 프로필에 얼굴 사진 하나 올려놓지 않은 건 특이했지만, 단순히 그녀의 성격 특성이라 여겼다.
―웜 그레이… 그녀 때문에 더 아팠습니다.
유서의 한 문장이 가시로 박혀서 내내 불편했단 걸 깨닫고는 병원으로 가서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다. 결정하고 나자 이상하게 조급해졌다. 참고인 진술이 끝난 뒤에도 내가 그녀에게 죽음을 결심하게 한 사람일까 봐 두려웠다. 정말 나 때문에, 그간 더 마음이 아팠던 게 맞느냐고 확인하고 싶었다. 피의자보다 용의자가 더 음흉스럽듯 밝혀진 사실보다 밝혀지지 않은 진실이 내겐 더 끔찍했다.
참고인 출석 조사는 아무런 소득 없이 끝났다. 심리상담소처럼 해석이 필요한 사안이라면 처음부터 피의자를 가려낼 수 없는 사건이었다. 누구나 납득 가능한 물적 증거와 증언이 없는 바에야 해프닝에 불과했다. 경찰은 고우림 씨의 유서 내용대로 동료들의 집단 따돌림인지 아니면 그녀 자신의 피해의식인지 밝히고 싶어 했지만 끝내 고우림 씨가 입을 다물었고 무혐의 사건으로 종결됐다.
하지만 나는 모호한 심증을 안고 자주 악몽을 꿨다. 무표정의 인공지능으로 가득 채워진 본점 안에 인간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가위눌려 식은땀을 흘리며 일어나면 새벽도 오지 않은 시간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고우림 씨를 만나보자, 만나지 말자, 양자택일의 갈등 속에서 지냈다. 그녀를 향한 연민이 출렁이다가도 어느 순간 쓰라린 배신감이 심장을 강타하면 마음이 닫혔다. 그러면서 고우림 씨도 자신의 독립적인 성향과 따돌림의 경계에서 정체성을 고민했을 거란 생각이 섞여들면 괴로웠다.
병원 복도는 온통 하얀색이다. 고우림 씨의 프로필 사진을 닮은 컬러 같다. 깨끗하고 순결하지만 다른 어떤 색채도 담아낼 수 없는 컬러. 다른 색이 조금이라도 끼어들면 이내 더러워지고 마는 속성… 병원은 그녀가 유일하게 안심하고 깃들 수 있는 영역 같다.
―고○림.
그녀가 누워 있는 1인실 출입문 앞에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며칠 전, 고우림 씨는 집과 가까운 다른 지점으로 전근 처리됐다. 조인영 과장님도 자원 형식으로 전근됐다. 경기 지역으로 발령 났으니 당분간 서울로 돌아오긴 어려울 테다. 본점에서 두 사람의 전근 처리로 일을 매듭지은 건 사내에서 표면적으로 둘의 갈등이 가장 커 보였기 때문이다.
“네, 들어오세요.”
노크 끝에 상상했던 것보다 또렷한 대답이 들려왔다. 조심스레 문을 열자 고우림 씨는 홀로 침대에 누워 있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곁에 앉아도 돼요?”
다가가 보호자용 의자에 앉았다. 예쁘다고만 여겼는데 그녀의 민낯은 생각보다 더 여리여리하다. 화장으로 가려져 있던 진짜 얼굴을 대하니 그간 외로웠을 그녀의 심정이 전해져 오는 것 같다.
“손목은… 괜찮아요?”
고개 끄덕임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고우림 씨. 긴 침묵 끝에 물었다.
“정말 미안한데… 알고 싶어서 왔어요. ‘웜 그레이’가 누구예요?”
묵묵부답인 그녀. 입술을 꼭 다물고만 있다. ‘대답 없음’은 ‘혐의없음’만큼이나 모호하다.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보고 있는 내 눈은 대답을 채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죽어서도 말하지 않으려 했던 걸 살아서 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답 톡이 그랬던 것처럼 성마른 대답이다. 침묵만이 그녀의 분노를 대신하는 것 같다. 답을 들어야 하는데, 대화를 계속 이어갈 실마리가 떠오르지 않는다. 어색한 침묵만 병실 공간을 떠다니고 있다. 고우림 씨를 더는 괴롭히지 말아야겠단 생각이 든다. 역시 오지 말았어야 했다. 하얀색 안으로 섞여들려고 한 건 무모한 행동이었다.
“그럼… 갈게요. 실례가 됐다면 미안해요. 어서 회복되길 바라요.”
고우림 씨의 시선을 피하며 일어섰다. 우연이 아니라면 앞으로 우리 둘 사이에 자의로 만날 일은 없을 테다. 병실 출입문 손잡이를 잡는데 그녀의 말이 뒤통수에 와서 꽂힌다.
“영업부가 차라리 인공지능으로만 꽉 채워진 곳이라면 좋겠어요. 그럼 적어도 소외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
“‘웜 그레이’는 이쪽과 저쪽의 균형을 완벽하게 유지하죠. 어느 쪽에도 힘을 몰지 않고 철저히 분산하니까요. 누구에게나 착한 컬러지만, 그 실체를 알 수 없어요. 본인 마음 편한 게 가장 중요한 컬러죠.”
한 마디 한 마디 또박또박 뱉는 말에 고개를 돌려 고우림 씨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동자에 불꽃 같은 응어리가 일렁이는 것 같다. 고우림 씨가 다시 입을 열었다.
“‘웜 그레이’는 다가가면 거리를 유지하고, 멀어지면 일정 거리만큼 다가와요. 심지어 따뜻하기까지 해서 내 진심이 우롱당하는 기분이 들죠. 내가 심리 안정을 위한 제물일까 아님, 진심이 통하는 대상일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요. 자기 색깔이 분명한 사람들은 고민할 필요가 없었고요. 난… 한 사람에게라도 진실하게 받아들여지고 싶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