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진정한 의미와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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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 분 뒤면 라이프치히 공항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이어폰 밖으로 들려온다. 게르만식 억양과 발음이 뒤섞인 독일항공사의 영어 안내는, 지금 내가 날고 있는 곳이 독일 땅임을 새삼 상기시켜준다.
여고 시절 제2외국어인 독일어 수업에서 필요 이상으로 혀를 굴려 발음했던 기억에 살짝 웃음이 난다. 미남인 독일어 선생님 눈에 띄려고 하이네 시에 멘델스존이 곡을 붙인 <노래의 날개 위에>를 유창하게 외워 즐겨 부르던 나는 얼마나 맹목적으로 설레었던가. 평안과 사랑을 노래한 시구詩句도 서정적인 멜로디도 인생을 알지 못하는 열일곱의 소녀에겐 그저 아름답기만 했었다. 미션스쿨인 여고 교정 꼭대기, 하얀 십자가가 서 있는 언덕에는 현기증이 날 만큼 풍성한 봄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찬란한 햇빛을 받고 서서 독문과 진학을 진지하게 고민할 때는 친구들이 알지 못하는 아름다운 비밀을 품은 듯했다. 독일어 선생님도, 하이네도, 멘델스존도, 독일에 대한 환상도 가슴에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벅찼다. 그때, 미래는 막연하고 달콤한 미감으로 다가왔었다. 언제나 쓸쓸한 현실 뒤에서 미래는 달콤한 옷을 입고 인생에게 손짓하는 것처럼….
삼십 년이 흐른 지금, 마흔일곱이 된 소녀의 미래는 사실성이 명징한 현재가 되었다. 문득 꿈같이 지나온 시간이 아득하기만 하다. 어제인 듯 혹은 아주 먼 기억인 듯. 이제 하이네의 시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텅 빈 멜로디만 희미하게 귓가에 맴돌 뿐.
다만 독일어 교과서 내용 중 오직 한 문장만이 이상하게 또렷이 각인되어 있다. 'Sie kocht Kaffee und bringt Zucker -지 코트 카페 운트 브링트 주커 (그녀는 커피를 끓이고 설탕을 가져온다)' 교과서 본문을 공부하면서 읽었던 내용이 확실하다. 문장 아래에는 칼Karl이란 이름을 가진 남자가 식탁에 앉아있고 로즈마리Rosmarie란 이름을 가진 여자가 커피를 끓이는 삽화도 수록돼 있었다. 왜 하필 교과서의 수많은 문장 가운데 특별한 의미도 형식적 아름다움도 없는 일상적인 문장 하나만 또렷하게 기억하게 된 걸까. 어쩌면 삶이란, 굳이 기억하지 않아도 될 일상의 파편들이 모여 만들어진 전혀 새로운 형태, 게슈탈트Gestalt일지도 모르겠다.
창밖으로 펼쳐진 창공은 유리처럼 차갑게 느껴지지만, 비행기 아래로 떠 있는 부드러운 구름을 보자 지친 심신이 조금 위로받는 느낌이다. 대지로부터 피어올라 대기에 순응하여 움직여가다 바람에 흩어지는 구름이 인생도 바로 그런 거라고 나직이 말해주는 듯하다. 사람도 저렇게 피어올라 잠깐 운명에 순응하여 움직여가다
흙으로 흩어지는 것일까. 그리고 영혼은 얼음처럼 차가운 창공을 넘어 우주 밖 어딘가 있을, 신이 마련한 안식처로 돌아가는 것일까. 오십 년 가까이 아주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왔던 것들을 지금 자꾸 확인하고 싶어진다.
언제나 하늘 위를 날 때면 비행기에서 내려다보이는 인생이 아주 작아 보이곤 했다. 모든 아픔도, 불행도, 그것을 숙명적으로 안고 있는 인생마저도 영원한 우주 시간 속에서 잠깐 지나가는 찰나로 느껴지곤 했다. 인간이 가늠할 수 없는 한계 너머의 우주 시간 속에서 인생이 살다 가는 시간이란 어떤 의미가 있는 건지 쉽게 와 닿지 않았다. 인생을 향해 <인간의 천 년이 나에겐 하루 같다>고 말했던 신의 관점도 그런 생각의 궁극이었을까. 하이네도 멘델스존도 사라지고, 그들이 찬양하던 사랑과 평안의 의미도 사라지고, 오직 그녀가 커피를 끓이고 설탕을 가져오는 무미건조한 일상만 남아있는 세계란, 우주의 시간 속에서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천 년이 하루 같고 인생의 모든 족적이 무의미하다는 신의 메시지를 확인해야만 안심할 수 있을 것처럼 구름을 유심히 바라본다. 그런가 하면 곧 흩어져버릴 구름에 애써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나는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눈앞의 저 구름도 혹시 오래도록 내 기억에 남을지도 모르겠다. 하여, 어느 날 문득 아버지를 추억하는 날이면 'Sie kocht Kaffee und bringt Zucker'처럼 뇌리에 연상으로 떠올라 주면 좋겠다.
지금 아버지는 소멸할 구름처럼 하루하루 조금씩 흩어지고 있다. 한눈 없는 어머니의 슬픈 자궁으로부터 피어올라 팔십 년을 버거운 운명에 순응하여 움직여오다 곧 흙으로 흩어질 것이다. 암과 투병 중인 아니, 더 정확히 말해 매일매일 암에 먹혀가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늘 가슴을 누르는 묵직한 통증이 일었다. 아버지를 특별히 가슴 저리도록 사랑한다고 생각한 적 없었는데, 한번 상실의 감정에 매몰될 때면 예리한 아픔이 심장을 헤집고 지나갔다.
그럴 때면, <인간의 천 년이 나에겐 하루 같다>고 말했던 신의 관점으로 아버지의 삶을 바라봐야만 아주 잠깐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든 아픔과 불행도, 그것을 태생적으로 내포한 인생도 영원한 우주 시간 속에서 잠깐 지나가는 찰나로 여겨질 때만 혈관을 타고 빠르게 퍼지는 진정제처럼 일시적인 평안이 나를 감싸주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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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중한 기체機體가 독일 땅에 착륙하자 이어폰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바흐의 <마태수난곡>은 절정을 향해 흐르고 있다. 십자가를 지기까지 기나긴 고난의 여정을 노래한 아리아와 합창을 지나,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 평안한 안식을 기도하는 마지막 합창이 귀를 가득 채운다. 세상의 모든 잡음을 벗겨버린 순수한 합창은 귀를 넘어, 온몸의 세포들을 깨운 뒤, 아주 깊은 곳에 숨어있는 영혼까지 울려온다. 완전한 화음과 순결한 선율로 정제된 노래. 어쩌면 세 시간 전부터 기나긴 오라토리오를 들어온 이유가 이 마지막 합창을 듣기 위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라토리오 속의 수많은 아리아와 합창 중 내가 가장 사랑하는 부분이다. 마지막 곡만을 떼어내서 들으면 아름답긴 하지만, 감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고난의 여정이 없는 최후는 불가능하기 때문일까. 칠십칠 곡 전곡을 다 듣고 난 후 마지막으로 듣는 칠십팔 곡 대 합창은 고난의 절정에서 인생의 결말을 예감하는 어떤 지점을 느끼게 했다. 그 지점이라면 지나온 고난의 의미도 조금은 알 듯했다. 일부러 비행기 착륙 세 시간 전에 맞춰 핸드폰에 저장된 오라토리오를 듣기 시작한 건, 바흐의 음악으로 영혼을 가득 채운 채 독일 땅 라이프치히에 내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바흐를 만나기 위해 이 먼 곳까지 온 거니까.
일평생 독일을 떠나보지 않았던 바흐는 생의 후반기 이십칠 년을 이곳 라이프치히에서 살았다. 성聖토마스 교회에서 칸토르kantor로 봉직하며 합창단을 지휘하고, 오르간을 연주하며, 예배에 봉헌할 곡을 작곡하고, 아이들을 양육하는 아버지로 살았다. 평일엔 작곡하고, 토요일엔 예배 연주를 위해 오르간을 연습하고, 주일엔 전심으로 신 앞에서 예배했던 바흐. 동시대 작곡가 헨델이 영국으로 떠나 황제의 사랑을 받으며 승승장구하고 있을 때, 비발디가 사제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오페라의 성공을 위해 오스트리아 빈으로 향하고 있을 때도 바흐는 이곳 라이프치히 안에서 토마스 교회와 아홉 명의 자녀들이 기다리는 소박한 집을 오가며 삼십 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다. 화려한 날도 놀랄만한 영광도 없이, 음악가들의 낭만으로 치부되는 여자와의 흔한 로맨스도 한번 없이, 심혈을 쏟아낸 곡을 보존하여 후대에 남기겠다는 욕심조차 없이 자신의 음악적 직분에 최선을 다하며 살았다. 교회와 집을 오가며 쉴 새 없이 작곡하고 연주하고 연습하고 가르치고 예배하면서 많은 자식을 길러낸 그는 음악가이기 전에 성실하고 소박한 아버지요, 남편이요, 소명을 가진 봉직자였다.
바흐의 음악을 들으면 그의 성정과 삶이 선율에 그대로 체현되어 있는 듯했다. 엄격한 화성과 장엄한 질서, 소박하고 맑은 울림, 따뜻한 인간미는 물론 흐트러짐 없는 그의 일상도 담겨있었다. 조화로운 화음을 듣기만 해도 바흐임을 가슴으로 느꼈던 건, 일관되게 삶을 관통하는 그의 신앙이 음 속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그의 음악을 사랑하게 되면서부터 언젠가 토마스 교회에서 그의 숨결을 직접 느껴보고 싶었다. 경건한 소리의 기도 속으로 스며들고 싶었다.
한 달 전, 아버지의 생명이 석 달 혹은 진행이 빠르면 두 달밖에 남지 않았다는 의사의 말을 들은 후, 바흐를 향한 소망은 이상하게 더욱 간절해졌다. 낭만을 추구한 적도 없고 감정의 과잉소비에 영혼을 맡긴 적도 없이 내면에서 울려오는 음을 따라 묵묵히 걸어갔던 사람, 그 남자를 만나고 싶었다. 고독한듯하나 쓸쓸하지 않고, 무거운듯하나 침잠되지 않고, 엄정한듯하나 차갑지 않은 음악의 실체인 그 남자의 자취를 나의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끼고 싶었다. 아버지가 언제 위독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지독하게 독일로 오고 싶었던 마음에 스스로도 당황스러웠다. 혹여 여행 중에 아버지가 위독해지거나 소천 소식을 듣게 될까 봐 두려우면서도 차분히 비행기 표를 예매하고 호텔을 예약하고 짐을 꾸리는 내게 자문하곤 했다.
‘아버진 여기 계시는데 넌 도대체 거기서 무엇을 찾고 싶은 거니?’
딱 하루, 바흐를 만나고 다시 열 시간 넘는 비행을 하며 돌아와야 할 비상식적인 여행이었다. 대책 없이 약국 문도 닫은 채, 생의 끝자락에 서 계신 아버지를 두고 이곳 유럽까지 떠나온 걸 알면 고모들은 아마 조카딸이 미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항상 내 입장이 되어 모든 걸 이해해주는 남편조차 조심스레 만류했다. 여행 짐을 꾸리다 서랍 속에 얌전히 넣어둔 아버지의 흰 셔츠를 발견하고 한참 생각에 잠겼다. 오는 주일, 부활절에 아버지에게 입혀 드리려고 사서 다려놓은 새 셔츠였다. 매년 부활절이면 순백의 와이셔츠를 입고 예배하기 위해 손수 다림질하여 준비해두던 아버지셨다. 이번 부활절에는 요양병원에 누워계신 아버지를 위해 선물로 드리고 싶었다. 교회에서 부활절 예배를 드리지는 못하지만 흰 셔츠를 입혀드리고 병실에서 함께 기도하고 싶었다. 아버지에겐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마지막 부활절….
아버지는 지난해 연말 위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주무실 때 가끔 찌릿한 감각이 있었을 뿐인데 암은 이미 손쓸 수 없을 만큼 아버지의 장기들을 점령한 상태였다. 엑스선은 위장 내 출혈을 가감 없이 보여주었다. 작년 봄 내시경 검사에서도 결과가 괜찮았고 어떤 음식도 매번 맛있게 드셨기에 위암이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파킨슨병을 앓게 된 후로는 자신을 지켜나가기 위해 열심히 운동도 하셨다. 새벽기도를 다녀오시면, 간단히 아침 식사를 마치고 정확히 아홉 시에 집을 나섰다. 집 앞에 있는 전철역을 일부러 지나쳐 다음 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탑골공원으로 가셔서는, 근처를 산책하다 다시 지하철을 타고 홀로 거처하는 원룸으로 되돌아오시곤 했다. 수요일에는 정오 노인 무료급식 시간에 맞춰 영락교회까지 걸어가서 반드시 돈을 지불하고 점심 식사를 드시고는, 돌아오는 길에 시장에 들러 필요한 식재료와 과일을 사셨다. 주일엔 4km 떨어진 교회까지 걸어가서 예배를 드리셨다.
“걷고 있으면 잡념이 없어져서 좋아. 가끔 눈물이 날 때도 있지만…”
아련한 눈으로 불특정 어딘가에 시선을 둔 채 스치듯 말한 적이 있다. 그렇게 걷고 또 걸었기에 파킨슨병을 앓던 다리는 건강해졌지만, 그렇게 울고 또 울었기에 속은 피를 흘리며 무너진 게 아니었을까. 탑골공원 근처 산책로에서, 사람들로 들끓는 시장 한켠에서 내면으로 우는 아버지의 삽화를 떠올리면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 삽화는 심장을 훑고 지나가는 통증과 함께 나의 귀에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들려주곤 했다.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들으면 항상 예외 없이 쓸쓸한 남자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그 남자는 때론 바흐인 듯도 하고 아버지인 듯도 하고 때론 걸러낸 슬픔인 듯도 하고 내 마음의 자화상인 듯도 했다. 아버지의 삽화를 떠올리며 눈과 심장과 귀가 한꺼번에 슬픔을 지각하면, 나는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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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젊어서도 강박적일 만큼 시간에 철저했다. 친구를 만나는 일도 거의 없었다. 사십 년 가까이 구로공단의 작은 회사에서 만년 계장으로 일하면서 잡무를 처리하느라 퇴근이 늦은 편이었지만 언제나 시간이 정확했다. 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늦게 귀가한 날은 평생에 딱 하루, 할머니 장례가 끝나고 며칠 뒤 그날뿐이었다.
“불쌍한 우리 어머니…”
그날 아버지는 끝없이 할머니만 부르다 잠들었다. 그리고 단 한 번 술을 마셨던 그 주간의 주일 아침, 어느 때보다 일찍 일어난 아버지는 마치 큰 의식을 치르듯 깨끗한 양복에 흰 셔츠를 꺼내 입으며 밀랍 같은 얼굴로 오전 예배에 참석했다.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성도들이 한 소리로 찬송가를 부르고 있을 때 아버지는 갑자기 울먹이기 시작했다. 조용히 흐르던 눈물은 흐느낌이 되고 급기야 목멘 소리로 신의 이름을 불렀다.
“하나님 아버지, 이 죄인을 용서해주세요. 용서해주세요.”
옆에 앉아 예배드리던 나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성도들이 하나둘 쳐다보는데 아버지는 남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꺼이꺼이 울었다. 할머니를 보낸 슬픔 때문이었는지 평생 입에 대지 않던 술을 마셨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다. 다만 무뚝뚝하고 진중하기만 해서 어린 내게도 어려웠던 아버지가 어린아이처럼 우는 걸 보면서, 어쩌면 아버지도 굉장히 연약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영화에선 항상 비명 섞인 흐느낌의 장면이 인물의 강한 슬픔을 표현하고는 전혀 다른 다음 장면으로 바로 전환되곤 한다. 인물이 겪어내야 할 기나긴 슬픔의 시간은 축약되고 생략되기 일쑤다. 그럴 때 나는 화면에 나타나지 않은 인물의 기나긴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습관적으로 붙들려 있곤 했다. 비명 섞인 흐느낌의 장면과 전혀 다른 다음 장면 사이에 숨겨진 시간을 그는 어떻게 견뎠을까 싶어 줄곧 몰입되어 있곤 했다. 클래식 책에는 으레 이렇게 서술돼 있었다.
<궁정 악사 요한 암브로지우스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요한 세바스찬 바흐Johann Sebastian Bach는 9세에 어머니를, 10세에 아버지를 잃었다. 바흐는 큰형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에게 얹혀 살면서 가난과 외로움을 견뎌야 했다.>
나의 마음은 앞 문장과 뒤 문장 사이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부모를 한꺼번에 잃은 팔 남매의 막내가 느꼈을 비애는 어떤 것이었을까, 표현하지 못한 상실감을 어디에 숨겨두고 살았을까, 생략된 그의 시간을 궁구하느라 다음 페이지로 쉽게 넘어가지 못했다. 바흐의 상실감을 이해하는 건 오로지 나의 몫으로 남겨져 있었다. 삼백 년도 넘은 과거의 시간, 지구 반대편 독일에서 일어난 바흐의 슬픔이 왜 그렇게 나를 백과사전적인 문장 언저리에서 서성이게 했을까.
“수진아, 아버지한테 잘 혀. 느그 아버지 불쌍한 사람이여. 이 할미 때문에 평생 기도 한 번 못 폈고 가슴엔 풀지 못한 불이 꽉 들어있어.”
가끔 아들을 보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할머니는 손녀에게 당부할 때마다 한 눈에서 눈물을 흘렸다. 대대로 농사꾼으로 살아온 집안에서 아버지는 한 눈 없는 할머니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입에 풀칠도 못 할 만큼 가난한 할아버지가 옆 마을 부농에서 논 서 마지기와 함께 데려온 한 눈 없는 처녀, 그녀가 바로 아버지의 엄마였다. 어릴 때 남동생과 놀다 쇠꼬챙이에 찔려 외눈박이가 된 그녀는 시집온 순간부터 가부장적인 남편 앞에서 늘 주눅 들었고 열등감과 죄책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내 덕분에 절체절명의 굶주림을 모면했건만 학대하듯 함부로 대하는 남편에게 그녀는 한마디 변명도 없이 모멸이 원래 자신의 것인 양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런 그녀의 자궁에 처음으로 깃든 생명, 자신이 살아있는 여자임을 증명해주는 존재, 그녀가 줄 수 있는 모든 사랑을 쏟았던 첫아기가 나의 아버지였다.
“느그 아버지를 뱄을 적에 내가 첨으로 사람 구실 허나 싶었다. 세상 앞에 그렇게 떳떳할 수가 없었어.”
그녀를 사람으로 세워준 소중한 아기는 지금 팔순의 노구로 누워 그의 어머니가 떠나간 길을 따라가려 한다. 시골 민초였기에 사람은 원래 그렇게 사는 것이라고 믿으며 한 번도 할아버지를 거역하지 않고 할머니를 가슴으로 품으며 살았던 아버지였다.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스무 살이 되자 도시로 나와 살면서도 외눈박이 어머니를 한 번도 가슴에서 내려놓지 못했다. 할머니는 돌아가셨지만, 그녀가 품었던 한을 함께 떠나보내지 못해 아버지는 아파하며 딱 하루 신의 얼굴을 피해 술을 마셨던 건지도 모른다.
신형 건물인 라이프치히 공항을 빠져나오자마자 심호흡을 해본다. 이 땅의 향기는 어떤 것일까. 세 시간 내내 <마태수난곡>을 들으며 왔기 때문일까. 흐린 봄 풍경 속에 형언할 수 없는 비장미가 이곳 라이프치히의 첫인상으로 다가온다. 인천공항에서 미리 독일시간으로 맞춰 둔 손목시계는 오후 여섯 시를 가리키고 있다. 삼월 하순인데도 곧 밤이 찾아올 듯 어둑어둑하고 서늘한 냉기가 몸을 파고든다. 홀로 찾아온 도시의 어둠 앞에서 갑자기 다가오는 진한 외로움.
죽음을 눈앞에 둔 아버지의 마음도 이런 것일까. 평생 신을 믿고 의지해왔지만 죽음은 누구에게나 낯선 여정일 테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가 있어도 결국은 혼자 감당해야 하는 인생의 마지막 과정, 죽음. 인생의 모든 과정은 자신이 닿아보아야만 온전히 느낄 수 있을 테다. 삼십 년 뒤엔 나도 아버지처럼 죽음 바로 앞에 서 있을 수도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지만, 여전히 아버지의 고통을 내 것으로 완전히 느낄 순 없다는 사실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병든 아버지는 일상의 순간에 불쑥불쑥 찾아오곤 했다. 아파트 화단에 피어난 목련꽃만 보아도, 약국 유리문 밖으로 지나가는 노인만 보아도, 유난히 좋은 봄 햇살만 보아도, 아버지는 연상의 이름으로 떠올려지고, 몰두의 이름으로 생각나고, 집착의 이름으로 나를 붙들리게 했다.
“아버지, 내일 또 올게요. 마음을 편히 가지고 좋은 생각만 하세요. 많이 힘들면 기도하시구요. 편찮으셔도 아름다운 이 봄을 느끼셔야 해요.”
‘신이 아버지에게 주신 마지막 선물이니까요’라는 말은 차마 덧붙이지 못했다. 병실을 나오며 누워계신 아버지를 돌아볼 때면, 언제나 거기 마지막 고통을 홀로 감당하고 있는 무거운 생애가 놓여있었다. 아무도 대신 할 수 없고 아무도 위로할 수 없고 아무도 덜어줄 수 없는 고통으로 웅크린 팔십 년이 거기에 있었다. 아! 아버지….
차분하고 조용하게 밤을 맞이하는 유럽의 분위기는, 자연의 섭리를 따라 집에 웅크린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나약한 한 인간이 다음 날 비바람 치는 세상에서 힘차게 전진할 수 있으려면 퇴행의 시간이 꼭 필요하리라. 예약해둔 호텔로 데려다줄 택시가 다가온다. 내일은 바흐가 아홉 명의 아이들과 함께 저녁이면 웅크려 퇴행의 시간을 보냈던 그의 집터를 꼭 찾아보리라. 나도 슬픈 운명의 아버지가 버거워 스스로 퇴행하여 찾아온 이곳에서 바흐를 만나고 나면, 현실의 아버지에게로 다시 힘 있게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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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에서 십여 분 정도 걸려 걸어오는 내내 모든 건물이 옅은 안개로 인해 흐릿하게 투영됐다. 중부 독일의 봄 안개가 이국적인 정취를 느끼게 한다. 분명 바람 없이 비를 머금은 안개일 뿐인데 서늘한 기운이 얇은 바람막이 점퍼 안으로 스며든다. 아직 활짝 피지 못한 거리의 꽃들조차 숨죽여 웅크리고 있는 듯하다. 길 건너 흐릿하게 보이는 성자聖子, 바흐일 것이 분명한 동상이 이제 토마스 교회에 가까이 왔음을 말해준다.
다가갈수록 점점 선명해지는 이미지. 소박한 성당의 분위기를 풍기며 서 있는 토마스 교회의 옆 모습이 정갈하다. 규모가 크진 않지만, 화강암 건물이 단단한 무게감으로 서 있고 회색의 지붕도 단정하다. 호텔 조식을 먹은 후 바로 출발해서인지 관광객들로 들끓는 곳인데도 다행히 이른 아침은 한산하다. 교회 문이 열리는 아홉 시까지는 사람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바흐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한 발 한 발 동상 앞으로 다가가는데, 바흐가 오직 나를 맞이하기 위해 새벽부터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마음이 설렌다. 아픈 아버지를 두고 이틀이 걸려 이역만리 먼 곳까지 찾아와 준 동양의 딸을 위로하기 위해 그가 차가운 공기 속에 오래도록 서 있었던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높이 솟은 격자창을 배경으로 흑색 청동으로 서 있는 바흐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자니, 그가 그대로 내려와 교회로 들어가서는 오르간을 연주할 것만 같다.
“안녕…하세요.”
새벽기도처럼 낮은 소리로 입술을 조금 열어 인사했다.
‘왜 그토록 간절하게 당신이 보고 싶었을까요.’
바흐의 무뚝뚝하고 진중한 얼굴에 슬픈 아버지의 얼굴이 겹쳐진다. 아버지…. 칸토르 복장으로 오른손에 악보를 말아 쥔 그의 얼굴엔 어떤 감정의 표현도 보이지 않는다. 셈여림이나 알레그로나 아다지오가 없는 그의 악보처럼 그의 인생에도 넘치는 기쁨이나 신산한 아픔이 없었다는 듯이….
바흐는 열 살 때 고아가 된 것만으로 고난의 잔이 채워지지 않았던 것일까. 서른여섯 살, 네 명의 아이들을 남겨두고 첫 아내 마리아 바르바Maria Barbara Bach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쾨텐 궁정악장으로 연주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장례마저 마친 뒤였다고 했다. 십삼 년 어려운 시절을 함께 했던 생의 동반자를 임종도 하지 못한 채 떠나보내야 했던 절망감의 깊이는 어느 정도였을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슬픔을 정제하여 묵묵히 음을 만들어내는 것밖엔 없었다.
열 살에 부모를 잃고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운명의 한계를 이미 몸으로 받아들였을 그는 분명 겸손하게 살았을 것이다. 아주 작은 것에도 감사했을 것이다. 신 앞에 한 치의 죄도 짓지 않기 위해 강박적으로 애쓰며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조차 모두 신의 것이라고 고백했을 것이다. 자신의 능력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기 위해 그는 작품 끝마다 Soli Deo Gloria (오직 주께 영광)를 적어 넣곤 했다. 슬픔의 무게조차 신 앞에 죄가 될까 봐 넘치는 슬픔의 감정을 걸러내고 정제한 음을 그는 조용히 풀어내지 않았던가. 그의 음악엔 격한 감정을 토해낸 흔적이 없었다. 서늘하지만 맑고, 투명하지만 따뜻했다. 큰 슬픔을 만나 자신의 온몸을 적신 후 그것에서 몇 걸음 떨어져 객관성을 확보한 자만이 창조할 수 있는 소리가 바흐의 음악이란 걸 언제부턴가 깨닫고 있었다.
절망에 빠져있던 그가 두 번째 아내 안나 막달레나를 만난 건 그의 삶을 덮고 있는 신의 은총이었다. 쾨텐 궁정악단의 소프라노 가수였던 그녀가 바흐와 남겨진 아이들을 위로한 건 연민 때문이었다. 열여섯 살 연하의 처녀로 자신에게 과분한 그녀를 바흐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감사함으로 지켜나갔다. 그녀는 첫 아내의 아이들과 자신이 낳은 아이들을 정성껏 양육하면서 남편이 음악 활동에 집중할 수 있도록 조용히 내조했다. 바흐의 곡들을 필사해서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한 것도 그녀였다. 그녀는 결혼 후 삼십 년간 따뜻한 시선으로 남편을 지켜주면서 넉넉지 못한 살림을 알뜰하게 꾸렸다. 그녀 곁에서 바흐는 주옥같은 작품들을 쏟아냈고 이곳 토마스 교회로 초빙되었다. 바흐가 그녀를 위해 작곡한 <미뉴에트>를 들었을 때, 그에게 내재했던 어린아이 같은 평화를 읽을 수 있었다.
정면에서 바라본 교회는 생각보다 더 소박하고 정갈하다. 작은 나무 문의 출입구와 간소한 회색 난간이, 천재 작곡가들이 연주했던 오스트리아 빈의 화려한 고딕식 성당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고난주간의 성聖 금요일을 맞이하는 교회는 더욱 차분하고 조용하다. 루터파 프로테스탄트였던 바흐의 검약한 모습을 보는 듯하다. 소박하기에 오히려 범접할 수 없는 경건함이 가슴으로 스민다.
교회 안으로 들어서니 줄지어 선 하얀 색의 기둥들이 긴 회랑을 만들고 있다. 기둥 아래로는 예배석이 겸손하게 놓여있고 건물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들 속에서 가느다란 가지들이 천정으로 뻗어 올라 이 기둥에서 저 기둥으로 서로 연결되어 아치를 이루고 있다. 흰 기둥과 붉은색 가지들이 선명한 색조의 대비를 만들며 소박하지만 누추하지 않도록 교회를 밝혀준다. 입구에 서서 천국으로 상징되는 천정을 올려다본다. 이 땅에서 고난의 무게를 견디면 영혼이 부활하여 하늘에 닿을 수 있음을 말해주는 듯하다. 바흐가 연주했던 오르간 음이 천정의 붉은 가지들을 타고 천상의 소리가 되어 신 앞으로 올라갔을까. 설교단의 오른쪽으로 오르간이 있고 오르간 뒤쪽으로 거대한 파이프들이 엄숙하게 줄지어 서 있다. 오르간이 나를 내려다보며 생명을 가진 성자처럼 숨 쉬는 듯하다. 눈을 감은 나의 귀로 <평균율 클라비어 1번>의 깨끗한 오르간 음이 들려온다. 바흐 내면의 아픔을 통과하여 응축된 음들이 신앙고백처럼 맑게 이곳에 울려 퍼졌으리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기념하는 고난주간의 성聖 금요일인 오늘, 신 앞에 겸손하게 엎드린 사람들 위로 더욱 정결한 천상의 소리가 흘러가리라.
아버지가 첫 아내를 잃었을 때는 서른네 살이었다. 가진 것 없이 서울로 올라와 고생하며 사는 중에 아내가 폐결핵이란 걸 알았을 때는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단계였다. 처음부터 병약했던 아내는 십 년이 다 되도록 자식도 낳지 못했다. 꾸준히 약을 먹고 치료를 받았지만 투병하던 아내는 끝내 숨을 거두었다. 그래서일까. 아버지는 늘 조심스러워했다. 좋은 일이 있어도 넘치게 즐거운 감정을 나타내지 않았고 슬퍼도 애써 그것을 삼키려 했다. 넘치게 즐거워하는 감정은 신 앞에 교만으로 여겨질까봐, 넘치게 슬퍼하는 모습은 신을 신뢰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보여질까봐 그랬을 것이다. 매일 아침이면 일어나 은총으로 그의 가솔들을 덮어주실 것을 제일 먼저 신에게 빌고 또 빌었다. 그렇게 한결같은 아침을 맞으며 사십육 년을 살아왔다. 처녀로 시집와 함께 해준 두 번째 아내와 그녀와의 사이에 태어난 딸 하나를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건사해왔다. 아내와 딸을 지키는 일이 그의 생애 가장 큰 소명이었다. 만년 계장으로 연근도 마다하지 않으며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박봉에 늘 고단한 환경이었지만 착하게 자란 늦둥이 외동딸이 약학대학 졸업 후 약사로 야무지게 사는 것이 그의 기쁨이자 자랑이었다. 딸이 약국을 개업하고 이제 그의 소명을 다한 듯하여 심신이 편안해질 무렵, 두 번째 아내마저 갑작스레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너희 엄마가 어떻게 나 같은 사람에게 왔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 된다.”
아버지와 같은 교회를 다녔던 엄마는 믿음이 깊고 따뜻한 여자였다. 그녀는 목사님의 딸로 사랑받으며 자랐지만, 열아홉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목회하는 아버지와 어린 동생들을 돌보느라 혼기를 넘긴 처녀였다. 아버지가 첫 아내를 사별하고 망연자실하여 있던 즈음, 그녀의 순수한 연민은 엄청난 용기를 내게 했다. 예배의 풍금 반주자로 봉사하던 그녀와 아버지가 큰 어려움 없이 결혼할 수 있었던 건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를 여읜 뒤 느꼈던 상실감과 아버지가 아내를 잃은 뒤 느낀 상실감이 하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교회에서 혼인예배를 드리던 날, 유월의 하늘은 구멍이라도 난 듯 퍼붓는 비로 앞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해 장마의 시작이었다. 혼인을 축하하기 위해 모여든 친지들과 성도들은 모두, 홀아비에게 시집가는 딸을 향한 돌아가신 신부 어머니의 눈물이라며 속상해했다. 터무니없는 곳에 시집보내는 아버지 목사님의 눈물이라고도 했다.
그녀는 자신보다 학력도 살아온 배경도 부족한 남편을 따뜻하게 내조했다. 어려운 살림에도 항상 정성어린 밥상을 준비했다. 정시에 퇴근하는 남편을 위해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더운밥과 국을 지어냈다. 새벽이면 조개를 넣어 뽀얀 무국을 끓여내고, 저녁이면 시원한 배추를 넣어 맑은 된장국을 갖가지 찬과 함께 상에 올렸다. 마치 상심한 그의 마음을 돌보기 위해 세상에 보내진 천사처럼 그렇게 그녀는 그에게 왔다. 그리고 늦둥이 외동딸도 낳아주었다. 아버지에게 선물로 주어진 꿈같은 삼십 년의 세월….
그의 겸손의 분량이 부족했던 것일까. 더 낮게 더 낮게 신 앞에 웅크려 엎드려야 했던 것일까. 그녀를 보내준 신 앞에서 일상의 작은 불평과 무심코 내뱉은 한 마디 불만도 죄가 됐던 것일까. 안일하게도 감정을 정제하지 못하고 흘려버린 것일까. 불꽃 같은 눈동자로 자신을 지켜보는 신의 존재를 순간순간 놓쳤던 것일까. 주일, 교회에서 나란히 앉아 오전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온 후 그녀는 뇌출혈로 거짓말처럼 한순간에 그의 곁을 떠났다.
그녀의 허망한 죽음 앞에 그는 짐승같이 울고 또 울었다. 흘릴 수 있는 모든 눈물을 다 흘려버리고 다시는 울지 않을 것처럼 울었다. 바로 그녀, 나의 엄마와 살았던 삼십 년의 세월이 꿈엔 듯 아련하여 아버지는 오랜 세월 자주 눈물을 흘리곤 했다. 엄마를 땅에 묻고 한 달여 뒤 묘소를 다시 찾았을 때, 아버지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허허로운 공동묘지의 언덕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죄인이다. 내가 더 잘 살았어야 했다.”
*
예배당의 정면을 바라보자 깊숙한 안쪽으로 설교단이 아닌 제단이 있다. 예배석보다 훨씬 좁아진 아치 때문에 제단은 더욱 신비스럽다. 그곳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내밀한 세계, 치유와 회복의 영적 비밀이 감추어져 있을 것만 같다. 혼인예배에 입장하는 신부처럼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앞으로 걸음을 옮겨보니 제단에는… 제단에는… 바흐의 무덤이 있다.
JOHANN SEBASTIAN BACH.
검은색 청동에는 바흐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아래로 그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이곳은 하늘로부터 오는 신의 소리를 듣고, 오선지 두루마리에 새겨, 세상을 향해 선포한 선지자의 신령한 거처였던가. 제단 아래 음악가 바흐의 유해는 신령한 기운으로 존재할 것만 같다.
교회를 둘러 펼쳐진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 한가운데 십자가 위의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평안한 모습이 아니다. 고통스러운 표정에 아름답지 않은 얼굴, 못 박힌 팔과 다리, 허허로운 눈빛, 겨우 아랫도리만 가려진 채 앙상한 갈비뼈를 드러낸 몸체가 새겨져 있다. 마치… 아버지를 보는 것 같다.
요양병원에 누워계신 아버지는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영양주사에 의지해 호흡하고 있다. 지난 주말 문안 갔을 땐 주무시고 계셨는데 입원복 바지가 벗겨져 있고 기저귀마저 풀어져 있었다. 여러 겹으로 둘러싼 기저귀가 답답했는지 자면서 자신도 모르게 풀어놓은 듯했다. 침상에 소변이 흐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둘러놓은 안쪽 기저귀만이 아버지의 치부를 가려주고 있었다. 인간의 가장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남편이 새것으로 갈아 드렸다. 아버지의 앙상한 어깨를 잡아 앉혀드리고, 누워만 있느라 딱딱해진 등을 만져드리니 아기처럼 순하게 가만히 있었다. 남편이 아버지의 손을 잡고 기도해주자 눈을 감고 ‘아멘’도 합송하셨다. 순한 흙에서 온 존재가 다시 순한 흙으로 돌아가기 위한 퇴행 같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딸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이 텅 비어있다는 걸 깨달았다. 뇌 속 어느 한 지점에서 기억의 회로가 이어졌다 끊어지기를 반복하는 듯했다. 팔십 년 세월 고난에 맞서다 닳아버린 기억 회로가 아무렇게나 연결해주는 인생 어느 지점에든 불가항력으로 닿았다가 불현듯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듯도 했다. 꿈꾸는 시선을 거둔 후에 어느 순간 현실로 돌아온 듯 아버지는 우리 부부를 걱정했다.
“둘 다 바쁘고 피곤할 텐데 어서 가서 쉬어야지. 그래야 내일 또 일하지.”
그리곤 이내 아무것도 모르는 무념의 눈빛. 아버지의 눈에 내가 세상 단 하나의 혈육으로 보이는지 그냥 무심한 객체로 보일 뿐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나는 그동안 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을 수없이 봐오면서 한 번도 처절하고 수치스럽다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마냥 숭고하고 아름답다고만 여기며 낭만성이 가미된 눈으로 바라보았을까.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힌 고난주간의 금요일인 오늘, 그리스도의 죽음은 명징한 사실성으로 다가온다. 처절한 그리스도의 모습 위에 자꾸 겹쳐지는 아버지의 모습. 한 겹 기저귀만 두르고 생의 온갖 고통이 할퀴고 지나간 너덜너덜한 아버지의 모습에도 숭고함이나 아름다움은 없었다. 처절하고 수치스러울 뿐이었다. 아버지를 점점 소멸시켜 가는 건 암세포가 아니라 멈출 줄 모르고 가해지던 생의 고난이 아닐까.
아내를 떠나보내고 난 뒤, 한사코 빈 둥지에서 홀로 사셨던 아버지는 여든이 가까워지면서 우리 내외가 모시려 했지만, 여전히 홀로 지내길 원하셨다. 바쁜 우리 내외에게 짐이 될 뿐이라 하셨다. 오히려 살고 있던 작은 아파트마저 처분하여 선교헌금으로 드리고 약간의 현금이 든 통장만 들고 원룸에서 사셨다. 작은 침대와 간이 옷장 그리고 소형 TV가 세간의 전부인 좁은 공간이었지만 아버지는 충분하다고 하셨다. 남편과 내가 돌아가며 매일 들러보긴 했지만, 눈앞에 놓인 우리의 일상을 살기에 바빴다. 아버지가 완강히 혼자 살겠다고 하셨지만, 끝까지 함께 살자고 맹목적으로 조르지 않은 건 암묵적이지만 아버지 뜻에 동의한 셈이었다. 말로만 듣던 독거노인이 내 아버지라는 사실이 너무 생경했다. 일상에서 불쑥불쑥 올라오는 죄책감으로 마음이 불편했다. 아버지의 외로움보다는 독거노인으로 사는 아버지를 그냥 보고 있다는 죄책감 때문에 불편했는지도 모른다. 무뚝뚝하고 진중한 아버지를 모시기는 쉽지 않다고, 요즘은 다들 그렇게 산다고, 자유로운 삶이 오히려 편안하실 거라고 자위했지만 진정한 위안은 되지 못했다.
예수 그리스도 옆으로 바흐의 얼굴이 있다. 그의 얼굴이 성경 속 사도들처럼 그려져 있다. 살면서 여러 명의 자녀까지 잃었고, 노년에 시력의 약화로 눈 수술을 받은 후 끝내 실명해버린 바흐는, 어쩌면 사도들보다 더 큰 고난의 잔을 마신 사람인지도 모른다. 바흐의 얼굴 건너엔 마르틴 루터와 멘델스존의 얼굴도 있다. 루터는 사제가 아닌 한낱 촌부도 십자가를 의지하여 신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고 세상에 선포한 사람이다. 진지한 표정과 굳게 다문 입술이 그의 선포가 진실이었음을 증명하는 것만 같다. 멘델스존은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발굴하고 연주하여 세상에 다시 알린 사람이다. 십자가 앞에 씻어 맑게 건져 올린 음의 창조자 바흐를 멘델스존은 깊이 존경하지 않았던가. 세 사람은 각각 다른 시대를 살았지만, 이곳에서 신을 찬양했고 자신의 소명대로 최상의 것을 드렸다.
나의 시선은 시대를 뛰어넘어 세 사람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소명의 세계를 천착했던 세 남자는 분야가 달랐지만, 묘하게 하나 되는 신비가 그들 얼굴 속에 보인다. 아주 다르고 아주 닮은 세 사람. 바흐는 루터가 독일어로 번역한 성경 속 마태복음 이십육 장과 이십칠 장을 <마태수난곡>으로 창조했고 1729년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념하는 성聖 금요일, 내가 서 있는 바로 이곳 토마스 교회 예배당에서 초연했다. 그리곤 곧 사람들에게서 잊혔지만 1829년 게반트하우스 지휘자였던 멘델스존에 의해 재연되었다. 숨겨졌던 바흐의 삶과 음악을 세상에 꺼내준 멘델스존으로 인해 백 년 만에 바흐는 다시 살아났다. 그의 음악은 낭만주의 시대 사람들에게 새로운 감동을 주었다. 바흐는 한 번도 스스로 유명해지려는 욕망을 품지 않았지만, 멘델스존을 통해 지금도 여전히 살아있는 사람이 되었다. 고난 앞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고 살았기 때문일까. 겸손하게 엎드려 신을 경외했던 대가일까. 바흐가 생전에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을 신은 지금도 그를 위해 이루어가고 있다.
*
이제 나를 아버지에게로 데려다줄 밤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다. 서둘러 바흐를 만나고 사흘 만에 다시 라이프치히 공항 대합실에 앉은 셈이다. 몸은 말할 수 없이 피곤하지만, 이상하게 머리와 마음은 맑다.
공항의 높다란 창밖으론 어둠을 틈타 오후 내내 흩어졌던 구름이 봄비가 되어 내리고 있다. 맑은 공기 향이 코끝을 스치는 걸 보면, 봄의 나른하고 건조한 공기를 비가 촉촉하게 적셔주는 듯하다. 지금 내리는 비는 비행기에서 보았던 구름이 흩어져 부활한 것일까. 많은 양은 아니지만 비는 꽤 오래 내릴 것 같다. 이곳 라이프치히로 올 때처럼 돌아가는 비행기 창밖으로도 무수한 구름이 피었다가 흩어질 것이다. 그러나 흩어진 그 구름도 언젠가 비가 되어 대지를 적시고 마침내 새로운 봄꽃들을 피워줄 것이다. 구름은 흩어져서 오히려 생명을 낳게 될 것이다.
그래서일까. 별빛처럼 빛나 보였던 바흐가 생활고에 힘들어하던 아버지였고, 아내를 잃은 남편이었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음악을 생산해야 했던 직장인이었음을, 나의 눈으로 확인하고 돌아가는 공항의 밤이 조금은 따뜻하다. 바흐가 이 땅에 두 발 딛고 살았던 일상의 사람이란 사실이 위로를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람들에게 그리고 신에게조차 영원히 기억되고 있다는 사실이 소망을 준다. 그의 성실한 일상이 영원으로 부활하여 여기 내 귀에 흐르고 있지 않은가. Sie kocht Kaffee und bringt Zucker가 뇌리에 각인된 것처럼.
지금도 이어폰을 통해 여전히 마태수난곡이 흐른다. 창밖의 어둠과 봄비를 배경으로 마태복음 이십육 장의 광경이 희미하게 그려진다. 이별을 앞두고 떡과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나눠주며 축사하는 예수 그리스도. 그가 왔던 우주로 돌아가기 전, 죽음이라는 가장 큰 고난에 순응하여 그것을 묵묵히 짊어지려는 그의 얼굴. 고난은, 인간을 향한 사랑 때문에 기꺼이 인간의 세계로 들어온 그의 숙명이었다.
고난은 세상의 모든 인생과 조우한다. 고난은 모든 인간의 숙명이지만 고난의 열매는 많은 사람이 누릴 수 있을 테다. 그리스도는 고난을 통과해 영원한 생명을 주었고 바흐는 고난을 통과해 천상의 음을 주었으니까. 그리고… 아버지는 고난을 지나면서 나에게 다함 없는 소망을 주고 있다. <마태수난곡>은 바흐가 모든 인생에게 바치는 노래일지도 모른다. 기나긴 오라토리오의 호흡이 끝날 무렵, 마지막 합창은 그리스도를 노래할 뿐 아니라 바흐를 노래하고 아버지를 노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난을 숙명처럼 감싸 안은 모든 인생과, 낯선 고난 앞에서 묵묵히 인내한 그들의 걸음과 그 빛나는 열매를….
“1977년 9월 5일 지구를 출발한 무인우주선 보이저voyager 1호는 현재 목성과 토성, 그리고 천왕성과 해왕성을 거쳐서 태양계를 벗어난 어느 별과 별 사이에 있대. 인류가 만든 우주선 가운데 가장 먼 곳에 도달한 거지. 보이저 1호는 인류의 가장 아름다운 창조물인 음악이 담긴 황금 레코드를 싣고 있는데, 스물일곱 곡 중 세 곡이 바흐의 것이래.”
남편은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을 함께 들으며 꿈을 꾸듯 얘기한 적이 있다.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와 파르티타, 평균율 클라비어 곡, 서정적인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2번을 싣고 지금도 보이저 1호는 영원의 공간을 향해 묵묵히 나아가고 있다고 한다. 바흐의 삶이자 신앙고백인 음악이 불멸의 우주에서 신을 찬양하는 광경을 눈을 감고 그려본다. 순간을 영원으로 나아가게 한 그의 삶, 그의 신앙, 그의 음악…
광대한 우주, 인간의 천 년이 하루 같은 신의 눈이 지배하는 곳. 그곳에서 바라본 바흐의 육십오 년 인생은 순간일 뿐일 테다. 그러나 독일이라는 공간을 벗어나지 못하고 육십오 년 찰나를 살았던 그의 삶은 자신의 음악을 통해 영원히 열린 공간과 시간으로 확장되고 또 확장되고 있다. 인간의 하루가 신의 눈에 천 년 같이 여겨지는 세상 속으로 끝없이, 끝없이….
보이저 1호에 실려 먼 우주로 간 바흐의 음악처럼 아버지의 일생도 우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당신의 삶이 불멸의 음악이 되어 영원한 우주로 떠날 것이다. 한 눈 없는 그의 어머니처럼, 폐결핵으로 눈을 감은 그의 첫 아내처럼, 그리고 삶도 죽음도 꿈만 같았던 그의 천사표 아내처럼. 이 땅에서의 이해할 수 없는 고난에도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던 신의 사랑이 아버지가 우주로 떠나는 순간, 얼굴과 얼굴을 대하듯 확연하게 드러날 것이다. 젊어서는 집과 공장을 오가며 기계를 닦고, 늙어서는 집과 교회와 공원과 시장을 오가며 외로움을 달래던, 보잘것없는 아버지의 하루하루를 신은 천 년의 시간으로 바라봐줄 것이다. 아버지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주며, 가난하고 비루했던 생애를 천 년 역사의 무게로 인정해 줄 것이다. 아버지의 삶을 아름다운 불멸의 음악으로 들어줄 것이다. 남편의 말이 여전히 귓가에 맴돈다.
“보이저 1호에 음악을 선별해서 담은 천문학자 칼 세이건Carl Sagan이 말했대. ‘우주의 바다에 이 병甁을 띄워 보내는 것은 지구라는 행성에게 주는 마지막 희망이다.’라고.”
나는 돌아가서 부활절인 내일, 우주로 떠나기 위해 세상의 소리로부터 희미해지는 아버지의 귀에 대고 말할 것이다. 지구에 남은 딸이 아버지를 기억하는 한, 인간을 향한 신의 사랑이 그치지 않는 한, 아버지의 소박한 삶은 영원한 소망으로 살아 있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