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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은신 Oct 07. 2023

소설 <인디고블루>

순결한 삶의 컬러

  크리스챤 디올의 사진을 삭제했다. 스케치북 도안을 든 그의 멋진 프로필을 애장 사진 폴더에서 쫓아버렸다. 예술적 영감을 자유롭게 불러내 디자인하는 그를 사랑했는데, 언젠가부터 지독한 질투심에 시달렸다. 버티컬 라인, 오벌 라인, 시뉴에스 라인, 튤립 라인, H라인, Y라인… 새 시즌을 준비하는 내내 그가 창조한 디자인들이 뇌리를 둥둥 떠다녔다. 한 번만이라도 하늘의 수혜자가 되어 그가 누린 영감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면 심장이라도 내어주고 싶다. 머릿속이 캄캄한 동굴 같다.

  일곱 명이 고개를 박고 F/W 시즌 컬렉션에 몰두해 있는 디자인실은 조용하기 그지없다. 이따금 길게 내뱉는 한숨 소리가 들릴 뿐이다. 화려한 퍼플 컬러의 A라인 컬렉션은 거의 완성단계지만 흡족하지 않다. 두 달째 끙끙대는데도 충만하게 차오르는 기쁨이 없다. 며칠 전에는 도안이 온통 검은색으로 변하는 꿈을 꾸었는데, 어젯밤에는 눈동자에 하얀 막이 씌워져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악몽에 시달렸다. 

  “윤희 씨, 잘 돼가요?” 

  실장이 등 뒤를 스쳐 지나가며 무심한 척 상황을 점검한다. 수많은 반문과 압박을 내포한 질문이라는 거 알고 있다. 머리가 아프다. 또 편두통이 시작되려나 보다.

  코로나19 사태 종식이 요원한 지금, A라인의 로열퍼플 컬렉션은 시기상조인 것 같아 조심스럽다. 심리적으로 위축된 대중의 정서를 반영하지 못했다고 질타받을 수도 있을 테다. 새 컬렉션 준비과정을 주시하는 실장의 눈이 부담스럽다. 

  “그럼요. 모두가 힘든 시기인데 A라인에다 화려한 퍼플 컬러는 외면받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윤희 씨, 그거 모르죠? 사람들은 위축될수록 표현하고 싶어 한다는 거! 대중의 소비 보복심리를 활용하는 게 지혜로운 전략이 될 수도 있어요.”

  주저하는 내게 실장의 조언이 잠깐 위로가 되긴 했지만, 그녀를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다. 두 달 전 새 시즌 컬렉션을 각자 준비해보라고 지시한 그녀는 패션디자이너 개개인의 이런 고민을 훤히 예견하고 있었을 테다. 

  실장은 부임하자마자 혁신적인 안을 내놓았다. 그간 브레인스토밍으로 아이디어를 창출하고 협업으로 디자인을 만들어내던 팀 관행을 과감하게 깨버렸다. 개인의 영감을 존중한다는 달콤한 격려와 함께, 감각적이지 못한 결과물은 폐기한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새 시즌부턴 철저하게 개인별로 차등 고과를 줄 생각이에요. 당연히 인사에도 백 퍼센트 적용할 거고요. 새로운 수석디자이너 임명은 이번 고과를 잘 받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 되겠죠.”

  단순히 분위기 쇄신 차원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뉴욕 디자인스쿨 출신으로 현지에서만 십오 년 이상 일해온, 그녀 몸에 밴 방식이었다. 일곱 명의 디자이너들을 나란히 앉혀놓고 자신의 관리 스타일을 존중해달라며 미소를 머금었다. 나는 그날, 패션 디자인이 경쟁 속에 피어나는 꽃이었던가 자문하면서 시럽을 듬뿍 넣은 바닐라라테만 종일 홀짝였다.

  A라인 퍼플 드레스를 입은 가상의 여인들이 그래픽 도안에 줄지어 서 있다. 늘씬하고 화려한 미인들이건만 도무지 현실감이 없다. 내 디자인은 뉴룩New Look이 될 수 없다는 생각에 아프다. 

  “그건 한낱 몽상일 뿐이야.”

  지수 말대로 내 안에서 충만하게 흘러나와 사람을 바꾸는 디자인은 한낱 몽상일지도 모른다. 우리 브랜드의 고유 콘셉트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쥐어 짜낸 도안일 뿐, 혁신적인 스타일에는 근접조차 못 했다. 소비자의 눈은 속여도 양심의 눈은 속일 수 없다.

  “한낱 몽상이 혁신으로 바뀔 수도 있잖아.”

  지수에게 어깃장을 놓듯 반론을 제기했지만, 사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허황한 구호 피켓을 들고 거리에 선 1인 시위자가 된 기분이었다.

  유행을 선도하는 최고의 디자이너는 애초부터 바라지 않았다. 그저 하늘이 디올에게 준 영감의 일 퍼센트라도 얻고 싶을 뿐이다. 서른일곱 살의 최고령 디자이너라는 꼬리표가 이렇게 부담스러웠던 적은 없다.

  “또, 여성들의 심리에 열정을 불러일으켰다는 디올 얘기야?”

  지수가 대놓고 이죽거렸다. 

  ‘나는 여성을 안다’고 당당하게 말하면서 크리스챤 디올은 1947년 A라인 컬렉션을 세상에 내놓았다. 2차 세계대전 영향으로 직선적이고 갑갑한 옷을 배급받아 입던 프랑스 여성들에게 그의 디자인은 혁명이었다. 바디라인을 강조하면서 만개한 꽃을 부착한 그의 옷은 여성들의 심리에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전쟁으로 억제됐던 소비 심리가 화려한 스타일을 받아들일 거라 확신했다던 디올. 그의 전망은 적중했고 소비자의 요구를 가시화한 디자이너로 급부상했다. 

  파리 유학 시절, 디올 전시회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는 컬러와 디자인에 충격을 받았다. 사람이 옷 하나로 혁명에 가까운 변화를 겪을 수도 있구나 싶었다. 옷은 옷이 아니라 한 사람 혹은 한 시대의 정신과 동의어로 느껴졌다. 

  그 뒤 시간만 나면 몽테뉴 거리에 있는 본사를 드나들었다. 그 공간 안에 있으면 메마른 뇌수도 영감의 수액으로 차오를 것 같았다. 유치하게도 디올의 유연한 사고를 흡수하는 정신적 제자가 되겠다고 다짐까지 했다. 엄존한 재능의 세계를 모르고 겁 없이 까불던 시절이었다. 

  “새 시즌 컬렉션을 만들기 전에 내 디자인의 시그너처부터 완성해요. 그게 없으면 평생 정신없이 그려대다가 폐기처분 될 거예요. 내가 곧 그 디자인이고, 그 디자인이 곧 내가 될 수 있는 근간을 확립하라는 뜻이에요.”

  지난주 회의에서 설파한 실장의 말은 옳다. 나 역시, 사람들이 옷을 구매하면서 디자이너의 가치관과 만난다고 생각해왔으니까. 그때 어쩌자고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옷을 디자인하고 싶다는, 한낱 몽상을 품었을까. 

  F/W 컬렉션은 여전히 막막하다. 전염병으로 지친 여성들에게 화려함이 열정이 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디올이 화려한 A라인을 내놓았을 때는 전쟁이 끝난 뒤였지만, 지금은 여전히 바이러스와 전쟁 중이다. 부직포로 만든 검은색 마스크와 화려한 A라인 퍼플 원피스, 둘의 조화를 상상해보면 차라리 두 눈을 감아버리고 싶다. 발표 회의가 삼 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자꾸 조급해진다.

  “왜 또 심각한 얼굴이야?” 

  시장조사 나갔다 돌아오는 길인 듯 지수가 테이크아웃 커피를 내민다.

  “네 디자인 꽤 괜찮아. 억압된 열정을 막 불태우고 싶을 때 옷으로 대리만족하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사람이 얼마나 살다 죽으려고 참겠어? 하고 싶은 대로 분출하고 사는 인생이 갑이지.”

  실장이 들을까 봐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지만, 농담할 때처럼 지수의 콧등에 잔주름이 잔뜩 잡혀 있다. 남의 디자인을 진정성 없이 진단하는 습성은 여전하다. 언뜻 격려 같은데 묘하게 언짢아진다. 진품이 아닌 대리만족 품목, 기분 전환을 위한 마취제, 뭐 그런 뜻으로 들린다. 차라리, 넌 응용력만 있을 뿐 창조력은 없다고 말해준다면 진심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동년배 입사 동기로 수석디자이너 자리를 놓고 신경전을 벌이는 거라 믿고 싶은 걸 보면 나도 한심하긴 마찬가지다. 서른일곱이나 됐어도 유치한 스무 살에서 조금도 자라지 못했다. 

  “네 말처럼 소비자에게 대리만족은 줄지 몰라도 정작 내가 만족이 안 돼서 그래. 진짜 힘든 건 그거야.”

  에스프레소 한 모금을 마시고 쓴맛 때문인 것처럼 이맛살을 찌푸렸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피식 웃는 지수의 오른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다. 

  “완벽주의 결벽증 또 시작이네. 디자이너가 옷 입을 사람 만족시키면 되지 자기만족까지 고민해?”

  그래서 넌 배려 없는 직설 화법만 내뱉느냐고 반문하고 싶지만, 쓴 커피와 함께 억지로 삼키고 화제를 돌렸다. 

  “라인은 단순화하면 될 듯한데 컬러가 너무 강한 것 같아 맘에 걸려.”

  “로열퍼플이 뭐가 강해? 퍼플 속성의 반은 차가운 색인데. 레드가 강한 마젠타퍼플이라면 모를까.”

  변화를 시도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라벤더퍼플이나 라일락퍼플은 채도가 약해서 무기력해 보였다. 아예 브라운 계열이나 그레이 계열로 바꾸는 건 우울한 시간을 더 무겁게 가라앉힐 것 같았다. 그렇다고 외국 디자인을 복제하기에는 브랜드가 넘쳐나는 국내시장에서 차별화가 어려웠다. 

  “고민할 게 뭐 있어? 너무 강하다 싶으면 아이리스퍼플이나 바이올렛퍼플로 낮추면 되지.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은 딱 좋은 컬러잖아? 윤희야, 내가 충고 하나 할까? 넌 디자이너야. 철학자가 아니라고. 패션은 그냥 느낌이야. 이유 같은 건 없어. 끙끙 앓는 네 모습, 안쓰럽다 정말.”

  학과 동기에다 각자 유학을 다녀온 후 입사도 동시에 했으니 지수와는 십칠 년 지기다. 그녀가 보기에 내게 예술성은 고갈되고 고루한 고민만 남았다는 건 진실일 테다. 성격을 바꾸든지 디자인을 그만두든지 해야 끝날 고민이다. 둘 다 어렵다면, 영혼이 깃든 옷을 만들겠다는 욕심 따위는 버리는 게 맞을 것이다. 

  “윤희야, 내 충고는 딱 여기까지야. 오늘 모임에서 수다 떨려면 말수를 아껴야 하거든.”

  일곱 중 세 명의 디자이너만 골라 소모임을 만들고 자주 뭉치는 눈치다. 모임에선 밥 사고 술 사면서 인심을 얻지만, 모임 밖의 사람들에겐 관심조차 없다. 동기라는 이유로 어색하게 걸쳐져 있을 뿐, 나는 지수의 경계 언저리를 맴도는 사람이다. 그간 큰 갈등 없이 지내온 건 조언하는 자와 듣고 흘리는 자로 각자의 역할에 충실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언제나 그랬듯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꿨다.

  “참, 시장조사 나갔던 일은 어땠어? 지수 네가 전망하는 새 시즌 디자인 경향은 어때?”

  “시장조사? 다 형식적인 거지 뭐. 치명적인 적자가 시장조사로 메워지겠어? 삼사십 대 여성들 구미에 확 당기는 획기적인 디자인을 내놓거나 아님, 고급화 전략으로 타개하는 방법밖에 없지. 중견 상장 기업이라 해도 현재 매출 보면 우리 회사도 아슬아슬해.”

  목소리는 낮지만, 지수의 눈은 연신 실장의 동선을 살핀다. 재무구조가 악화일로인 상황에서 코로나19 악재까지 겹쳐 회사는 생사의 갈림길에 직면해 있다. 패션 시장은 제조와 유통, 판매가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어서 붕괴 연타를 맞을 수밖에 없다. 위기를 피부로 느끼면서 다들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걷는 중이다. 이번 시즌 결과에 따라 일곱 명의 디자이너 중 세 명은 짐을 싸야 한다. 

  “이번 시즌에 생사가 달렸는데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고…. 후, 정말 답답해.”

  지수가 커피를 마시다 말고 피식 웃는다. 조언하기 직전에 보이는 표정이다. 재능도 없으면서 생각만 많아, 라는 메시지가 그대로 느껴지는 건 자격지심일지도 모른다.

  “사무실에 앉아서 무슨 아이디어를 얻길 바라? 아이디어가 시장조사나 관념에서 나오겠어? 모든 예술의 비밀은 열정이라는 디올의 말, 생각할수록 탁월한 명언이라니까.”

  지수 말이 뭘 뜻하는지 알기에 쓴 커피 한 모금 넘기는 걸로 대답을 일축했다. 지금 동거 중인 남자에게서 열정을 얻고 있다는 뜻일 테다. 며칠 전에 또 남자가 바뀐 걸 알았다. 야근하다 지수에게 연락했을 때 ‘지금 씻고 있는데 누구세요?’하고 전화 받는 남자의 목소리가 이전과 달랐다. 내가 그녀를 알아 온 햇수만큼의 남자들…. 자기 삶이 기준인 건 이해하지만, 디올의 명언으로 덧칠한 사생활을 열정의 근원인 양 말하는 건 우습다. 

  “지수 넌 컬렉션 마무리했구나. 요즘 여유로워 보여.”

  “그 사람 오피스텔로 들어갔거든. 지루하던 삶에 생기가 돌아.”

  새로운 남자를 만나자마자 그의 오피스텔로 들어간 것도 그녀답다. 자기 말을 증명하듯 지수 눈에 생기가 돈다. 에스프레소의 쓴맛에 목이 타는 것 같다. 오늘따라 커피 농도가 너무 진하다. 

  “…이건 내 생각인데, 동거와 열정이 동의어는 아닌 것 같아. 디올이 말한 예술의 비밀은 더더욱 아닌 것 같고.”

  조언할 줄만 알지 조언받을 줄 모르는 지수에게 기어코 조언하고 말았다. 후폭풍이 오래 갈 걸 알면서도 미련하게 내뱉어버렸다. 기껏 생각해서 커피까지 사다 준 친구에게 융통성 없는 처세술이 민낯을 드러냈다. 조언 하나 흘려듣지 못하다니, 요즘 스트레스가 많이 쌓였나 보다.

  “서윤희, 혼자 고고한 척할 건 뭐야? 네가 석훈 씨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렇지, 푹 빠질 만큼 사랑하는 남자가 나타나면 너라고 다르겠니?”

  결국 사랑을 모른다는 얘기다. 그녀 입장에서 내 연애 방식은 케케묵은 근대의 사랑법쯤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석훈도 비슷한 얘길 했다. 깊이 사랑하지 않아서 선을 긋는 거라고. 삼 년이나 사귄 연인이 이럴 순 없다며 벌컥 화까지 냈다.

  “윤희 너, 앞뒤 꽉 막힌 여자인 줄 모르지? 넌 머리에 흰 너울 쓰고 딱 성당에만 앉아 있어야 어울리는 여자야.”

  “답답한 여자 붙들고 속앓이하지 말고 언제든 자유롭게 떠나요. 나 석훈 씨 힘들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연말에 함께 여행 떠나자며 그가 항공 예매권을 내밀었을 때 차갑게 거절했다. 약속과 배려의 차원에서 서로를 지켜줘야 한다고 믿고 싶었다. 그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체념하듯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수 말대로라면, 석훈은 내 처지에 다시 만나기 어려운 남편감이다. 경제력 있는 부모 밑에서 사랑받고 자란 호남에다 미국 유수 대학을 졸업하고 외국계 은행에 근무하는 재원이다. 부모 형제도 없는 내가 분명한 선을 그을 때마다 지수는 제정신이냐며 현실을 똑바로 보라고 조언했다. 가끔은 그 조언이 무슨 수를 쓰든 그를 붙잡으라는 뜻 같아 기분이 상했다. 

  “프랑스 유학까지 다녀온 네가 이렇게 보수적인 여자인 게 이해가 안 돼.”

  석훈은 동반 여행을 거절당한 후 며칠째 연락이 없다. 부족한 것 하나 없는 사람인데 그와의 결혼을 상상하면 이상하게 흡족하지 않다. 그는 내게 과분한 사람이라고 되뇌어도 충만하게 차오르는 기쁨이 없다. 

  십칠 년간 잘 듣고 흘렸는데, 오늘따라 치기가 쓴 커피를 뚫고 불쑥 올라온다.

  “지수야, 미안한 말이지만 남자를 통해 아이디어를 얻고 싶진 않아.”

  디자인은 가치이지 수단이 아니란 말까지 내뱉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요약하자면 제 컬렉션 콘셉트는‘자유’입니다. 코로나19로 오랜 시간 집 안에 갇혀 돌봄에 몰두하던 여성들에게 옷으로 해방을 선언하는 거죠. 억압됐던 욕망의 분출이랄까요?”

  회의실은 확신에 찬 지수의 발표로 오랜만에 생기가 돈다. 그녀의 눈빛도 표정도 디자인도 반짝반짝 빛난다. 파격적인 컬렉션이다. 과감하게 로즈레드와 루비레드 컬러를 선보였다. 프리미엄 원단에 배색 펄 원사 트리밍으로 포인트를 더한 아이디어가 신선하다.

  로즈레드로 물든 A라인 원피스는 화사함을 넘어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여자라면 한 번쯤 입어보고 싶은, 분명 특별한 날의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어줄 옷이다. 상황에 억눌려 있었을 뿐, 새삼 자신이 여자란 걸 또렷하게 각성하게 될 실루엣이 아름답다. 드레스가 여성 실루엣의 비율을 찬양하기 위한 건축물이라고 말했던 디올은 언제나 옳다. 

  긴장한 디자이너들과 달리 실장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지수에게 적극적으로 공감했다. 끄덕임의 횟수가 늘어날수록 지수의 눈은 점점 영롱해졌다. 발표 내내 분위기가 좋았지만 이제 철저하고 냉정한 실장의 평가가 남았다. 그녀가 숨겨둔 송곳날을 상상만 해도 피부의 통점들이 일제히 반응하는 것 같다.

  “지수 씨 디자인은 황홀함 그 자체네요. 사랑스러운 컬러에다 여성스러운 라인이 꽤 인상적이네. 무엇보다 지수 씨의 시그너처가 잘 표현된 디자인이라 좋네요. 역시 디자인은 사람을 넘어설 수 없다니까. 수고했어요.”

  지수 얼굴이 로즈레드로 물든다. 장미처럼 화사한 저 얼굴이 지수의 시그너처가 맞다. 당당한 자신감과 달콤한 자기애. 재작년 전국 디자인 대회에서 수상했을 때도 저런 얼굴이었다.

  “그런데 아쉬운 건…”

  반말과 존댓말을 오가는 친근한 말투를 구사하지만 역시 실장은 숨겨둔 송곳을 꺼내 든다. 

  “샴페인 같은 황홀한 밤이 일상이 될 순 없죠. 세계적 추이로 볼 때 아직 샴페인을 터뜨릴 때는 아니야. 이런 걸 과유불급이라고 하나요? 너무 과한 점이 아쉽네.”

  반전으로 급강하하는 지수 표정을 다들 못 본 척하며 고개를 돌린다. 경쟁자에게 내려진 부정 평가에 내심 안도하며 디자이너들은 마지막 발표자인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다.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하다. 

  “이제 윤희 씨 발표만 남았네. 들어볼까요?”

  내게로 옮겨진 눈빛들이 예사롭지 않다. 꺾어야 할 마지막 경쟁자를 바라보는 섬뜩한 눈빛. 시작할 때보다 더 커진 부담감으로 브리핑을 하게 됐다. 

  사실은 어젯밤 고심 끝에 라인을 단순화하고 컬러를 완전히 바꿨다. 화려한 퍼플을 포기하고 블루로 가라앉혔다. 엄마에게 다녀온 뒤 갑자기 바꾼 거지만 이런저런 상념으로 잠을 설쳤다. 실장 말대로 감각적이지 못한 결과물이라 단번에 폐기되어도 감내할 수 있을까, 회사에서 쫓겨난다면 어디로 가야 할까, 어깨를 짓누르는 압박감으로 어둠 속에 못 박힌 것처럼 누워 있었다. 쫓겨나더라도 석훈의 집으로는 도피하지 않으리라, 앞서가는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다. 유치하게도 수석디자이너가 된 지수를 상상하는 밤은 길고 지루했다.

  하지만 오늘 아침 피곤한 눈을 떴을 때, 그냥 나답게 발표하자고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의 잔잔한 미소가 가슴으로 스몄다.

  “저는 이번 컬렉션에 인디고블루 컬러를 사용했습니다.”

  우리말로는 '쪽빛', 어두운 기운이 강한 청색이다. 

  실버화이트 블라우스에 인디고블루 스커트를 매치한 도안을 보고 실장과 디자이너들의 눈이 동그래진다. 퍼플 계열 안에서도 움직이길 꺼리던 내가 인디고블루라는 파격적 선택을 한 이유가 궁금한 모양이다. 계절과 어울리지 않는 블루 계열도 민망한데 왜 하필 인디고블루냐고 묻는 것 같다. 실장은 질문 대신 오른손으로 심각해진 턱을 쓰다듬는다.

  “근대 서양인들은 동양에서 전해진 인디고블루를 보고 매료됐다고 합니다. 블루 개념조차 없던 서양에 인디고블루는 신비감을 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화가들이 아끼고 사랑하는 컬러로 변모했습니다. 그림에서는 성모 마리아나 국왕의 옷에 사용하는 고귀한 색이 됐었죠. 보석으로 여겨질 만큼 귀한 인도의 돌 ‘라피스라즐리’를 갈아서 만든 게 인디고블루입니다. 구하기도 어렵고 가격도 어마어마하게 높았다고 해요. 귀했기 때문에 더 고결한 색이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지수를 비롯한 디자이너들은 어이없는 표정이 역력하지만, 실장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진지하게 듣고 있다. 속을 알 수 없으니 난감하다. 

  “17세기 화가 베르메르가 작은 캔버스만 고집한 것도 높은 가격의 인디고블루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림에 인디고블루를 맘껏 사용하고 싶었는데 경제적 여유가 없었던 거죠.”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그린 화가 말인가?”

  실장은 상체를 앞으로 바짝 당겼다. 그녀의 동작 하나에 디자이너들의 눈동자가 따라 움직이고 심지어 눈썹까지 꿈틀댄다. 모두 실장의 속을 간파하고 싶은 눈치다. 입구로 들어왔으나 출구가 없는, 혹독한 서바이벌 게임에 초대받은 사람들 같다.

  “예, 맞습니다.”

  “윤희 씨는 그 그림 직접 본 적 있어요?”

  “유학 시절 네덜란드로 여행 가서 봤습니다. 소녀가 쓰고 있는 터번이 인디고블루인데 굉장히 신비로웠어요. 정결하고 평안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실장은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인다. 전적인 공감은 아닐 것이다. 그녀의 송곳은 항상 팔짱 아래 감추어져 있으니까. 아직도 그녀의 심중을 모르겠다. 어떤 사인도 보내지 않는다.

  “음, 하긴 휴양지가 즐비한 지중해 빛깔도 인디고블루지. 일상의 휴식 같은 거? 윤희 씨는 혹시 여성들에게 일상의 휴식을 선물하고 싶은 건가요?”

  맞다. 역시 실장은 영민하고 감각적이다. 종식이 보이지 않는 전쟁 속 여성들에게 휴식을 줄 수 있다면 좋겠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암울한 시간을 견디는 여성들에게 17세기 화가들이 염원했던 의미까지 선사하고 싶다.

  “순결입니다.”

  순간적으로 공간을 덮어버리는 적막. 

  지수의 발표로 한결 누그러졌던 공기가 다시 얼어붙었다. 어색하고 민망한 기운이 역력하다.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 디자인 발표가 아니라 한낱 말 놀음에 그칠지도 모른다. 지수 말대로 철학자 흉내가 될 수도 있다. ppt 포인터를 쥔 손바닥에 땀이 밴다. 목에 힘을 주는데도 미세한 떨림이 음성에 섞여든다.

  “코로나와의 전쟁은 어찌 보면 수치의 시간 같습니다. 인간의 욕망이 낳은 참혹한 결과니까요. 다시 본래의 겸허하고 정결한 모습으로 돌아가 자성하자는 메시지를 담고 싶었어요. 귀한 대상에게 인디고블루 컬러를 입혔던 17세기 화가들의 마음처럼요. 실장님이 말씀하신 휴식의 의미까지 더해진다면 제 컬렉션이 추구하는 바는 모두 담긴 겁니다.”

  묵직한 돌이 얹힌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다. 좌중에 흡수되지 못한 낡은 언어들이 냉랭한 공기 속에 겉돌고 있다. 누군가 갑자기 폭소라도 터트릴 것 같다. 목과 어깨가 뻐근하다.

  실장은 팔짱을 풀며 등받이에 천천히 몸을 기댔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간다. 모호한 눈빛만큼 심중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 사용하는 그녀에게서 친밀함과 엄격함을 구분하기 어려운 것처럼. 다가가면 거리를 두고, 거리를 두면 다가오는 야누스다. 드디어 실장이 입을 연다.

  “궁금한 게 있어요. 갑자기 인디고블루로 바꾼 특별한 이유가 있나? 어제 조퇴하기 전까지도 퍼플로 디자인하는 거 내가 봤는데.”

  “엊저녁, 컬러를 바꾼 계기가 있었습니다.”

  “물어봐도 돼요?”

  “개인적인 일이라서요. 제 삶의 소중한 것과 관련된 겁니다.”

  발표자와 실장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바짝 긴장해 있던 지수의 입가에 조소가 스민다. 도안을 붙들고 철학자처럼 끙끙대던 결과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선문답인가 싶은 얼굴이다. 오른쪽 입꼬리가 올라가는가 싶더니 즉각 반문한다.

  “지금은 17세기가 아니라 21세기예요. 무려 사백 년의 공백이 있습니다. 제가 알기론 현대에 와서 인디고블루는 의미가 완전히 달라졌어요. 흔한 청바지에 쏟아붓는 컬러입니다. 인디고블루에서 순결의 의미는 이미 사라진 거 아닌가요? 대중화되다 못해 노동자 옷의 상징이 돼버린 인디고블루로 윤희 씨가 원하는 상징을 표현할 수 있을까요?”

  지수의 직설화법에 디자이너들도 눈빛으로 공감한다. 케케묵고 어쭙잖은 감상이라 여기는지 누군가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이미 퇴색된 순결 따위를 현대 디자인의 가치라고 들고나온 네가 한심하다는 의미 같다. 네가 좋아하는 인디고블루처럼 이제 좀 대중적으로 변하라는 조언처럼 들린다. 

  덕분에 브리핑에서 강조하려던 인디고블루는 성모 마리아의 옷이 아니라 노동자가 입은 청바지로 귀착돼버렸다. 부정적인 피드백 때문인지 좌중에 일순 활기가 돈다. 안도감은 서바이벌 게임에 초대된 사람들의 양식 같다.

  “윤희 씨, 유럽에서 유학한 티가 나네요.”

  지수는 추켜세우는 척 비난한다. 뉴욕에서 유학한 당신은, 그래서 뉴요커의 자유로운 삶을 사는 거냐고 반문하고 싶지만 억지로 흘려버렸다. 지수도 나도 이젠 기댈 곳이 없어졌다. 알량한 자존심을 지켜주던 유학파 꼬리표도 이젠 헐값이 돼버렸다.

  “음, 옷에 담긴 상징성은 중요해요. 윤희 씨가 깊이 고민한 건 고무적인 일이고요. 지수 씨를 비롯한 대다수 디자이너가 움츠러든 마음에 해방감을 표현한 것과 방향이 달라서 개성도 있어 보이네. 나름 신선해요.”

  자료가 수북이 쌓인 테이블에 시선을 둔 실장은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이다. 긍정적인 면을 짚어주었으니 이젠 냉정한 평가가 이어질 차례다. 좌중에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윤희 씨, 이건 주관적인 느낌일 수도 있는데… 윤희 씨 말에 확신이 없어 보여요. 인디고블루를 왜 상의나 하의에만 사용했을까? 굳이 실버화이트나 빈티지핑크를 매치해 구성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과감하게 전체를 인디고블루로 디자인할 생각은 안 해봤어요? 윤희 씨가 말하는 상징이 비현실적인 거 본인도 알기 때문인가?”

  “…맞습니다. 너무 과한 느낌을 줄까 봐 그랬습니다.”

  영민한 실장은 심령술사 같다. 디자인으로 사람의 심리를 꿰뚫는 영매. 디자인과 대중 사이의 제사장. 인간 심리로 디자인을 불러내고 디자인에서 인간 심리를 읽어낼 줄 아는 능력자다. 그녀라면 새 시즌 컬렉션으로 어떤 디자인을 그려낼지 궁금해진다. 

  자신 없는 대답 때문인지 디자이너들의 얼굴에 하나둘 안도가 스친다. 지독한 외로움에 목이 탄다.

  “현대인들에게 순결이 얼마만큼 영향을 줄 수 있느냐에 달렸어요. 17세기에 비싼 인디고블루로 성모 마리아의 옷을 그렸다면 아마 그 시대도 순결에 대한 반감이 강했단 뜻일 거예요. 난 그렇게 해석돼. 뭐든 부족하면 귀한 게 되니까. 더 부족하면 성스러운 게 되기도 하고. 대중의 정서가 어디에 응집돼 있는지 민감하게 찾아내서 만족시켜 주는 사람이 디자이너예요. 세상에서 가장 민감한 더듬이를 가진 사람이죠.”

  대중의 정서를 대변하는 것만이 디자이너의 역할이냐고 묻고 싶었다. 대중에게 새로운 가치를 부여할 순 없느냐고 질문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현실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망상이라 짚어준다면 답할 말이 없을 테니까.

  크리스챤 디올은 대중의 심리를 대변한 것인지 새로운 가치로 이끈 것인지조차 혼란스럽다. 전쟁 때문에 억눌린 욕망을 분출시켜 준 건지 아니면, 삭막한 세계에서 열정의 세계로 인도한 건지 헷갈린다. 

  “브리핑 잘 들었어요. 다들 내용 보완해서 내일까지 최종보고서 올리세요. 방금 서로 피드백한 내용 적용해서 수정해도 되고요. 검토해보고 가을 컬렉션 결정할 겁니다. 선정된 디자인의 주인이 당연히 수석디자이너로 승진하겠죠.”

  실장이 마지막 일침을 가한다. 그녀는 자체 제작 매뉴얼이라도 있는 것처럼 숨겨둔 송곳을 적재적소에 사용할 줄 안다. 그러나 그녀의 매뉴얼 중 가장 끔찍한 건 끝까지 보여주지 않는 심중이다.          

  바람도 쐴 겸 사옥 꼭대기 하늘정원으로 올라왔다. 회의는 끝났는데 무거운 마음은 여전하다. 긴장 탓인지 얼굴만 붉게 달아올랐다. 답답한 이유를 객관적으로 찾고 싶은데 잘 모르겠다. 능력 부족이나 실장의 모호한 평가 때문만은 아니다. 디자이너들의 차가운 반응 때문도 아니다. 그게 다는 아니다. 어쩌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옷을 만들려다 비웃음을 산 부끄러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제는 너무 답답해서 엄마에게 다녀왔다. 디자인 도안을 덮어놓고 네 시쯤 조퇴해서 무작정 추모공원으로 향했다. 사진 속에서 엄마는 여전히 온화한 얼굴로 웃었다. 

  “엄마, 나 왔어.”

  그래, 우리 윤희 왔구나. 힘들지? 라고 답해주는 것 같아 순간 울컥했다. 무슨 대단한 일 한다고 목이 메었는지 모를 일이다. 요즘 같은 때 누군들 밥벌이가 쉬울까. 그런데 무모하게도 디자인으로 밥벌이 이상의 꿈을 꾸다니. 그래놓고 서른일곱이나 돼서 나 힘들다고 응석이라도 부리고 싶었던 걸까.

  일찍 홀로 돼 시장통에서 한복집을 운영했던 엄마는 직접 디자인하고 재단해 옷을 지어냈다. 한자리에서 이십 년 넘게 해온 일이어서 단골이 꽤 많았다. 

  “윤희야, 옷 짓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아니? 옷을 짓는 건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야. 품을 재고 옷감을 고르고 마름질하고 바느질해서 완성하는 동안 오직 옷 입을 사람만 생각하게 되거든. 옷을 바꿔 입으면 사람의 겉모습뿐 아니라 마음까지도 달라져. 신기하지?”

  굳은살이 박인 손으로 유학비까지 댔다. 엄마의 피로 파리에서 공부하고 있단 생각을 하면 내 마음에도 굳은살이 박였다. 

  “윤희 네가 엄마 꿈을 대신해주는 거야. 내가 지은 한복이 프랑스 파리까지 전해지는 기분이랄까? 그런데 프랑스 사람이든 한국 사람이든 옷 짓는 원리는 같을 거야. 그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걸 찾아서 입혀주는 게 아닐까? 그것보다 귀한 일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니.”

  엄마가 지은 한복을 입으면 평범한 사람도 반짝반짝 빛이 났다. 핏기 하나 없이 왔던 여자가 모본단 다홍치마를 입자 뺨에 홍조가 피는 게 신기했다. 진주 빛깔의 본견 치마를 입으면 흐트러진 사람에게서 단아함이 돋았다. 분홍 양단을 두른 초로의 여인에게서 발랄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고전적으로 혹은 현대적으로, 우아하게 혹은 농염하게, 화사하게 혹은 단아하게, 성숙하게 혹은 귀엽게, 사람의 개성과 향기에 따라 옷을 만들던 엄마는 고단한 요술쟁이 같았다. 엄마 옆에서 자투리 비단으로 인형 옷을 만들며 놀던 내게 디자인은 동화 나라로 가는 마법이었다.

  추모 사진 안에서 엄마는 생전에 입버릇처럼 하던 말로 가만가만 위로해주었다.

 “윤희야, 옷은 참 이상한 거야.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입는 게 옷인데, 자신을 정결하게 하는 게 또 옷이거든. 옷은 옷 이상이랄까? 간절한 소망으로 디자인하면 옷 입은 사람이 그 바람대로 바뀌는 거, 그건 디자인하는 사람만 아는 비밀이란다.”

  유학에서 돌아오자마자 엄마는 할 일을 마쳤다는 듯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외동딸이 올 때까지 사력을 다해 견딘 사람 같았다. 이상하게 어제는 엄마 미소가 눈물 나게 그리웠다. 무능력한 딸 때문에 딸의 꿈에 얹은 엄마의 꿈은 피어나지도 못하고 부유하는 것 같아 아팠다. 세계 사람은커녕 자신도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 디자인이라니…. 추모 사진 앞에서 끝내 울고 말았다.

  “엄마, 미안해. 내가 이것밖에 안 돼.”

  하늘정원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은 늘 익숙하다. 즐비한 빌딩들이 뒤섞여 구역을 형성하고 있다. 멀리 리모델링을 시작하는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낡았다 싶었던 상업용 빌딩이 새 단장을 하려는 모양이다. 쫓겨나지 않으려고 얼른 새 콘셉트로 갈아타는 직장인 같다.

  아름다운 빌딩이 있는가 하면 초라한 건물도 눈에 띈다. 디올은 말했다. 당신이 누구인지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집에 사는 것은 남의 옷을 입은 것과 같다고. 내 집, 나만의 옷, 나만의 시그너처…. 자꾸 조급해진다. 내일까지 최종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소나기가 내린 뒤라 희뿌옇던 전경이 오늘은 맑고 선명하다. 전염병으로 사람들은 막막해하는데, 역설처럼 공기는 깨끗해졌다.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그래서 욕망을 내려놓을 때, 그를 둘러싼 배경은 더 정결해진다는 법칙 같아서 아주 조금은 위로가 된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고개를 들었다. 머리 위에는 어느새 훌쩍 높아진 하늘이 펼쳐져 있다. 도안 속 디자인에만 골몰하느라 머리 위에 저렇게 푸른 공간이 있다는 것도 잊고 지냈다. 오늘 하늘빛은 온통… 인디고블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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