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디 워홀, 감정의 소비, 그리고 후기 자본주의의 기호 체계
이 질문은 단순히 한 예술가의 평가를 묻는 것처럼 보이지만, 곧바로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진다. ‘위대함’은 고정된 예술적 가치인가, 아니면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일종의 기호적 허구인가?
워홀은 감정을 비우고, 반복과 복제를 미학으로 삼았으며, 공장(Factory)이라는 이름의 예술 생산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 모든 전략은 근대 예술의 핵심 가치였던 독창성, 진정성, 깊이를 해체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늘날 ‘예술가 중의 예술가’, 혹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대변자’로 불린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를 특징짓는 개념 중 하나로 ‘정동의 퇴조’, 곧 감정의 소멸을 들었다. 예술은 더 이상 감정의 깊이를 담지 않고, 표면적 이미지와 스타일의 연쇄로 대체된다. 워홀의 마릴린 먼로 연작은 그 대표적 예시다. 이러한 맥락에서, 몇 년 전 조던 피터슨(Jordan Bernt Peterson)과의 토론에서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이 도널드 트럼프를 ‘진정한 포스트모던 대통령’이라 부른 장면이 떠오른다. 진실이나 이념보다 기호와 이미지가 소비되는 정치, 감정의 진정성보다 정동의 퇴조와 과잉된 퍼포먼스가 중심이 되는 시대. 워홀 역시 그와 유사하게, 예술의 본질이나 깊이보다 반복과 이미지 소비 자체를 예술로 삼았기에, 그는 단지 위대한 예술가가 아니라, 위대함이라는 기호가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드러내는 포스트모던적 실천자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복되는 스타의 얼굴은 슬픔, 비극, 고통의 정서를 지우고, 그저 하나의 기표화된 스타 이미지로 기능할 뿐이다. 워홀은 감정을 표현하기보다, 감정이 어떻게 소비되는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하나의 감정적 공허함이자 과잉된 시각적 쾌락의 장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질문하게 된다. 워홀의 ‘위대함’은 예술적 탁월성 때문인가, 아니면 그를 위대하게 소비하도록 만든 후기 자본주의의 체계 때문인가? 제임슨이 말한 후기 자본주의는 이미지, 정체성, 감정마저도 시장에 의해 구성되고 유통되는 시대다. 이 시대의 예술가는 작품만으로 평가받지 않는다. 미디어에서의 재현, 시장에서의 가격, 대중문화 속 소비 방식이 그의 예술성과 직결된다. 워홀은 이 구조를 거스르지 않았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기호화했고, 브랜드화했고, 시장과 결탁했다. 그는 예술의 ‘내면’을 보여주지 않았고, 그것을 조롱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것이 그를 ‘예술의 최전선’으로 올려놓은 것이다.
결국 앤디 워홀은 단순히 예술가라기보다는 후기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위대한 '기호(signifier)'다. 그는 근대 예술의 신화를 해체하면서 동시에 자본주의적 위대함의 신화를 다시 썼다. ‘위대함’이란 본래의 실체가 아니라, 반복, 유통, 인용, 재현을 통해 만들어지는 사회적 구성물임을 보여주는 인물. 그렇기에 워홀은 진정한 예술가인가라는 질문보다, “우리는 어떻게 위대함을 믿게 되는가?”, “누가 예술가를 위대하다고 말하게 만드는가?” 라는 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게 한다.
오늘날 우리는 예술뿐 아니라 정치에서도 유사한 포스트모던적 감정 소비의 양상을 목격한다. 요즘 전시관을 찾는 많은 이들이 작품 그 자체에 몰입하기보다는, ‘작품 앞의 나’를 남기기 위해, 곧 기념사진의 배경으로서 전시를 소비하는 경우가 많다. 감상보다는 기록, 감동보다는 이미지의 ‘남김’이 중심이 되는 이러한 문화는 작품의 내적 의미보다는 표면적 기호로서의 가치가 우선시되는 포스트모던적 전환을 보여준다. 이는 정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최근 탄핵된 윤석열 전 대통령을 향해 오열하거나 열광적으로 환호하는 일부 지지자들의 행위는, 정치적 판단이나 이념이 아닌 감정과 내러티브 중심의 ‘정치 팬덤’ 문화와 맞닿아 있다. 슬라보예 지젝이 도널드 트럼프를 ‘포스트모던 대통령’이라 지칭했던 것도, 바로 정치가 실체보다 기호로 작동하고, 감정이 진정한 내면의 울림이 아닌, 연출되고 소비되는 퍼포먼스로 전락하는 구조를 비판하기 위함이었다. 앤디 워홀 역시 감정을 표현하기보다는 감정이 어떻게 소비되는지를 보여주었고, ‘위대함’이란 기호적 반복과 유통을 통해 구성된다는 점을 예술로 실천했다. 결국 우리는 예술이든 정치든, ‘무엇이 위대한가’보다 ‘무엇이 위대하다고 여겨지게 되었는가’를 묻는 비판적 시선을 요구받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