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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담 Dec 29. 2022

그래, 여기까지 잘 왔다.

벌써 10년

 그렇다. 벌써 10년이라는 시간이 다 되어 간다. 

2013년 1월 중순, 나와 우리 와이프는 9년여의 열애(?) 끝에 결혼하게 되었다. 열애 옆에 물음표를 붙인 이유는, 그 당시에도 오래 만나서 친구 같은 느낌? 좀 편안한 느낌이 더 강했었다. 물론 지금도 서로 불같이 사랑한다 말할 수는 없지만, 서로 아껴주고 위해주며 가정을 일구어 가고 있는 중이다.


 우리 와이프는 나의 변변치 않은 집안 형편에 대해 이해해 주었고, 나는 그것에 감사했다. 

종갓집이라고 하지만 사실 별 볼 일 없는 집안 '장남'의 '차남'으로 태어나 "자수성가"를 해야만 하는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고, 그렇게 살아왔다. 

 사실 결혼생활을 잘해나갈 자신은 있었다. (생활력 측면에서만..)

돈이 궁해 초등학교 때부터 전단지 붙이는 아르바이트부터, 아버지 따라다니며 돈 벌어보겠다고 중학교 고등학교 방학 때마다 배달알바도 나갈 정도로, 스스로 생활력에 대한 자신이 있었다. 돈을 불리는 재주까진 아니지만, 돈을 버는 것과, 아껴 쓰는 것에 있어 어머님의 많은 영향을 받아서인가 크게 모난 부분이 없었고, 처자식 굶길 정도로 정신이 나약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현실은 현실이었다.

10년 전이라고 지금과 현실이 크게 달랐으랴? 전혀 그렇지 않았다. 가진돈으로 집을 구하기 어려워 성남의 단열이 잘 안 되는 낡은 주택에 터를 잡고 껴안고 자며 추운 겨울을 낳았던 적도 있었고, 큰애가 태어나 결국 그 주택에서는 도저히 살기가 어려워져서 염치 불고하고 장인어른 댁에서 더부살이를 하며 꽤 오랜 시간을 지내왔던 적도 있었다. 그뿐이랴? 겨우 있는 돈 없는 돈 다 긁어서 장만한 지금의 아파트, 대출이자를 갚겠다고 와이프에게 생활비로 돈을 많이 주지도 못해서, 동네 아주머니한테 "그 돈 갖고 어떻게 생활을 해요?"라는 소리까지 듣던 우리 와이프였다. 


 경제적인 것은 경제적인 것대로 어려움이 컸지만, 아이를 양육하는 문제는 또 다른 문제였다.

돈이야 적게 쓰고, 난방 안 하고 이불 둘둘 말아서 어떻게든 버티고, 에어컨 안 켜고 선풍기 틀면 된다고 하지만, 사실 그간 결혼을 하고 우리 부부에게 있어 가장 힘들었던 점을 꼽는다면 이구동성, 우리 큰애의 발달장애일 것이다. 

 사실 지금은 그때 걱정과 다르게 큰애가 또래들과 어울리기도 하고, 숙제도 스스로 해 나가는 면들을 보여주어 걱정을 한시름 덜었다. 하지만 4살 때 아이의 이상행동을 인지 한 이후 찾았던 발달센터에서의 검사 이후, 우리 부부는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또래보다 많게는 12개월 뒤처져 있는 세부 발달 항목 그래프를 보며,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절망에 빠졌던 적이 있었다.


 그날 이후, 결국 우리 와이프는 '정규직 사서'의 꿈을 접고, 큰애의 양육에 올인했다.

그 덕분일까? 시간과 돈을 투자하고, 아이에게 적당한 자극과 기다림을 주어서 그런가 점점 더 올라오는 것이 눈에 보였고, 초등학교 가기 전 같은 기관에서 받은 발달 상태 점검에서는 또래 평균치보다 크게 뒤처지지 않는 개선된 그래프를 보여주었다. 물론, 큰애는 어려움이 조금 있지만, 그래도 처음에 비할바는 아닌 것이다. 학교를 가서는, 또래로부터 더 자극을 받아서일까? 큰애는 유치원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이 무언가 해보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정말 기적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내가 종교를 믿지 않지만, 하느님, 부처님께 너무나도 감사하다. 

 사실 이런 큰아이의 뚜렷한 발달 상태 개선은, 묵묵히 힘들지만 아이에게 시간과 노력을 다 해준 와이프의 공이 전적으로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바깥에서 돈을 벌어오는 것보다, 아이들에게 노력과 헌신을 하여 육아를 하는 것이 더 어렵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와이프에게 감사의 말을 이 자리를 빌려해주고 싶다. "고마워, 여보."


 집안일과 양육에 있어, 와이프의 도움으로 고차원에서 저 차원의 방정식이 되었으므로, 내가 할 차례는 바깥에서 생활비를 잘 벌어다 주는 것이었다. 내가 개발을 딱히 잘하는 건 아니지만, '서비스 마인드'를 앞세워 많은 일들을 잘 처리하고, 믿음을 드린 결과 일까? 많은 분들 덕분에 진급도 빨리하고, 그에 따라 가처분 소득도 자연스레 늘어나게 되었다. 늘어나는 소득은 바로바로 은행에 대출원금 상환에 썼고, 그 결과는 월마다 생활비를 조금씩 더 줄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지금은 우리 와이프도 1주일에 한 번씩 사서 아르바이트를 나간 지 3년째, 그리고 나 또한 작년부터 하게 된 웨딩스냅 부업이 생각보다 벌이가 괜찮았다. 나의 경우는 주말 하루가 주중 5일보다 더 기다려지기도 하였다. 물론 쉬고 싶어서가 아니라, '셔터질'을 할 수 있는 날이어서 그랬다.


 나는 10월에, 내가 부업으로 꼬박 모은 돈과, 와이프가 조금씩 생활비를 모아논 돈을 합쳐 가족 여행을 가기로 했다. 여행날짜와 리조트를 고르는데, 이 상황에서도 조금이라도 저렴한 날짜와 리조트를 찾아 몇 날 며칠을 방황했다. 그런 끝에 베트남의 한 휴양 리조트를 골라 비용을 지불했다. 남들처럼 하와이니, 유럽이니, 몰디브니 하는 고급 여행은 분명 아니었지만, 우리 가족의 경제 상황하에서 최선의 선택을 한 셈이었고, 여행을 다녀온 이후인 지금도 생각날 정도로 우리 가족 모두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가 있었다. 

베트남 푸쿠옥의 석양은 정말 멋졌다.


 벌써 결혼한 지 10년이라니, 정말 시간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금방 지나갔다. 

우리 와이프와 나는 10년이라는 결혼 생활을 어려움은 비록 있을지언정, 서로가 서로를 버티며 잘 이끌어 왔다는 것에 감사해했다. 그래서일까? 다른 부부들처럼 화끈한(?) 사랑은 없을지언정, 친구처럼 은은하게 지지해 주는 것이 서로의 장점인 거 같다. 10년을 잘 이끌어왔으니, 남은 시간의 많은 난관들도, 잘 헤쳐나갈 것으로 나는 믿는다. 


"그래, 여기까지 잘 왔다."

라는 문장뒤에는, "앞으로도 잘 부탁해, 우리 와이프"이라는 말이 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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