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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담 Jan 07. 2023

농구, 좋아하세요?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콘텐츠

 내가 어렸던 그 시절, 지금처럼 콘텐츠가 '범람'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흐릿하게나마 머릿속에 남아있는 기억으로는, 90년대부터 해서 텔레비전에는 온갖 예능 콘텐츠들이 꽃을 피우기 시작하는 때였고, 아이돌도 그때 당시 기획되고 만들어지면서 대 히트를 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나같이 방과 후에 할거 없는 초등학생들을 위해, 지상파 3사에서는 나름 '경쟁'적으로 일본만화를 수입해서 더빙으로 틀어주곤 했었다. 그중에서도 SBS에서 틀어줬던 슬램덩크가 방송되는 오후 5시 30분이면, 밖에서 놀다가도 어김없이 집에 들어와 텔레비전을 켜기 일쑤였고, 이때만큼은 아버지가 일이 없어 집에 계신 날에도 꼭 봐야겠다며 리모컨을 뺏어 오기도 하였었다.


 그랬다. 그 당시에는 학교에 가면 모두가 거의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다섯 살 터울의 형이 한 명 있다.

우리 형은 나에게 마치 조선시대의 '서양 문물'과도 같았다. 지금이야 같이 늙어가는 처지지만, 초등학교 1학년때 초등학교 6학년, 초등학교 4학년 때 중학교 3학년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형은 나보다 덩치도 컸고, 보고 있는 세계도 더 컸으리라 생각한다.


 형은 학교 다녀온 다음에 집에서 만화를 자주 보곤 했다. 나도 할 게 없으니까 그 만화를 같이 보곤 했는데, 초등학교 저학년 때 접했던 만화가 바로 슬램덩크였다. 

 농구의 농자도 모르는 어린이가 봐도 몰입할 수밖에 없는 스토리 라인을 갖고 있었다. 그 당시 만화계의 쌍벽이라던 드래곤볼은, 시리즈가 너무 길고 또 나는 '상상'을 잘 못하는 스타일이라 판타지 물에 가까웠던 드래곤볼보다는 슬램덩크가 훨씬 재밌었던 거 같다.


 혹시 아시는 분 계실까? 그 당시에는 '여러 만화'가 아주 조금씩 담겨 나온 소년점프라는 만화가 있었다. 슬램덩크만 다루는 게 아니라, 내가 모르는 만화들도 조금씩 볼 수가 있었는데 사실 딴 건 별로 재미가 없었고 슬램덩크만 보고 형방에 가져다 놨던 기억이 난다.

아직도 가슴이 두근두근하는 단행본 표지


 만화의 영향에 힘입어, 내가 어렸을 적에는 학교에서 농구했던 기억밖에 없다.

딱히 누군가 불러주지 않으면, 먼저 하자고 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보니, 구기종목 중에서는 '농구'가 제일 좋았다. 혼자 공들고 비어있는 코트에 나가서 슛도 던질 수 있고, 그렇게 슛을 던지고 있으면 같은 또래 친구들이 껴주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사실 '쓸데없는 승부욕'도 조금 있어서, 농구경기에서 지면 돌변하기도 했다. 세상에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모르던, 피가 끓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슬램덩크는 내 어릴 적 절대다수의 지분을 차지하는 '농구'라는 취미를 형성하는데 가장 크게 기여했던 콘텐츠였다. 내 어릴 적 기억을 꼽자면, "슬램덩크" & "농구" 딱 두 가지만 생각이 날뿐, 다른 게 생각나지 않을 정도다.  


 세월이 흘렀다. 그토록 피가 끓던 소년은, 어느새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오고, 결혼을 하게 되었다.

이제는 회사에서, 가정에서 써야 할 에너지를 요구받게 되었고 나에게 쓸 수 있는 시간은 점점 줄어게 되었다. 게다가 이제는 나이가 들 수록 예전처럼 피로가 쉽게 풀리지 않게 된다는 것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때마침 매주 토요일마다 이어오던 회사 농구동호회 활동도, 6년 전 십자인대 파열 부상을 입으며 사실상 나의 소중한 취미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렇게 슬램덩크와 농구라는 내 소중한 추억을 가슴 한편에 묻고 '사진'이라는 대체제를 찾게 되어 현실을 살아가던 도중, 슬램덩크 극장판이 개봉한다는 뉴스를 작년 여름에 농구 커뮤니티에서 보게 되었다.

 뭐, 사실 감흥 없었다. 예전 거 그냥 다시 그려서 추억팔이하는 거겠지. 그 정도 생각이었다. 


 시간이 흘러,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고, 새해가 밝았다. 드디어 한국에서도 극장에서 상영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왜인지 모르겠으나, "꼭 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니, 꼭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초등학교 때, SBS에서 틀어주던 만화 슬램덩크를 보기 위해 리모컨을 두 손으로 꼭 쥐고 가슴 편에 숨겨놓고 봤던 그 시절처럼 말이다.

 무언가 홀린 듯, 회사 앞에 있는 영화관에 자리를 예매했다. 세상에, 텅텅 비어있을 줄 알았는데, 자리가 거의 만석이다. 맨 앞줄만 있네.. 그래도 봐야겠다 싶어 서둘러 결재까지 마쳤다.


 영화관에 들어갔을 때 다소 늦게 도착하여 어두 컴컴했지만, 나처럼 3040대 '아재'분들이 거의 다 스크린 앞에서 상영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보통 영화관 오면, 여자친구가 보고 싶어 하는 콘텐츠에 남자들이 따라오는 구조인데, 이번만큼은 절대다수가 내 또래 남자들이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마치 예비군 훈련장을 온 느낌이랄까...? 나도 같은 또래 아재들 사이에 자리를 잡으니 묘한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영화는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산왕전'을 새로 그려서 만든 작품이다. 기존 강백호가 맡던 메인타이틀을 송태섭이 맡았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사실 만화에서는 송태섭의 내러티브가 잘 보이지 않는다. 그저 빠르고 드리블 좋은 가드였다는 기억만 있는데, 그가 성장해오던 서사를 이번에 볼 수 있어 좋았다. 

 아울러, 만화책으로는 이미 다 아는 대사들이지만, 실제 성우들이 연기하며 내뱉는 대사가 생동감이 있게 느껴졌다.


 가장 영화를 보며 좋았던 것은, 관람객 모두가 같이 웃고, 같이 우는 그런 동질감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다들 어린 시절, 우리는 이 콘텐츠를 소비하며 술은 없지만 안주삼아 학교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던 그 사람들이었다. 세월이 흘러, 3040대가 되어, '우리 세대'를 타깃으로 한 콘텐츠를 함께 다시 보며 모두가 즐거워했던 영화관의 느낌이 나는 가장 좋았다. 

영화관에서 이 장면을 봤을 때 전율이란...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슬램덩크 OST'를 찾아 들으면서 왔다. mp3가 없던 그 시절, 우리 형은 싱글벙글하며 CD하나를 구워왔다고 했다. 


"종화야, 이거 뭔지 아니?"

"뭔데?"

"놀라지 마, 이거 슬램덩크 일본판 OST야!"

"우와, 이거 어디서 구했어?"

"다 방법이 있지! 우리 컴퓨터에 CD 넣고 들어볼까?"

"응!"


 별거 아닌 것에도 늘 감사하고 즐거워했던 어린 시절,

'좋았던 추억'만 꺼내 먹을 수 있게 해 준 슬램덩크 극장판이었다. 

 다시 그려줘서 너무 고마워. 이노우에 다케히코 상.


꼭 보길, 두번 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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