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Wanna be, 나의 우상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던 1998년만 해도, 집집마다 '전화기'가 놓여 있었다.
지금이야 흔하디 흔한 휴대전화이지만 그때만 해도 삐삐를 갖고 있는 사람들만 봐도 '잘 사는 사람'인가 보다 하고 부러워했던 기억이 있다. 중학교 때 짝사랑 하던 여자아이의 집전화번호를, 그 아이의 친구로부터 몰래 구입(?) 한 뒤 내가 살던 아파트 내 공중전화 부스에서 전화를 걸며 제발 부모님이 받지 말고 그 아이가 받게 해달라고 종교도 없던 내가 하나님께 기도를 했던 적도 있었다.
내 어릴 적 기억으로는 IMF라는 외환위기를 맞으며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었고,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었다. 부모님은 집에서 저 멀리 떨어진 관악구까지 가셔서 힘들게 튀기시던 치킨점을 접으셨고, 덕분에 나는 흔하게 먹던 양념 치킨을 잘 먹을 수 없어 어린 나이에 엄마에게 뭐라 뭐라 했던 기억도 난다. 지금 생각하면 참 정말 어렸었던 것 같다.
나는 다 우리 집처럼 모두가 공평하게 어려운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변하지 않는 진리를 그땐 모르고 있었다. "어려움은 더 어려운 사람에게 큰 상처를 입힌다는 것"을 말이다. 교복 두 번 사는 것은 무조건 막으시겠다며 아빠 양복보다도 더 큰 재킷과 바지, 그리고 와이셔츠를 두벌, 그것도 시중가보다 10만 원은 더 저렴한 메이커 없는 교복집에 가서 옷을 맞춰 주셨다. 팔 소매가 어찌나 긴지 재킷을 입으면 손이 안보일정도였다. 내가 마네킹인지 사람인지 착각할 정도였다. 학교를 등교하니, 나처럼 큰 교복을 입는 애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적어도 내 기억 속에는 말이다.
같은 반 또래 친구들 중 하나 둘, '휴대폰'을 학교에 가져오기 시작했다.
신기해하면 지는 건데, 어차피 내가 가질 수도 없는 물건 쳐다도 보지 않으리, 처음에는 관심을 전혀 두지 않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집안 경제사정정도는 눈치채고도 남을 나이였기 때문이었다. 힘들게 사는 부모님께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점차 휴대폰이 빠르게 친구들 사이에 마치 코로나처럼 퍼져나가며, 이제는 없는 아이들이 손에 꼽힐 정도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종화야, 이거 봐 바"
"됐어, 나는 이런 거 관심 없어(사실은 나 커서 장비 충되는데...)"
"이거... 심지어... <애니콜>이야"
애니콜, 말만 들어도 설레던 단어였다. 삼성전자가 내놓은 프리미엄 휴대폰. 광고에서는 지리산? 아무튼 엄청 높은 곳에 가서도 전화를 할 수 있다는 그 폰이었다. '쟤가 저렇게 잘 살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 눈에 그 아이는, <애니콜>을 가지고 있던 것만으로도 후광효과가 났었다. 그 당시 나는 <애니콜>은커녕, 팬텍 앤 큐리텔 폰이라도 그저 갖고 싶었었다.
세월이 흘러, 나는 고1 때가 되어서야 드디어 첫 휴대폰을 형이 쓰던 팬텍 앤 큐리텔 전화기를 받아 내 번호를 부여받을 수가 있었다. <애니콜>은 비록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 번호가 생긴다는 것에 만족해하며 다른 친구들의 <애니콜>을 부러워했었던 시절이었다. 그만큼, <애니콜>은 그때당시 나에게는 "Wanna Be"와 같은 존재였었다. 가장 갖고 싶은 사치품이랄까?
어느덧 장성한 나는 회사원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학창 시절 공부에 쏟았던 노력에 비해 '과분한' 회사에서 좋은 기회를 받으며 일을 할 수 있었다.
입사해서부터 급여는 매년 조금씩 올랐고, 급여가 인상될 것을 기대하게 되며 조금 비싸지만 나는 이제 <애니콜>에서 브랜드 네임을 변경한, 갤럭시를 조금은 편하게 살 수 있는 금전적 여유를 갖게 되었다.
사람은 결국 계속 변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 보다.
어릴 적 그토록 갖고 싶던 <애니콜>을, 지금은 언제 어느 때나 구매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지만, 지금의 애니콜 은 내가 어렸을 적 <애니콜>이 아니게 되었다. Wanna Be가 아니라, "Nice to have"가 되고야 말았다.
그 당시 <애니콜>을 갖고 싶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최고'로 비싼 휴대폰을 쓰는 친구들에 대한 부러움, 그리고 쉬이 그 기계를 사줄 수 없었던 가정형편, 실제로 가장 우수했던 통화품질과 기능들. <애니콜>은 나에게 우상이었었다. 꼭 써보고 싶던 핸드폰. 그 자체였다.
하지만 지금은 나에게 <애니콜>과 같은 '우상'은 없다.
컨슈머 카메라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반드시' 써봐야 하는 렌즈나 바디는 없을뿐더러, 애니콜을 계승한 갤럭시도, 그의 카운터파트에 놓여있는 애플도 "반드시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이건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른다. 나의 내면에 있던 결핍이 사라져서 그런 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무언가 반드시 갖고 싶은 게 없다는 건, 그만큼 간절하지 않다는 것이고, 언제든 구매할 수 있다는 여유에서 나온 건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
가끔 아직도 위에 이야기 한 <애니콜>에 대한 친구와 나눈 대화 내용이 생생히 떠오를 때가 있다.
지금은 사라져 버린 나의 우상 <애니콜>,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간 다시 내 앞에 나타나 주길 바란다.
그때는 조금 더 여유 있어진 내가, 그 <애니콜>을 사줄 수 있을 테니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