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죄송합니다. 제가 집에 급한 일이 생겨서... 내일 예정되었던 사진 정모에 나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작년 말 네이버 사진 카페에 가입 후, 첫 정모를 나가기로 신청했다가, 내가 먼저 전날 캔슬을 한 것이었다. 내가 '나쁜 놈'이긴 하지만, 변명을 하자면, 정모 조건에 '하루 전 날이라도 취소 의사'를 밝혀 달라고 했었기에, 정모 전날인 토요일 저녁에 단톡방에서 취소 카톡을 남기고 황급히 '나가기'버튼을 눌렀다. 아울러 이 또한 학습효과로 이전 사람이 그렇게 나가는 것을 살펴본 뒤 단톡방을 빠져나간 것이었다.
나가지 않게 된 이유는 특별히 없다. 해당 카페 정모는 꽤나 괜찮기로 유명해서, '뉴비'들이 정모를 하러 가도 잘 챙겨주는 편이라고 소문이 자자했었고, 보통의 여느 사진 동호회처럼 '장비충' 완장 찬 사람들이 다른 사람 카메라 기종과 렌즈를 보며 '급 나누기'를 하는 행태를 자제하는 글을 항상 강조하던 곳이었기에, 꼭 나가보고 싶었던 정모였었다.
그렇게 정모에 참여하는 것을 아무 의심도 하지 않던 나에게, 정모 전날이 되자, 불현듯 불안감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그 불안감의 원인은 '인간관계'였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 대해, 이 사람과 '언제까지' 친해질 수 있을까? 에 대한 계산이 머릿속에서 팽팽 돌아간다. 그러면서 어디까지 나의 정보를 공개할 것이고, 어느 부분은 숨겨야 할지, 그리고 어떤 말을 해야 할지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취미인 사진 찍기마저도, 다른 사람과 동행하는 게 적잖이 부담이 되었나 보다. 게다가 왜 사진만 찍으면 되지 저녁을 함께 먹어야 한다는 것 인지...
우리 와이프는 나와 대학생 때 처음 만났다.
그때 나의 이미지는 "아미고"였다고 한다. 스무 살 때 영어회화 시간에도, 외국인 강사를 상대로 농담 따먹기를 하고, 처음 보는 사람과도 편하게 말을 하는 것을 보고는, '모두의 친구'인 줄 알았다는 것이다.
연애를 오래 하고, 결혼하면서 와이프는 이제 내가 더 이상 '아미고'가 아니라고 이야기하더라.
예상외로 다른 사람과 만나는 것에 '에너지'를 뺏겨하고, 두려워하는 기질이 있다는 것이다.
나도 지금보다 나이가 어렸을 때에는 좀 더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했던 거 같다.
대학생 때에는 비록 '아싸'였지만 농구하는 형들과 거리낌 없이 친해져 맥주도 자주 마시고, 잘 쫓아다니면서 농구했던 기억도 나고, 고단했던 군 생활도 즐겁게 이어나갔던 기억이 난다.
사회 초년생 시절에도 생판 모르는, 하지만 함께 입사했다는 계기 하나만으로 알게 된 'OO동기모임', 'XX동기회'등의 모임에 자주 나가며 관계를 이어가고 싶어 했어서, '애니콜' 마냥 부르면 항상 나가곤 했던 기억이 난다.
돌이켜보건대, 나의 마지막 모임은 회사 농구동호회 였다. 과거형으로 기술한 점으로 미루어 보듯, 이젠 '과거'가 되었다.
내 인생의 대부분은 '농구'와 엮여있을 정도로 정말 많은 시간 나와 함께 해준 취미였고, 회사 입사해서도 동호회중에 가장 먼저 가입한 곳이 농구동호회였다. 그 당시 내 나이 스물일곱, 매주 토요일이 되면, 6시에 일어나 9시까지 수원의 매탄중학교로 향하여 땀을 흘리던 기억이 난다. 불금을 술로 보내고, 토요일 아침 장거리를 오고 가는 게 부담되었지만, 그냥 좋아하는 사람들과 농구하며 스트레스를 해소하며 다가올 1주일을 견디는 비타민과도 같았다.
시간이 점차 흘러가며 선배들도 나에게 편하게 말을 놓았고 저 먼 곳에서부터 지하철+버스를 타고 회사보다 먼 곳을 오는 나를 대견히 여기며 경기 끝나고 순댓국과 반주를 자주 사 주시곤 하셨다. 몇 년 뒤 들어온 후배들과도 많은 이야기를 하며 술자리도 자주 하며 친하게 지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시간이 점차 흘러 함께 뛰던 선배후배들이 이직 그리고 퇴사, 아울러 결혼등으로 서로의 관심사가 달라져 반가운 얼굴들을 보기 어려워졌고, 그로 인해 내가 알지 못했던 다른 농구 동호회 분들이 그 자리를 채워주시게 되었다. 게다가 나 또한 농구를 하다가 무릎을 다쳐 더 이상 운동을 쉬이 할 수가 없게 되었고, 재활을 마쳤지만 내가 뛰던 농구동호회에는 더 이상 내가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게 되었다.
우연히, 회사에서 시간이 조금 남아 사내 동호회 리스트를 쭉 보며 내가 들어갈 만한 곳을 search 해보게 되었다.
'회사 근처인 잠실 부근일 것'
'운동이나 사진이었으면 좋겠다.'
'동호회 구성원들이 너무 한 부서 사람들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이런 조건을 다 달고나니 검색 결과는 'zero'였다. 내가 내건 조건들이... 너무 빡빡했나 보다...
하지만, 만약에 가입하였다 하더라도 결국 동호회 가입만 해놓고 나가지 않을 내 모습이 상상이 갔다. 쭈뼛쭈뼛 뉴비인데 동호회에 가서 어색하게 인사하고, 친해지기 위해 서로 이야기하고 때로는 재미없는 말에도 웃어주며 장단을 맞춰 준다. 상대방도 예의상 내가 하는 말을 그냥 내 체면상 들어주고 있다...
나는 상상만으로 가슴이 웅장해지며 동호회 가입 신청을 거두게 되었다.
곧바로 문토(?)라는 앱을 설치했다. 해당 앱은 모임 플랫폼 성격의 앱인데, 내가 흥미로워하는 사진 카테고리로 이동해서 모임을 살펴봤으나, 대부분 여자 모델 촬영 위주의 정모가 많았고, 풀떼기를 주로 찍는 나와는 그다지 맞지 않아 보여 곧바로 삭제했다...
앱을 삭제하고, PC에 남아있는 동호회 탭도 끄려고 하는데, 내가 예전 가입했던 동호회 이름이 남아있었다. 물론 그 동호회의 회장부터 수뇌부, 그리고 멤버들은 내가 알던 분들이 아닌 건 알지만, 다시 한번 그 동호회 이름을 눌러보았다.
"Rookies (루키즈)"
이름부터가... 그땐 그랬지, 신입사원들 위주의 그룹이었어서, 이름이 루키즈... 지금은 '틀키즈' 정도 되었으려나? 동호회를 클릭하자마자, 대문사진에 낯선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은 다른 부서에 있는 사람, 지금은 이직한 사람, 지금은 제주도에서 정착해 있는 A형... 나한테 참 잘해주시던 그분. A형이 갑자기 생각났다. 나는 곧바로 A형에게 카톡을 날렸다.
"A형님~~ 동호회 어디 가입할 데 없나 찾다가 루키즈 클릭했더니 형님 얼굴이 있네요ㅎㅎ"
"그립네, 루키즈, 잘 지내지?"
"네네... 동호회 하나 가입하려고 찾는데 저 스스로가 마음의 문이 닫혀 그런가 어디 들어가는 것도 쉽지가 않네요 형님... 루키즈 할 때가 그립다. 노원에서 수원까지도 다녔었는데"
"그렇지.. 이제 나이 들기도 하고 회사생활에 찌들 때도 됐잖아?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으니 그렇게 했겠지.."
"그런 거 같아요..."
"나 역시 그땐 아무것도 모르고 순수한 마음에 시작했고, 마음 맞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 동호회 활동을 했었지. 지금은 그렇게 못해..ㅎㅎ"
"저부터도 마음을 잘 못 열어서인가... 뭔가 새로운 곳에 발을 내딛기가 두렵네요"
"그래. 이젠 그때랑은 시간도 많이 지났고, 상황도, 게다가 마음도 다 다르지"
"맞는 거 같아요 형님"
"딱히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있는데, 그런 관계에 에너지 소모하는 것도 싫잖아"
A형과의 짧은 대화였지만 나는 그 형과 대화하면서 둘의 생각이 비슷하게 전개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결국 동호회 가입은 없던 걸로 하게 되었다. 하지만 또다시 시간 나면 의미 없는 동호회 리스트를 훑어보고 있겠지... 사진소모임 정모도 알아볼 거고. 하지만 위에서 이야기했듯 새로운 인간관계를 가꾸어 나가는 것이 부담되어 쉬이 참석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쩌면 나의 마지막 모임이었던 농구 동호회 루키즈도 그러하고, 그 이전 많은 모임들에 즐겁게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내 마음이 지금보다 더 순수했고, 우리의 마음도 더 순수했었기에 그럴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잘해주면, 남들도 잘해줄 거라는 믿음. 사실 지금은 여러 가지 경험을 통해 그러한 믿음은 깨진 지 오래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청춘 백세라는데... 언젠가 맘 맞는 모임 하나는 한번 더 찾을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