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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담 May 28. 2023

다 해주는 자의 말로

'쟤는 다 해주는 애니까'

"빛담님. 오늘 16시에 추가 요구사항 건에 대해 설명을 드릴 예정입니다."

"어... 이 건은 제가 지금 봐 드릴 수 없을 거 같아요. 저희 슈퍼바이저를 통해 Go or Stop 이야기를 듣고, 그 이후에 봐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필자를 통칭할 때 내 진짜 이름 말고 필명 "빛담"을 사용토록 하겠다. 나의 진짜 이름이 궁금 한 사람은 이전 브런치를 참고해도 좋겠다. (예전 거에 수정은 안 할 거다)


 이번주 목요일, 사전 협의되지 않았던, 우리 팀의 입장에서는 '큰 건'을, 고객사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나에게 설명을 시켜주려 미팅을 잡았고 이를 몇 시간 전에 통보해 주셨다.


 사실, 나는 크게 개의치는 않았으나, 다른 동료들과의 미팅을 통해, '쉽게 들어주지 않겠다'는 대응 방향이 결정되었다. 근데 문제는... 그걸 다른 동료들은 '우리'라고 표현하지만, 내입장에선 '내가' 대응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팀 안에서 결론난 부분을 내가 뒤엎으려면, 그 또한 '우리'가 아닌 '내가' 그 일을 주도적으로 해야 하는데, 그 상황은 당장 계산에 서지 않았다. 아울러, 나에게 추가 업무를 설명해 주는 세션을 잡은 분들 또한, 굳이 지금 'Listen'할 상황이 아닌 사람들에게 신나게 설명해 봤자, '시간낭비' 일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를 먼저 뿌러트리고져 위처럼 단칼에 거절했다.


 사실 그날 매주 레귤러 회의가 있던 차였기에, 위에 신규 업무를 할당한 분들과 온라인 미팅을 하였는데, 저 요건들 말고도, 본인들이 원하는 일들이 많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길고 긴 업무 이야기를 계속 들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게 되었다. 아니, '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이미 많은 걸 진행하는 와중에도, 우리 팀에 또 다른 부하를 얹기 위해 추가 기능 설명회를 갖겠다고 하니, 내입장에서 싫은 티를 일부러 낼 수밖에 없었다.


 회의가 끝나고, 나의 슈퍼바이저로부터 전화가 왔다.

"고객사랑 통화했고, 우리 힘든 거 아는데, '들어만 달래'. 그러고 부담되는 거면 자기도 안 한다고 배 째겠데. 오늘 설명회 들을 수 있겠어?"


 잠깐 동료의 눈빛을 봤는데, 그 동료는 '들을 수 있는 거 아냐?'라는 눈빛을 나에게 보내는 거 같았지만, 나는 반대의 길을 선택했다.


"지금 그 설명회를 가기엔, 그림이 너무 안 맞습니다. 처음부터 받던가 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오늘'은 설명회 참석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 알았어, 내가 그쪽 슈퍼바이저한테 이야기할게"


 거절을 잘 못하는 사람 특징이, '거절'을 하면, 본인이 잘못한 줄 알고 불안해한다. 딱 나다.

내 슈퍼바이저의 메신저를 기다리는 동안 안절부절못했다. 잠시 후, 메시지가 한통 와있었다.


"그쪽도, 이해하겠데, 오늘 설명회는 없는 걸로 마무리했다."

"네네, 중간에서 조율해 주시고, 제 면도 함께 세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냐, 쉽게 해주진 않는 게 맞았던 거 같다. 너도 칼같이 잘 끊었어 잘했어 빛담"


 그다음 날, 왜인지 모르지만, 아침 일찍 눈이 떠졌고, 할 일도 별로 없어 회사로 바로 출근해서, 어제 고객사에서 보내준 '신규 요건 정의서.pdf' 파일을 열어서, 세 번 정독을 하며 각 페이지마다 내가 질문할 리스트를 추려 정리를 시작했다. 시간은 '한 시간' 이면 충분했다...


 그냥 곱게 해 주기 싫었던 거겠지. 돈을 더 주는 것도 아니고, 내가 고과를 더 잘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나이스'하게 내입장에서 더는 공짜로 받아주기 싫었던 모양이었다.


 어찌 되었든 나 또한 어제의 이슈를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해당 업무메일에 회신을 하였다.


"RE:신규 요건 정의서.pdf"

 안녕하세요, 어제는 저희 회의 이후, 요건 분석할 시간과, 제가 하고 있던 업무를 우선 처리하느라, 회의에 참석을 하지 못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저희 팀이 한번 양해를 구한 만큼, 편한 시간에 업무 설명회 미팅 일시를 잡아 '통보' 해주시면 최대한 맞춰 참석토록 하겠습니다.


 결국, 다 해주는 자의 말로는 이러했다. 내부적으로는 '쟤는 다 해주는 애야, 옆에 있으면 개 피곤해'라는 이미지가 있어 좋을 게 없고, 외부적으로는 '쟤는 다 해주는 애야, 그러니까 이것도 해주겠지?'라는 기대감이 있어 항상 부담감을 갖고 일을 할 수밖에 없다.


 뭐 어쩌겠는가, 이 또한 내가 만든 '판' 이거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사람이라는 대 전제가 아직 바뀌지는 않았다. 그리고 내가 업무를 거절해도, '큰 일'이 벌어지지 않는 건 잘 알고 있지만, 가급적이면 '해 주고' 싶다. 그래야 나중에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가 좋으니 말이다.


 그래도, 명분 있는 거절은 앞으로 더 늘려가볼 예정이다. 그래야 나도 살 수 있으니깐 말이다.

친구랑 잠시 도망쳤다. 멀리못가고 사진기 하나 들고 '용산' 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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