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모님이 갑작스럽게 돌아가시고 나서, 그 후 장인어른은 고인과 같이 생활하던 곳은 그대로 두고, 서울 우리 집 같은 단지로 이사를 오셨다. 하시 입주 이면서, 전월세 조건 두 가지를 만족하는 매물이 딱 하나 마침 있던 터라, 큰 고민 하시지 않고 빠르게 결정을 해 주셔 다행히 우리와 가까운 곳에서 생활을 하실 수 있게 되었다.
장모님 부고 이후 우리 와이프는 새벽같이 일어나 장인어른 아침도 해드리고, 저녁에 와서도 저녁밥을 차려 드리는 일을 도맡아 해내고 있다. 나 또한 저녁을 대부분 회사에서 먹고 가거나, 바깥에서 사 먹어 집에서 먹을 일이 잘 없지만, 장인어른 인사드릴 겸, 주중에 1회 이상은 집에 찾아가 인사드리고 함께 식사를 하곤 하는데, 와이프는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른다. 두 집에서 식사를 하게 되면 그만큼 준비하는 게 까다로워지는데, 한 곳에서 먹게 되면 그런 수고를 덜 수 있어 좋다고 말이다. 여하튼, 와이프를 비롯한 우리 가족의 삶도 조금 바뀌긴 했지만 그럭저럭 자리를 잡아가며 슬픔을 함께 이겨내 나가고 있는 듯하다.
아울러, 처형네도 청주에서 서울로 매주 주말마다 올라와 장인어른과 함께 지내고 있다. 사실 그러면서 요새 내가 말 못 할 고민에 처해 와이프랑도 고민상담(?)을 할 정도로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다.
결혼생활 초기에는 '내'가 느끼는 처형에 대한 특별한 기억은 없다. 나랑 부딪힐 일도 없었고, 교류도 별로 없었다. 아이들도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서, 내가 함께 사는 장모님을 모시고 함께 청주에 가서 신세 지는 날도 있었고 크게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문제는 우리가 장모님 댁으로부터 독립해서 나온 약 7년 전부터, 내 감정이 미묘해지기 시작했던 거 같다.
우리 가족이 얹혀살던 때야, 처형네가 오더라도 내 목소리를 낼 수 없었지만 독립해 나왔음에도, 장모님 댁까지 가기가 멀어 서울인 '우리 집'에서 롱텀으로 머무는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와이프를 통해 전해 들은 바로는 작은 돈이지만 식비 같은 것도 받고 있다고 했지만, 나는 집에 돌아오는 순간 작은 공간이 한 곳이라도 있어야 에너지를 보충할 수가 있는데, 우리 아이들과 처형네 아이들이 모두 이 비좁은 집에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고 어지럽히는 부분에서 나는 너무나도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
하루나 이틀, 이 정도였으면 어떻게든 가면을 쓰고 참아보겠건만, 4일 이상 오래 머무시는 일이 많아지면서, 급기야는 퇴근을 일부러 안 하고 회사에서 오래 머물다가 열 시 다되어서야 집에 들어가 씻고 잠만 자는 경우도 많아지기 시작했다. 결국 견디다 못해 장모님께 어려움을 용기 내어 말씀드렸지만, 그것이 처형에게 장모님께서 나를 생각하신 괘씸한 감정이 더해저 전달되어 결국 내가 '가해자'처럼 되어 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아니, 친척이 좀 집에 가서 머물 수도 있지' 이런 식으로 내가 원치 않던 결말로 치닫으면서, 나는 점점 처형네와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했을 때에는 나에게 미안해하며 불편하신 줄 몰랐다는 이야기를 하셨으면 참 좋았을 텐데, 지나고 나서 생각해 봐도 일이 잘 마무리되지 못해 아쉬울 뿐이다.
그렇게 '나'를 뺀 다른 가족들끼리의 교류는 계속 이어졌다. 아이들끼리도 즐겁게 잘 지내곤 했지만, 나는 여전히 마음의 문을 닫고 있었다. 하지만 3월, 장모님의 부고 이후 상황이 바뀔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매주 처형네를 만나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었다.
문제는, '일요일' 만큼은 내가 아빠로서 아이들과 온전히 하루를 보내는 유일한 날이지만, 이렇게 환경이 바뀌어 버리면서 '내가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일요일이 많아진다는 점이다. 아이들이 장인어른댁과 우리 집 두 곳을 오가며 자기네들끼리 즐겁게 논다. 하지만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졌다. 그렇다고 매주 교외 커피숖으로 운전기사 역을 수행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맘 놓고 카메라 들고나가 사진을 찍을 수도 없다. 집에 있기는 해야 하는데, 할 게 없어 내가 내 집에서도 '눈치'를 보게 되는 상황을 마주하게 된 것이었다.
일요일만큼은, 아이들과 외식도 하고 같이 공부도 하고 책도 사러 나가고 하며 한 주 동안 쌓인 피로를 조금 풀며 다음 주를 준비하는 시간으로 활용하고 있었는데, 처형네 아이들과 계속 놀면서 그 플랜들은 이제 실행할 수가 없게 되었다.. 나는 뭘 해줘야 하지.
"여보, 나 처형네 오면서... 일요일 내가 집에 있어야 할 이유를 잃었어. 그냥 나 이럴 거면 촬영 나가는 게 속 편할 거 같아"
"많이 힘들지? 그래도, 계속 매주 오시진 않을 거야. 예전처럼 이야기해서 서로 감정 상하진 말고, 조금만 더 버텨보자"
나는 이번엔 그 말을 듣기로 하였다. 처형네도 우리 가족 보러 오는 것이 아니고, 나름 큰 결심을 갖고 본인의 아버지를 위해 오는 거 아니겠는가. 언젠가 방문이 소원해지면, 자연스레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으리라 희망고문을 오늘도 하고 있다.
'섞이고 싶지 않을 때, 섞이지 않았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