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 우리 부모님 모두
"엄마, 그래서 칠순 축하 식사가 언제라고요?"
"응, 7월 2일이야"
"일요일이네..? 알았어..."
필자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나이가 같으시다. 조금 귀여울 수도 있는데, 주민등록 상 어머니가 한 살 더 많으시다. 연상연하 커플이라니... 우리 아버지는 그런 귀여움과는 거리가 매우 먼 분이시라 생각할 때마다 웃음이 나곤 한다. 어찌 되었든 부모님의 칠순 식사가 7월로 예정이 되어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 기억으로는 8살 정도 되는 거 같다. 집에는 VTR이 하나 있었고(비디오 플레이어), 나름 아버지께서 그 당시 얼리어덥터라 TV + VTR겸용으로 집에 거실에 들여놓으셨었고,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시느라 나는 그 어린 나이에 집에 돌아와 TV 보기 바빴다. 그 당시 호기심이 왕성했던 필자는, 사실 아버지가 보시던 전쟁영화도 훔쳐보고, 기타 성인 영화도 별다른 제약 없이 시청을 할 수가 있었다.
그중에는, 외할머니 환갑잔치 비디오도 있었는데, 자주 시청했던 생각이 나곤 한다.
사실 내가 그 당시 나이가 4살이었는데, 아직도 그때 기억이 가물가물하게 나는거 같다. 왜냐하면, 어릴 적 필자는 콜라와 사이다를 너무 좋아해서 장이 안 좋아질 때까지 과음(?)을 하다 보니, 화장실을 많이 들락날락했던 기억이 아직도 날 정도이기 때문이었다.
해당 영상에는 지금은 고인이 되신 외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가족 친지 친구분들을 모시고 덩실덩실 춤을 추는 영상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왜 저렇게 기분이 좋으실까?' 하는 궁금증도 있었다. 배경음악으로는 촌스러운 화음 수준의 트로트가 깔려 나오고 있었고, 2023년 기준으로, 지금은 모두 그때 비디오에 나오던 할아버지 할머니보다 나이가 들어버린 외삼촌 이모등 자식들이 덩실덩실 즐거이 춤을 추고 계셨었다. 나의 어렸을 적 환갑 혹은 칠순 잔치는 그런 것이었다.
세월이 흘러, 점점 나를 아껴주시던 어른들은 떠나가기 시작하셨다. 친할아버지, 외할머니 및 외할아버지, 그리고 작은할아버지와 작은 할머니까지. 이제 남은 어르신이라고는 친할머니와 아버지 및 어머니, 그리고 그 동기간들만 남아 계셨다. 그 와중에도 이미 어머니의 동기간은 곧 팔순을 바라보는 큰 이모가 계시니, 새삼 시간이 많이 흘렀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어려서 '형형' 하면서 곧잘 따르던 큰 외삼촌의 아들인 사촌형은 벌써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시라니...
나도 어려서부터 봐온 것처럼, 우리 부모님의 칠순 잔치를 꼭 해드리고 싶었었다. 하지만, 집안 가정사의 약간의 문제로 내가 어떻게 주도적으로 이 일을 이끌고 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나는 그저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있을 찰나, 어머니가 전화를 주셔서 날짜와 장소를 정해주신 것이었다.
"어머니, 제가 돈을 좀 드려야겠지요?"
"에이... 안 줘도 돼, 너도 어려울 텐데"
사실 어렵진 않지만, 그렇다고 여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부모님 칠순 식사에 내가 도움이 안 되면 서운할 거 같았다.
"그러지 말고, 제가 뭘 해드리면 될까요?"
"음.. 그러면, 네가 식사 자리 식대를 부담할 수 있겠니? 부담되면 안 해도 되고"
"어머니, 그거 뭐 어렵다고.. 내가할꼐요"
"그래, 아들 고맙구나"
그렇게 부모님의 칠순 식사 자리에서 내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것에 너무나도 감사할 따름이었다. 사실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환갑이든 칠순이든 우리 어머니 아버지 덩실덩실 춤추는 걸 꼭 담아드리고 싶었었는데... 부모님은 자신의 세대 때 부터는 예전처럼 자식들을 많이 낳으신 것도 아니고, 하나 아니면 둘밖에 낳지 않으셔서 부모세대를 부양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는 걸 너무 잘 알고 계신 듯하다. 행여 자식들 부담될까 봐 본인들 아프신 것도 말도 잘 안 하시더라. 이런 저런 여의치 않은 사정 때문에, 내가 주도해서 잔치를 해드리진 못해 죄송할 따름이었다.
식사 자리 하루 전 까지도, 나와 와이프는 둘 다 각자 일을 했다. 아이들은 장인어른을 보필하러 와 주신 처형네에서 케어해 주셨고, 그 덕에 우리는 각자 예식장과 도서관에서 외화 벌이를 할 수 있었다. 각자 퇴근 후 서둘러 짐을 싸고, 친할머니댁으로 향하였다. 충청도에 집이 있어서 서울에서 두 시간 조금 넘게 가면 도착할 수 있었다. 너무 오랜만에 뵌 할머니의 모습은 많이 야위고 수척해진 모습이셨다. 게다가 미세 치매 증상도 가지고 계신 모습을 직접 보니, 손자된 사람으로서 그저 너무 안타까울 뿐이었다.
다음 날 아침, 부모님도 할머니댁에 도착하시어 우리는 모두 다 만날 수가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 칠순 식사 자리는 어머니의 동기 형제들이 주축이 되어 마련이 된 자리라, 할머니와 우리는 일정에 맞추어 정해진 시간과 장소로 이동을 해야 했었다. 떠나기 전, 그래도 명색이 상업 작가인데, 언제 또 뵐지도 모르는 할머니께 한번 말씀드려보았다.
"할머니, 제가 사진을 좀 담아 드리려고 하는데 괜찮으실까요?"
"어 그래? 잠깐만"
할머니는... 기다리셨다는 듯 머리를 감으시고, 옷매무새를 정리하시고 내가 미리 세팅해 놓은 의자에 자연스레 포즈를 잡으셨다. 안 여쭤 봤으면 어쩔뻔했어...
"자 할머니 찍어요, 하나둘셋 촤라라라"
경쾌한 셔터음이 춤을 추며, 곱디고운 할머니의 모습을 담아내었다. 그리고는 나머지 가족들에게 디렉션하여 할머니와 함께 사진을 담을 수가 있었다. 이렇게 라도, 내가 직접 할머니의 건강할 때 모습을 담아 드릴 수 있어 얼마나... 뿌듯했는지 잘 모르겠다.
마지막으로는 카메라에 셀카모드를 활용해서, 5초 후에 셔터가 눌리도록 지정후, 나도 들어가 함께 사진을 찍었다. 보통 같으면 내가 누군가를 담고 끝날 텐데, 나도 본능적으로 건강할 때의 할머니와 우리 가족들과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다는 걸 알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차로 약 30분 거리를 이동한 끝에 부모님의 칠순 식사가 시작되었고, 다들 즐겁고 기쁘게 자리를 참석하시어 식사를 마치셨다. 식사 말미에는, 어머니의 동기 형제들이 돈을 모아 마련해 준 '금 목걸이' 수여식을 거행하셨다. 형제들 중 리더 역할을 하시는 큰외삼촌께서, 축하의 인사를 건넨 뒤, 아버지께 금 목걸이를 주셨고, 아버지가 평소에는 하지 않으시던 스위트함을 발휘하여 어머님께 목걸이를 직접 달아 주셨다. 요 근래, 어머니와 아버지가 그렇게 행복한 표정을 짓는 건... 처음 본 거 같다.
식사는 내가 계산했다. 얼마 나온 건 아니지만, 나중에 필자의 형이 절반을 내려고 했다는 걸 어머님께 들었다. 굳이 뭐 하러... 내가 해결해도 되는 부분이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것보다, 돈을 더 드리려고 했는데 그냥 식대만 계산해 주면 된다고 하시던 어머님의 전화 너머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맴돌 뿐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헤어지기 전, 사진을 찍을 곳을 물색했지만, 식당 안은 좁았고, 식당 밖은 더웠다. 어쩔 수 없이 식당 바로 앞 그늘에 계단에 줄을 내가 세운 뒤, 퀵하게 단체사진을 담아드렸다. 내가 못 나온 건 아쉽긴 하지만, 다수의 어른들이 더위에 짜증을 내며 빨리 찍으라는 무언의 압박을 하시는 바람에... 그래도 사진을 담아 드릴 수 있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어머니 아버지, 저희는 이제 올라갈게요"
"그래라, 여기까지 와서 고생 많았다."
"아녀요, 더 좋은 데로 모셨어야 했는데... 돼지고기 집이라니"
"돼지고기가 젤 좋아. 아빠는 소고기 보다 돼지파야. 너도 그렇잖아"
'아빠... 저는 돈만 많으면 전 소고기예요 사실.. 뭐 돼지고기를 좋아하긴 하죠'
그렇게 작별인사를 마치고, 이 자리를 위해 귀한 시간 내주신 어른들께 일일이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내가 여덟 살 때 봤던 우리 외할머니의 환갑잔치에서의 유쾌함을, 이제 칠순이 되신 우리 부모님의 식사자리에서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한정된 공간에, 정해진 사람들만 오셔서 이 자리를 빛내 주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의 칠순 때 많은 친지분들과 건강하게 식사를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없는 살림에도 자식 기죽이지 않겠다며 억척같이 일만 하시던 어머니의 날카로웠던 눈빛이, 세월이 지나 본인에게 부여된 거의 모든 숙제를 해결해 냈다는 안도감으로 손녀딸들을 한없이 맑은 눈빛으로 바라보시는 그 모습을 잊지 못할 것 같다.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어른들, 모두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모두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