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그렇게 답하지도 않을 것이다.
"귀하는 '자살'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회사에 입사한 이래, 2년마다 한 번씩 지정병원으로 가서 건강검진을 받게 되는데, 이때마다 심리 상태를 체크한다며 컴퓨터 앞에 앉아 설문을 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꼭 빠지지 않고 나오는 질문이다.
"안녕하세요, 빛담님? 심장스캔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저는 다음 주 월요일 건강검진을 하러 가기로 하였는데, 뭐 빠트린 거라도 있나요?"
"아... 저희 예약 sheet에는 다음 주 월요일이 아니라 '오늘'로 나오는데요^^;"
"어머, 죄송합니다. 다음 주 월요일로 미뤄주시겠어요?"
바쁘진 않은데, 정신을 놓고 다니는 요 근래 나의 상태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대화라 할 수 있겠다. 어찌 되었건 검진 당일도 내가 가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예약 담당자에게 내가 잘못 알고 있다는 걸 알게 된 다음에서야 정신이 버쩍 든 거 같다.
검진 당일, 줄 서는 걸 무지하게 싫어하는 나답게,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 부리나케 병원으로 향했다. 역시 일찍 도착하면 사람이 없어 금방금방 검진을 받을 수 있었다. 이윽고 심리검사 시간.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모니터를 주시한 채 마우스로 1번부터 5번 항목까지 빠르게 선택을 하면서 넘어갔다.
"귀하는 '자살'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음, 나는 이번에 처음 알게 된 건데, 다른 사람들은 생각해 본 적 없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는 걸 이제 알게 되었다.
나는 중학생 때부터 인생이 힘들면... 내려놓고 싶다는 어렴풋한 생각을 갖게 되었었는데...
이상하게 이 날따라, 다 '보통'으로 선택하거나 '그렇지 않음' 등으로 선택할 텐데, '그렇다' 등으로 선택을 많이 하게 되었다. 실제로는 현재 내 상태가 그 정도로 심각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데 말이다. 무언가 홀린 듯 빠르게 체크하고 결과를 submit 했다.
"여보, 일어나. 정신과 가자."
"아이 안가... 나 괜찮다니까"
"아냐 여보 가야 돼. 정신과 상담을 요하다고 여기 검진결과에 쓰여있잖아"
"아냐 아냐 이거 그렇게 적은 거 아니야"
"여보 나는 엄마도 잃었어. 여보까지 잃을 수 없어. 빨리 가자"
와이프는 사실 내 택배를 까보거나 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내가 무얼사건 관심이 없는 사람인데, 유일하게 내 허락 없이 언패킹 하는 게 있으니, 바로 건강검진 결과이다. (회사로 보낼걸 그랬다..) 거기서 내가 위에 홀린 듯 체크했던 문항들이. 나에게 부메랑이 되어 정신과 진료를 권장하는 검진 결과로 적혀 배송이 된 것이었다.
사실 와이프는 그럴 만두 할 것이, 올해 본인의 어머니를 잃은 아주 큰일을 겪었다. 말도 못 할 스트레스로, 힘들어했기에, 이렇게 나온 나의 검진결과에 상당히 심각성을 느꼈었나 보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정신과를 간다고 '내가 달라질 게 있나' 하는 생각만 가득 차있었다.
2년 전 회사에서 나에겐 잊지 못할 아픈 기억에, 스스로 이겨낼 수 없겠다 생각하여 사내 상담센터에서 주기적으로 면담을 하며 '임금님 귀는 당나귀귀'를 한 기억은 있으나, 이 프로그램을 진행 한 뒤 나의 결론은 '그럼에도 인생은 힘들다' 였었다.
도움은 되었으나, 내가 이겨나가야 하는 세상이라는 것을 느꼈었다. 그래서 정신과를 간다고 크게 달라질 건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간곡히 요청을 하니.. 집 앞에 와이프가 주기적으로 다니고 있는 병원을 찾아 쭈뼛쭈뼛 원장샘을 뵈러 들어갔다.
원장선생님에게, 와이프는 내가 '자살 사고'를 가지고 있다며, 건강검진 결과가 적힌 sheet를 가져와 보여주며 상담해 줄 것을 요청했고, 그 말과 함께 그녀는 퇴장했다. 이윽고 나와 원장선생님의 독대 시간.
"(자살) 생각은 언제부터 했었습니까?"
"어... 중학생 때요?"
"음, 굉장히 빨리하셨었네요?"
"네, 뭐 별건 아니고, 삶이 고달플 때, 그냥 끝내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되었었습니다"
이와 관련된 몇 가지 이야기를 물어보고, 나에게 '스트레스 해소 약' 처방을 권하기도 하였으나, 내가 거절했다. 꾸준히 약을 먹어야 한다는데, 내가 여기기에 별로 필요 없다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취미가 있냐고도 물어보셨는데, 사진을 찍으며 이게 또 부업으로 연결되어 즐겁게 살고 있다고 하였다.
원장선생님은 나를 이리저리 보시면서, '긴장감'이 너무 높은 상태고, 삶의 여유가 없어보인다고 평가 하셨다. 이어서 긴장완화를 위해 스트레스 해소와 스트레칭등을 조언하신 뒤, 대화가 종료되었다.
"봐, 멀쩡하데, 괜찮데 약 안 먹어도"
"본인이 안 먹는다고 하니까 의사 선생님도 약을 못주는 거지... 약 먹지 그러니"
"아직 괜찮아. 나 여보 말한 데로 의사 선생님 보고 왔다? 그렇지?"
와이프도 그 이후로는 조금은 안심이 되었나 보다. 다행히 그 뒤로는 병원 가보라고 닦달(?) 하지 않게 되었다.
"어이구, 우리 여보 사랑해. 안아주자"
"여 여보, 갑자기 왜 이래?"
"내가 더 많이 사랑해 줘야겠어"
와이프가 정신과 원장선생님을 만나고 왔다고 한다. 그러더니 나에 대해 이것저것 점쟁이 마냥 풀어놓더란다. 특히 그중에 중학생 때부터 자살사고를 한 경우는 극히 드물고, 어려서 많은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자랐을 가능성이 크다고, 더 많이 사랑해 주라고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아울러 대화도중, 자신의 감정을 숨기기 위한 Defense가 강하여, 회사에서도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일을 할 가능성이 있으니, 스트레스 해소에 주안을 두고 생활해야 한다고도 했단다.
마지막 거는 조금 소름 돋았는데, 취미로 시작한 사업을 돈벌이로 연결시키는 거를 들으시고는, 내가 가족 구성원들에게 보이고 싶은 정체성은, '경제력'이 있는 가장으로 보이고 싶고, 그것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고 이야기를 했다는데, 원장쌤 이분, 점쟁인가 싶었다.
나는 어려서 부터 청개구리 심보가 있다 보니,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 반면교사들이 상당히 많다. 어려서 내가 봐온 가장의 모습을 닮지 않으려 노력을 해야지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듣고 보니 드는 생각이었다.
이 글의 제목과 같이, "나는 그런 선택을 할 일이 없다"
다만, 나는 인생이 즐겁기보다는 '고달프다'라고 인식은 하고 있으며, 조금 더 편안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을 뿐이었다.
정신과 원장선생님을 만나고 난 뒤,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쉬는 시간마다 틈틈이 휴게실에서 스트레칭을 해준다. 긴장완화를 하기 위해 사우나도 자주 가라고 하던데, 집 주변 찜질방을 아직 못 뚫어서 그건 못하고 있는 중이다. (조만간 뚫어서 주기적으로 갈 거다.)
우리 와이프가 그렇게 구슬프게 나를 걱정한 적이 별로 없는데... 진짜 걱정이 많이 되었었나 보다. 그래서 나를 걱정해 줘서 고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앞으로는, 남들 걱정 안 시키게 스스로의 회복탄력성도 더 증가시키고, 긴장완화를 위해 노력해 나가야 오래오래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올해 건강검진의 에피소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