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좋을 수가 있나
"빛담님, 혹시 방금 콘퍼런스 콜 간 말씀 드린 사항이요, 오늘 저녁에 긴급히 반영은 안 될까요?"
(손으로 X를 저으며) "저 집에 가야 돼요 프로님"
(마찬가지로 양손으로 X를 만들며) "해줄 필요 없어, 우리 귀책 아니야"
"아.. 하하, 네 죄송하지만 오늘은 더 못 해 드릴 거 같습니다."
매해 10월 말이면, 고객사는 자신들이 1년간 이뤄낸 성과를 어떻게든 뽐내는 시간이다. 개발조직이라면 무언가 의미 있는 개발거리를 포장하여 발표를 해야 할 것이고, 기획파트라면 유저 친화적인 사이트 개편등을 통해 각자가 "I'm still alive"를 외치며, 그들의 조직이 건재함을 알리고, 존재의 이유를 피력하는 시즌인 것이다.
올해도 어김이 없었다. 사실 협력사 주제인 내가 생각 컨데, 분명 올 상반기 꽤 의미 있고 임팩트 있는 프로덕트를 만들어 냈고 그걸로 상사들한테 많은 칭찬을 전해 들은 걸로 알고 있는데, 하반기까지 너무 욕심을 부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었다.
즉, 기획을 하는 파트에서는 "정체되어 있는 사이트"라는 현재 프로덕트 페이지의 인식을 개선코져 대대적인 사이트 개편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설득해야 할 다른 팀 동료들과 상사들을 완벽히 설득하지 못한 듯해 보였고, 우리 팀은 그 부분에 대해 많은 우려를 표했던 바가 있다. 지금 사이트가 다소 정적으로 보일지는 몰라도, '정보 전달' 측면에서는 뭐 하나 빠질 거 없이 잘 전달하고 있던 터라 새로운 콘셉트의 데이터 표기방식이, 과연 크게 의미가 있을까...? 하는 사용성에 대한 우려였었다.
아울러, 기획파트에서 그들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개발 부서와 협업을 진행했어야 하나, 그 부분마저 원활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들은 우리 팀보고 '같은 개발자' 이까 좀 이야기해보라고 나섰지만, 내가 나선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없었다. 개발팀은 개발팀의 Goal이 있었으며, 그것은 기획팀의 Goal과는 무관했던 것이 문제였다.
우리 팀은 문제가 없었는가? 팀원들은 문제가 없으나, '내가' 문제였다. 이미 기획팀으로부터 추가 요건을 할당받아 그것을 오롯이 내가 Dedicated로 개발하며 Follow Up을 하는 상황에 더해, 수시로 변경되는 요구사항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UI디펙들에 팀원들은 점점 지쳐만 갔다. 그것들을 쳐내면서 하반기 제일 중요한 Goal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어야 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이번주 금요일,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배포를 수행하였으나, 결국 고객들은 그들의 상사로부터 싫은 소리 한 바가지를 들었나 보다. '왜 잘되고 있는 사이트를 뜯어고쳤냐' '지금 서버에서 계속 에러가 나는데 원래 이런 게 맞냐' '검증계에서 확인도 안 해보고 올린 거냐' '개편된 사이트에서 표기되는 정보가 너무 적다. 원래대로 돌려놔라' 등등, 이 바닥은 내 표현방식으로는 '순한 군대'라고 부른다. 모두가 합리적이고, NiceFul 해 보이고, 멋져 보이길 원하지만, 결국 '결정권자'의 한마디면 모든 게 끝이 나버리는, 그런 곳이란 말이다.
결국 기획파트의 고객들은, 상사로부터 좋은 소리를 못 듣게 된 모양이다. 사실 나도 보호를 해주고 싶었지만, 페이지 개편방향에 대해 그다지 공감이 되지 않았다. 그들이 정말 원하는 게, '사용성 개편' 인 것인지, '우리는 정체되어 있지 않아'라는 메시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인지, 나는 후자라고 조심스레 생각한다.
오후까지 줄기차게 이어진 UI수정들, 우리 팀도 지칠 대로 지쳐버렸다. 정말 작은 부분들 하나하나 다 수정요청을 하였고, 우선은 그들의 요청에 맞춰 수정을 해주고 있었으나, 오후 콘퍼런스 콜에서 이야기 나온 내용을 살펴보고는 해당 개편방향에 대한 '대전제'가 흔들리고야 말았다.
앞서 말한 상사가 본인의 팀에 피드백준 내용을 이야기하는데, 상당히 절망감을 느꼈다. '그들의 상사한테도 컨펌받지 못한 일을, 이렇게 벌린 거라고...?'라는 생각이 들며, 도대체 왜 이런 일들이 발생된 건지에 대한 히스토리를 생각해 내기 시작했다.
(기획) 리뉴얼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있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개발) 저희는 '최소한'의 지원만 해드립니다. 저희도 바쁘거든요
(우리)??? 개발데이터도 없고, 화면 완성 납기도 너무 짧은데요...
(기획) 그래도 해야 합니다.
(개발) 저희는 바빠서 이만
(우리)...
기획고객들은, 오후 콘퍼런스 콜간, 위에 상사의 피드백을 ASAP으로 반영을 해야 한다고 나에게 이야기를 하였다. 사실 나는 해주고 싶었다. 고객이 잘되야 나도 잘되지 라는 생각이 컸지만, 그건 온전히 '내' 생각일 뿐, 나 또한 동료들을 설득하여 추가 야근에 대한 명분을 확보해야 하는데, 그것이 없는 게 문제였다.
우리 팀원들은 하달받은 오더 이상으로 잘 사이트를 만들어냈다. 오류도 없고 기능에 문제도 없었다. 하지만 고객사에서 자신들의 추가 요건을 '오늘 당장' 해 내야 한다는 이야기를 가지고, 그들에게 무슨 근거로 설득을 하겠는가. 디펙에 대하 처리가 아닌, 이 건들은 엄밀히 '신규 요건'에 대한 내용들임에 틀림없었다.
하릴없이 완강히 거절했다. 두어 차례 메신저로도 요청했으나 계속 거절했다. 다음 주부터 퀵하게 하겠다고 했다. 그제야 그들은 포기했다..
"모두 고생하셨어요, 오늘 배포는 여기서 마치고, 저희 다음 주 월요일 뵈어요"
우리 팀원들이 있는 메신저에 '배포 쫑' 메시지를 치자, 댓글도 안 달린 채 이모티콘으로 하트, 좋아요 등이 내 메시지에 달리기 시작했다... 저 분위기에 강제 야근 시켰으면 다들 파업하셨을 것이 확실하다고 느꼈다.
메신저에 우리 팀원들은 모두 불이 꺼졌다. 고객사분들은 아직도 이슈 논의를 계속하는지 불이 켜있었다.
나는 집에 갈 수 없었다. 월요일 오전 팀원들 대상 미팅을 잡아놨는데, 자료 없이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조금이나마 고객들과 함께 하고 싶었다.
올림픽 공원 사진여행기 (brunch.co.kr) 이 글을 쓴 지가 벌써 2년이 되었다. 브런치 초창기 글이라 더 산뜻하고 즐거움이 가득한 글인 거 같다.
그때도 이와 비슷했던 경험을 기술하였었는데, 그 당시는 '해피엔딩'이었다. 고객사로부터 더 이상 수정해 줄 게 없다는 피드백을 받았고, 나는 정말 온 세상을 가진 것처럼 자신 있게 퇴근했던 기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번에는 그렇게 끝나진 못해 아쉽다. 노력한 것에 비해 좋은 프로덕트가 나오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렇지만 언제나 좋은 결말만 받아들일 수는 없다. 나를 비롯한 고객사 동료들도, 이번 결과에 대해 스스로 곱씹어 보고, 향후 실패를 줄일 수 있는 방안에 대해 모색이 필요한 시점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