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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담 Nov 23. 2024

누구를 위한 행위일까?

가혹행위

 며칠 전, 필자가 즐겨보는 프로농구 뉴스 중, 과연 지금이 21세기가 맞는지 의문이 들만한 충격적인 기사를 접하게 되었다. 

 뉴스의 대략적인 내용으로는, 어느 프로 농구팀을 지휘하는 감독이, 2 쿼터 하프타임 작전시간에 락커룸에 들어가 본인이 작전을 수행하라고 선수가 이행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보드마카를 집어던지고, 물에 젖은 수건으로 얼굴을 폭행하고 심한 욕설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모든 동료 선수들과 관계자들이 보는 와중에 심한 가혹행위를 당한 해당 선수는 결국 팀을 이탈하였고, 본인이 고용한 변호사를 통해 법적으로 소를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해당 감독 또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그 선수의 집에도 찾아가 보기도 하고 연락도 취해봤지만, 결국 그 선수의 마음은 굳게 닫혀있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한국 프로농구에서도 자체 감사를 하여 필요시 해당감독에 대해 징계를 내릴 수도 있다는 기사가 점차 나오기 시작했고, 결국 그 감독은 자진 사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참 안타까운 기사였다. 필자가 우리나라 농구에 대한 히스토리를 잘 아는 편에 속한다고 생각하는데, 가혹행위를 받은 그 선수는, 자기 발로, 본인이 은사라고 생각한 해당 감독에게 직접 '찾아가' 좀 더 배우고, 자신이 성장할 수 있길 바란다는 인터뷰도 했었던 선수였어서, 정말로 그 감독을 잘 따르고 있었던 걸로 나는 알고 있었다.


 아마도, 그 감독은 이런 가혹행위를 처음으로 했을 리 만무하다. 사람의 사고방식이, 이미 상대방을 내가 위압적인 행동을 통해 변화시킬 수 있다고 굳게 믿지 않는다면, 이런 행동을 할리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과연, 그 감독의 가혹행위는, 누구를 위한 행위였을까?


 여기서, 내가 받았던 가혹행위 경험을 몇 가지만 이 글에 함께 담아보려고 한다.

 필자는  단기장교(ROTC)로서 임관하기 위해, 대학교 1, 2학년 때 학점관리 및 체력장을 함께 준비했던 경험이 있다. 캠퍼스에서 내가 바라본 학군장교 후보생들은 모두 의젓하고, 멋진 행동과 절도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었고, 나 또한 저 집단의 일원으로서 소속될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기대 어린 동경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내가 원하던 조직에 첫 발을 내디딘 대학교 2학년 겨울방학의 어느 날, 나는 앞서 이야기했던 멋진 행동과 절도 있는 모습이 우월하고 엘리트화 된 조직에 속해있다는 자부심에서 나온 것이 아닌, 선배들의 얼차려와 구 시대적인 가혹행위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남들에게 보여줘야만 하는 연출된 멋진 행동과 절도 있는 모습'이라는 것을 금방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대학교  3학년 시절, 우리들은 언제나 같은 시간에 어두컴컴한 각자의 관물대에 모여 얼차려와 기합을 받았다. 특히 겨울이 되면, 스팀형 라디에이터가 뿜어져 나오면서 온몸이 땀으로 덮였었는데, 선배들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군인이 되기 위한 엘리트과정'이라는 식으로 수 시간 동안 얼차려를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특히, 동기들 중에서도 체력이 가장 약했던 나에게는, 매주 두 번 있는 태권도 수업 전 달리기 세션에서 더욱 특별히(?) 관리하며 나를 동기들 사이에서 체력이 약한 아이로 낙인을 찍어버렸다. (물론 인정하긴 싫지만 사실 그렇긴 했었다.)


 그뿐만은 아니다. 군인정신을 배양한다는 명목하에, 문자메시지를 수신하면 반드시 3분 안에 회신을 해야 하는 룰도 있었다. 거기다 더해 학교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을 때도, 편하게 먹어본 적이 없다. 선배라는 사람들이 식당에 들어오면 밥을 먹다가도 반드시 선배를 찾아가 인사를 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필자는 아직도 회사에서 가장 메신져 반응속도가 빠른 사람 중에 한 명으로 뽑힌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나 또한 선배가 되었다. 스스로 그 당시를 돌아보면, 나라고 후배들에게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게 있다는 명목하에 몇 마디 엄한 말을 건넸던 적은 있는 거 같다. 거기까지 였었다. 

 내가 후배들에게 가혹행위 등을 할 권한도 없었고,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이 바뀔 거라는 생각은 1도 해본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가혹행위를 당해본 결과 나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야전으로 향해 소대장이 되었다. 나의 전임 소대장은 상당히 권위적인 사람이었다. 누군가 위에 군림해야 되고, 자신의 말을 다 들어야만 하게끔 만드는 리더십이 매우 중요하다고 이야기를 항상 해오곤 했다. 그의 논리는 내가 대학교 3학년 때 얼차려를 받을 때 가스라이팅 당했던 선배들의 말고 묘하게 닮아있었다.


 앞서 이야기를 조금만 더 결론 지어보면, 나는 전임자와는 같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와 다르게 행동할 수 밖에는 없었다.


 비록 전임자보다 축구를 못한다 할지라도, 내 사비를 털어서라도 음료수를 항상 축구할 때는 마련해 갔고, 

 비록 전임자보다 카리스마가 떨어진다 할지라도, 나는 대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하여 바꾸려 노력했다.

  

 자신만의 작은 시도들이 모이다 보면, 그만의 행동방식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사람을 따르게 하는 것에는 정해진 규칙과 정답이 없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지나, 필자도 군생활에서 여유가 생겼을 무렵, 당번병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이전엔 전임 소대장이 폭언과 욕설을 언제나 달고 살아서 무거운 중압감속에서 군생활을 해야 했는데, 지금은 그런 부분이 없어 조금 더 생활관에서 병사들끼리 웃음이 많아졌다는 이야기를 해주었었다. 

 대신 업무나 훈련관련되어서는 필자가 디테일한 부분이 있어 업무 및 훈련강도가 전임자보다 높아졌다는 이야기도 함께 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내 전임 소대장도, 내가 3학년때의 4학년 후보생들도 앞서 이야기한 가혹행위를 한 감독과 같은 생각이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바로, "내가 다른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착각"말이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어느덧 나는 마흔의 초입에 접어들었다. 

 필자는 현재 아이를 키우며 부모로서 어떻게 하면 아이를 올바르게 훈육하고 변화시킬 수 있을지 고민을 하는 편이다. 

 사실, 반성해야 하는 부분이지만, 아이들이 더 어렸을 때에는 큰소리로 화를 냈던 경험이 좀 많았던 거 같다. 

 그 당시 필자도 까먹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우리 아이들을 바꿀 수 있다."라는 착각의 생각 말이다.


 아이들도 지성인이다. 그들도 자아가 있고 생각이 있다. 그들에게 화를 내고, 가혹행위까지는 아니지만 부모가 기분에 못 이겨 그들을 강제로 변화시키기 위한 행동을 한다고 해서 그들이 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 화도내고 윽박질러도 보면서 아이들이 내가 생각하는 대로 올바르게 변화해 주길 기대했지만, 그건 나만의 생각일 뿐, 그들은 그런 식의 훈육방식에 적응해 혼나는 순간만 어떻게든 넘기려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깨달음을 얻은 이후, 조금이나마 나 또한 변화하고 그들에게 다가가고자 노력해 나가고 있다.


 필자는 아이들과 함께 '달리기' 하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큰애는 둘째보다 더 못 뛰다 보니, 내가 더욱더 천천히 보조를 맞추며, 그녀가 포기하지 않게 나 스스로 페이스를 조절한다. 같이 뛰면서 그들의 체력도 길러주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도 심어주기 위함이다. 물론 아이들은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달리기를 마치고 오면 게임을 할 수 있게 소정의 시간을 제공하여 동기를 부여하는 편이다.


 아울러, 이제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필자의 첫째 딸과는, 그녀가 요새 흥미 있어하는 '역사'와 관련된 영화를 같이 보고 토론하는 것을 즐기는 편이다. 그러면서 그녀에게 내가 생각하는 이슈에 대한 질문도 해보고, 평소 역사책에서 봤던 단편적인 선악 구도에서 벗어나, 역사가 평가하는 악인이 왜 그 당시 그런 결정을 했었는가에 대해서도 함께 대화해 보는 것이 참 재밌다고 느낀다. 아, 이 부분은 나보다 우리 첫째 딸이 더 좋아하는 부분이라, 별도의 게임시간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필자는 화를 내거나 가혹행위를 하면 할수록, 나와 상대방의 관계는 좋게 지속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앞서 이야기 한 강압적인 방식 대신에, 상대방이 스스로 움직일 수 있도록 '제안'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일을 하다보면 상대방에게 업무적으로 바라는  내용이나 결과물의 수준이 있는데, 그에 대해 상대방이 이걸 행할 때 어떠한 이득과 보상을 얻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 필자는 고민해 보고 상대또한 도움이 될만한 제안을 하는 편이다. 

 '세상에서 가장 깨우기 힘든 사람은, 자는 사람이 아니라, 자는 척하는 사람이다.' 어느 책에서 봤던 경구다. 

 나는 이 글귀가, 서두에 언급된 가혹행위를 한 감독과, 내가 살아가며 만났던, '다 너를 위해 그런 거야'라는 말로 얼차려를 줬던 선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무엇이 되었든, 사람이 다른 사람을 '변화' 시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하는 것이 좋다. 다만, 타인에게 조금이나마 긍정적 자극을 주어 상대방이 스스로 '변화' 할 수 있게 만들어 줄 수만 있다면, 그게 가장 좋은 방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가져 본다.

 자는 사람은 깨워도, 자는척하는 사람은 결국 깨울 수 없기 때문이다.


" 과연, 그 감독의 가혹행위는, 누구를 위한 행위였을까? 본인의 힘을 자랑하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강압적으로 다가갈 수록, 상대방은 더욱더 숨을곳을 찾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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