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살아온 우리가 점수로만 남지 않기를
프리랜서에게 평가는 미래의 계약 유지와 연봉 상승을 가늠하는 지표가 되고,
직장인에게 평가는 다음 해의 연봉 인상률과 자리,
그리고 진급이라는 산을 넘기 위해 쌓아야 할 마일리지가 된다.
평가는 곧 연봉 인상률로 이어지고, 그 연봉 인상률은
언제나 제한된 재원 안에서 다시 나뉜다.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막상 올 한 해의 평가를 통보받는 순간 당황스러워지는 건 나만의 일일까.
나 역시 그랬다.
사원부터 대리, 과장 전까지는 내가 한 것보다 조금 더 좋은 평가를 받아왔다고 생각한다.
일을 열심히 하기도 했지만, 운도 구조도 비교적 내 편이었던 시기였다. 덕분에 동기들보다 조금 빠르게 진급했고, 연봉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과장이 되고 나서부터는 게임이 달라졌다.
더 이상 ‘성장 중인 사람’이 아니라,
이미 자리를 잡은 사람들 사이에서의 상대 평가였다.
열심히 해도 점수가 따라오지 않는 경험을 처음 했다.
화가 났고, 억울했고, 평가를 원망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그건 누군가의 악의에서 비롯된 일이 아니라,
오랜 시간 굳어온 사회와 회사의 구조적 습관에 가까웠다는 걸.
그리고 그때까지 나는 회사 안에서만 내 가치를 증명하려 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방향을 조금 틀었다.
회사에 덜 기대하기로 했다. 물론 일을 대충 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다만, 나의 모든 자존감을 회사 하나에만 걸어두지 않겠다는 결정이었다.
회사 밖에서도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필요했다.
그게 사진이었고, 주말의 웨딩 촬영이었고,
언젠가 끝까지 써보고 싶었던 글쓰기였다.
그마저도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었고,
그때 나의 지적 호기심을 다시 자극해준 것이 일본어 공부였다.
이것들은 도망이 아니었다.
회사에서 멀어지기 위한 선택이 아니라,
회사 밖에서도 무너지지 않기 위한 준비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기대를 내려놓은 뒤,
올해 평가는 내가 예상한 것보다 좋게 나왔다.
솔직히 말하면,
올해 내가 그렇게 큰 기여를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과거에 쌓아온 시간이
지금의 나를 밀어준 결과에 가깝다.
그래서 더 조심스러워졌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사회와 회사에 오래 굳어온 구조적 관습을 혼자 힘으로 넘기에는 어려웠다.
요즘 사내 게시판을 보면
매년 이맘때쯤 같은 글들이 올라온다. 평가가 안 좋아서 우울하다는 이야기들,
아무리 개인이 열심히 일해도 쉽게 바뀌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자조가 함께 담겨 있다.
그 글들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분들도 나와 같은 생각과 시각을 갖고 계시구나.
요즘은
누군가 일이 아닌 부탁을 해도
“그건 제 일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그렇게 살지 않았다.
내 일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한 번 더 맡았고,한 번 더 버텼고, 그렇게 하루를 넘겨왔다.
지옥철과 만원버스를 뚫고,
아침 9시 혹은 스스로 약속한 시간까지 제자리에 앉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많은 에너지를 쓰고 있다.
누군가가 준 평가는
누군가가 정한 기준과 예산 안에서 나온 결과일 뿐이다.
잘 줬건, 못 줬건 그 자체로 완전히 공정할 수는 없다.
그러니 그 평가가 우리의 삶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다.
그래도 우리는 내일을 살아야 한다.
오늘 받은 평가가 마음에 남아 하루를, 한 주를, 혹은 자신을 부정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
좋지 않았던 말과 숫자, 그날의 불운은 오늘까지만 들고 가도 충분하다.
너무 오래 품고 있으면 내일 써야 할 에너지까지 함께 소모되니까.
우리는 다시 출근하고, 서로 반갑게 인사하고, 각자의 할 일을 묵묵히 해낸다.
오늘의 평가표도 곧 잊혀질 것이다.
연봉도, 점수도 결국은 잦아든다.
다만 바라는 게 있다면, 조직 안에서 받은 평가와
나 자신의 가치를 같은 것으로 여기지 않았으면 한다.
이 이야기는 오늘의 나에게 건네는 말이기도 하고, 혹시 이 글을 읽고 있을 누군가에게도 함께 전하고 싶은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