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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담 Dec 24. 2021

어린 왕자

순수한 걸까 멍청한 걸까

"부서 이동과 관련되어서 어떤 어려움이 있을까?"

"네... 제가 부서장님을 잘 도와드릴 수 있을 정도의 몸상태가 아닙니다."

"그래도, 나는 너를 기다린다. 너는 언제든 잘해왔고, 나는 너를 믿는다."


 제안받은 부서로 가야지 마음을 먹었다. (교토삼굴 (brunch.co.kr))

나는 나를 더 강하게 원하는 곳으로 항상 이동해왔다. 다른 사람들보다 프로젝트 혹은 부서 이동이 매우 잦은 이유였다. '나를 원하면, 나에게 강하게 대시해라'가 내가 살아온 모토였다. 전 부서장님이 나를 너무나도 강하게 원하고 있었고, 나는 그분에게 받은 고마움이 있다. 나에겐 갚아야 할 부채가 있는 것이었다. 

그때, 현 부서장님 으로부터 메신저가 왔다.


"거긴 안돼, 갈 거면 나를 밟고 가라"

"어떻게 아셨어요?"

"다 아는 수가 있다. 잠깐 나 좀 보자"


 그렇게 시작된 면담, 나는 새로운 부서로 가겠다 이야기했다. 이유는, "여태껏 쌓인 나의 기술 부채 청산"을 이야기했다. 그때 현 부서장님은 완전 다른 관점의 이야기를 꺼내셨다.


"네가 가면,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피곤해지고 서로가 서로의 이해관계 논리로 맞서게 된다."

 나의 손 윗 상사인 부서장 레벨이 아닌, 그 위부 터해서 인사문제로 붉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공식 절차를 밟아야 한다. 이렇게 보내게 되다가 네가 다칠 수도 있고, 누구든 그 사이에 다칠 수 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회의실에서 머리를 쥐어박고 고통스러워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네 선택으로 인해, 많은 사람을 적으로 돌려야 할 수도 있다. 회사생활 선배로서, 가지 말라고 권하고 싶다."

 그 말을 듣고, 결국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었다. 가고 싶다고 갈 수도 없다. 그저 거대한 조직 내에서 나는 N분의 1일뿐인 것이었다. 그렇지만, 티를 낼 수는 없다. 내가 가지 않으면, 이 부서에 남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내가 이분과 계속 좋게 지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네, 부서장님의 의견은, 제가 너무 어려서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입니다. 받아들입니다. 전 부서장님껜 제가 결자해지 하겠습니다."

 그렇게 상황은 종결되었다. 사실 여태껏 주저했다는 것은 안 가는 게 낫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만큼 스스로를 설득하지 못할 상황이라는 것이니까. 그런 의미에선 현 부서장이 나를 이렇게까지 강하게 잡아준 것은 너무 감사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사실 현 부서장 또한 전 부서장의 핵심 사원으로서 함께 일했던 선후배 사이였다. 이렇게 냉정하게 절차와 프로세스를 운운하심이 나에게로 하여금 회사생활의 무력함을 가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사무실로 복귀하여, 빈 회의실로 들어갔다. 전 부서장의 전화로 연락을 하였다. 죄송하다는 거절의 말을 전했다. 수화기 너머로 실망하신 목소리를 들으니 내 가슴이 미어졌다. 나를 예뻐하시던 부서장이셨는데, 내가 더는 무언가를 도울 수 없다는 생각에 스스로 무기력을 느꼈다. 

 

 아마도, 전 부서장께 연민의 정을 느끼며, '나를 도와주셨던 분'이라는 명분 하에 이곳을 탈출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세상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어쩌면 나를 '꽉 잡아준' 현 부서장께 감사의 말을 전해야 하나 싶기도 하다. 


 사실, 어떤 선택이 정답인지 알 방법은 없다. 하나를 얻고 하나를 잃었으므로, 잃은 것에 대해서는 시도도 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정답을 알 수는 없다.


 다만, 한 가지 확실히 깨달은 바는 있다. 회사생활을 하며, '나의 도전' 자체도, 조직과 조직 사이의 벽을 뚫을 만큼의 명분과 이유가 있어야 이를 돌파할 수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내가 '퇴사'를 각오할 정도의 하고 싶은 일이 있거나, 나를 데려가려는 쪽에서 어떠한 피해를 감수하고라도 '길'을 열어 주어야만 한다는 점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 정도의 명분과 이유로는, 쉬이 내가 기대했던 대로의 선택권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왜 몰랐을까. 나만 왜 몰랐을까. 곧 마흔이 되는데도, 나는 여전히 어리석고 하찮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자정에 이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구슬 밖을 쉬이 나올 수 없는 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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