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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담 Dec 24. 2021

초 연결 사회

오늘은 이만 좀 사라질게요

 "큰애야, 네 휴대폰으로 엄마한테 전화 좀 걸어줘"

우리 와이프는 핸드폰을 어디다 뒀는지 자주 잊어버린다. 그래서 초등학교 2학년인 큰아이의 폰은 '엄마 휴대폰 위치추적'용 장비가 되어버린 거 같다. 사실 우리 와이프는 전화를 잘 받지도 않고, 문자도 늦게 답이 오는 편이다. 그 나름의 논리는, 본인도 상대방이 전화를 안 받을 때 열이 받지 않는다는 논리였다. 처음엔 괴이하다 생각했지만, 듣고 보니 묘하게 설득력이 있어 지금은 선동당한 상태다...

 

 우리는 약 20년 가까이 만났는데(벌써 세월이 그렇게 되었다.) 연애할 때부터 나의 불만은 '연락'에 대한 것이었다. 성격이 매우 급한 내가 가장 참기 어려운 것이, 연락이 안 되어 경과를 알기 어려울 때였다. 그러한 불만은 가끔 큰 싸움으로 번질 때가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와이프는 "연락 잘할게"와 같이 언제나 '다짐' 하지만, 공염불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지금은 위에서 언급 한 대로, 그러려니 한다.


 너무 와이프 흉을 봐서 미안하긴 한데, 가끔은 장모님도 '내 편'을 들어주실 때도 있다. 가끔 연락이 안 되실 때면 나에게 "그 애가, 좀 전화가 안돼 박서방 오홍홍" 멋쩍어하시며 화를 삭이시곤 하셨다. (그럴 때 기분이 은근히 좋다.) 사실 나보다 집안 어른들이 더 화내실 때가 많다. '젊은 사람'이 센스 있게 전화를 잘 받고, 응답도 빠르기를 내심 기대하시는 눈치다. 하지만 아직 우리 와이프는 '초 연결 사회'에 진입하지 않았다.(못한 거가 아니라 안 한 게 맞다.)



 나는 군대를 장교 복무했으므로, 내가 입대 한 2010년 언저리서부터 초연결 사회로 진입한 것 같다. 그 당시, 하루에 전화한 목록을 살펴보면, 'OOO 장교님' 'OOO 포대장님', 'OO 담당관' 등, 전부다 군인들 이였다. 사실 더 어이없는 건, 그 당시는 무제한 요금제가 없어서, 전화를 쓴 대로 통화료가 나왔는데, 한 달에 10만 원 정도씩 부담을 했던 거 같다. 아니, 여자 친구한테 전화 한 통 못하는데, 공적인 전화를 내 돈 10만 원을 줘야 한다니, 맙소사.


 그 당시 하루에 최고 기록은 300통 정도였던 거 같다. 정말 입에서 단내가 나올 정도로 전화를 많이 했다. 군인보다 통신사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응답 시간은 더더욱 중요했다. 불시에 휴가든 새벽이5분 안에 통제실로 응답을 보내지 못하면, 불려 가서 아주 크게 혼이 나야만 했다. 지금도 전화받고 응답하는 속도가 다른 사람보다 빠른 건, 그 당시 호되게 혼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전화받을 의무"에 대해 사회적 강요를 지속하는 것 같다. '발신자' 위주 문화를 형성하고 있기에, 전화를 늦게 받거나 연락이 닿지 않으면 '수신자'의 탓을 쉽게 하는 것 같다. 사실, 업무적으로 불편 하지만 늦은 응답에 대하여 수신자에게 비난을 할 상황인지는 숙고해 봐야 한다. 발신인이 혼자만 급한 것은 아닌지(보통 이 경우다.), 아니면 발신인이 수신인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지 않는 것인지에 대해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최근에는 점차 이런 '빠른 응답' 문화가 변해가는 것을 몸소 느끼고 있다. 내가 다니는 회사에서도, 가급적 메일이나 문자 등, 텍스트를 통한 의사 전달로, 상대방에게 고민할 시간을 주는 방식으로 많이 바뀌어 가고 있다. 즉, 최근 회사 업무를 하며, 전화한다는 것은 '정말 급한 일'이라는 것을 의미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사회 전체가 이제는 조금은 '느슨한 연결'을 유지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마도 점차 사회가 여유로워질수록, 서로가 서로의 끈을 팽팽히 잡고 있는 '초 연결 사회'에서, 그냥 '연결 사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나 또한 몇 달 전만 해도 핸드폰에 '회사 메신저 앱'+'회사 메일 앱' 두 개를 모두 설치하여 '초 연결 사회'에 있었지만, 지금은 메신저만 설치해 놓고 메일 앱은 로그오프 해놨다. 이젠 그렇게 해도, 상사나 동료들이 '메일 안 읽어?'라는 말을 하지 않고, 꼭 봐야 하거나 이야기할 것은 '전화'로 해결하곤 한다.

 이렇게 되니, 주기적으로 회사 밖에서도 체크하던 메일 업무가 하나 사라졌다. 서로가 조금씩 양보하며 업무의 강도를 낮추며 생활하게 되는 것이다.


 조금 늦게 받고, 늦게 응답해도 괜찮다. 누군가가 해줄 거라는 믿음. 또한 그 누군가도 다른 누군가가 해줄 거라는 믿음이 생기면, 언제나 긴장상태로 뇌 한구석에 '빠른 응답'이라는 불안감을 떨쳐버리고, 휴식에 집중하여 더 나은 향상성을 가져와 사회가 조금 더 풍요로워질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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