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비켜갈 수 없는 운명
어느 날, 회사 A선배와 메신저를 주고받을 일이 있었다. A와는 크게 친분 관계는 없었으나, 서로 어려울 때 품앗이로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디딤목이 되어 주었던 사람이다. 지금은 각자 서로 그때의 기억만 공유할 뿐, 업무가 많이 달라져서 좀처럼 뵙기 어려운 분이다.
A와 이야기 도중, 우리 둘 사이의 '공공의 적'인 B수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B수석이 글쎄, 저한테 평가 코멘트에 업무능력이 현저히 떨어져서 도저히 혼자서는 업무를 할 수 없다고 썼다니까요 글쎄"
"걔 원래 그래, 나한테도 '내가 너를 잘되게 할 수는 없어도, 망하게 할 순 있어' 이런 소릴 하더라니까요"
서로 열변을 토하며 B수석을 욕하기 바빴다. 그간 B수석이 한 이야기들과, B수석에 대한 다른 사람의 평판을 종합해 보면, 아래처럼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1) B수석을 좋게 이야기하는 사람을 여태껏 본 적이 없다.
2) B수석은 자기가 회사에 엄청난 기여를 한다고 스스로 자부하고 있다.
평판과 업무 기여는.. 분명 같을 수는 없지만, 반비례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왜냐하면 평판이 낮으면 같이 일하려는 핵심인재들이 떨어져 나갈 것이고, 그것은 업무 기여에 안 좋게 작용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을 하고 글을 이어 나가자면, 그는 언제나 자기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나 보다. 하지만 세상에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
나는 회사생활을 하면서 어렵지만 반드시 지키고자 하는 신념이 있다. 바로, '겪어보지 않고 사람을 재단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B수석은 본인이 고과권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래 있는 사람 여럿을 '고과 추천'권으로 어려움을 주고 있다는 소식을 익히 들었었다. 그럼에도, 그 사람을 겪어보지 않았기에, 남들이 굳이 안 가도 된다는 프로젝트에 제 발로 들어간 적이 있다.
"박 프로, 잘해보자고" "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2년 전, B수석을 처음 만났을 때, 뭔가 느낌이 좋지만은 않았다. 의뭉스럽다고 해야 할까? 뭐 좋다. 겪어보지 않았으니 재단하지 않으리 다짐했.. 었다. 하지만 그 다짐은 두 달 만에 깨지고 말았다.
그는 분명 쉬운 프로젝트가 있다 했다. 말 그대로 '차려진 밥상'. 하지만 세상일은 어느 하나 쉬이 굴러가지 않는다.
그 프로젝트의 고객은, IT를 전혀 몰라 업무 계약 부분에서 우리와 상당한 이견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었다.
이슈가 쉬이 해결되지 않자, 그 당시 B수석은 프로젝트의 결정권자가 아님에도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본인이 임명한 매니저가 있었고, 해당 매니저가 도움 요청을 하지 않았음에도 본인이 자꾸 비집고 들어와 섣부른 결정을 하기 시작했다. Bottom-UP은 없었고, Top-Down 의사결정만이 있었을 뿐이다. 매니저도, 구성원인 나도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박 프로, 과장 머리 달고 이런 거 하나하나 내가 알려줘야 돼?"
매니저를 들들 볶는 걸로 모자라, 담당자들 하나하나 모두 볶기 시작했다. 그리고 인신 공격성 발언들까지..
와이프와 B수석과 회사 이야기를 하며 조언을 구했다. 언제나 와이프의 의견은 항상 같다.
"너하고 싶은데로 해"
나를 믿는다는 뜻인가? 내가 다 잘하는 게 아닌데, 이런 무책임한... 뭐 그래도 좋다.
많은 고민 끝에, 나는 프로젝트를 내 발로 나오기로 결심했다. 그 당시 나오기로 결심한 이유로는,
'나를 잘 대해주지 않는 사람에게, 내가 충성을 할 필요가 없다.'라는 나의 삶의 지론에 의함이었다.
다른 곳으로 옮기기 위해 마음먹고, 현재 함께 일하고 있는 C 매니저에게 연락을 드렸다.
"제가 그곳에 Join 해도 될까요?"
"바로 짐 싸라, 내가 빼내 와 줄게, 일단 네가 말로 B수석에게 옮기는 건에 대해 이야기는 드릴 수 있겠니?"
"제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렇게, B수석에게는 내가 이야기를 한번 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날이 밝았다. B수석은 언제나 여지없이 매니저와 나를 비롯한 담당자들을 회의실에 모아놓고, 크게 한번 질책하더니, 다시 한번 잘해보자고 다독였다.
'오늘이 마지막인데... 좋은 말 좀 해주지... 그래도 좋다. 세게 나가도 되겠다.'
오히려 아까의 질책을 명분 삼아, 나는 다들 침묵하는 그 찰나에, 나직이 한마디 말을 떼었다.
"저는 못하겠습니다."
"야,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왜 못해? 회사가 니 놀이터야?"
"저는 딴 데 갈 겁니다. 여기서 일하고 싶지 않습니다."
"야,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말고 이성적으로 행동해, 너 나가면 다른데 갈데 있는 줄알어?"
나를 어디 갈데없는 사람 취급했다. 도대체 사람을 어떻게 보면 저런 당당함과 오만함이 나오는 것일까, 개탄스러웠다.
"네, 제 갈길 알아서 갈 테니, 제 걱정 마시고 프로젝트 걱정이나 하세요"
하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홀로 회의실 밖을 나갔다. 그러고는 짐을 정리했고, C매니저가 B수석과 둘이 이야기를 나누더니, 바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나중에 과제를 옮기고 나서, 동료들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B수석이 나를 엄청 여기저기 씹고 다녔다더라.
아마도 위에 A에게 했던 말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며 나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생각했겠지. 그래도 상관없었다. B수석은 적이 많다. 별거 아닌 '추천권'에 사람들이 충성한다 생각 하지만, 생각보다 사람들은 똑똑하다. 내 생각으로는 '추천권'이라는 갓끈이 떨어지면 모두 발길을 돌릴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리고, 실제 갓끈이 떨어지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B수석이 맡고 있던 프로젝트가 다른 업체에 경쟁에 밀려 넘어가고야 말았다.
회사의 손해가 막심함에도, B수석 아래에 있던 사람들은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해방되었다고... 광복절을 맞이한 느낌이라고 하였다. 자연스레 요직을 맡던 B수석의 위치도 상실되었다. 그러고 자신을 받아줄 곳을 수소문하여 부서를 옮긴 모양 이더라.
그럼에도, 어느 누구도 B수석을 따라간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권불십년, 화무십일홍',
권력은 오래갈 수가 없을 다시 한번 몸소 느끼게 되었다.
"수 즉 재주, 수 즉 복주"
내가 군생활 시절, 대대장실에 한자로 붙어 있던 한자 성어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배를 가라앉히게도 한다.'라는 말로, 대대장이 언제나 우리 초급 장교들에게 가르쳐 주던 말이다.
조금 안다고, 조금 우위에 있다고 무시하거나 하대하지 않는다. 동료들에게 잘 대해주면, 분명 그들은 나를 띄워줄 것이라 믿고, 더 잘해주려 노력하고 있다.
그렇게 오늘도, B수석처럼 안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