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적인 Best & Worst 사례
내가 겪은 컨센서스의 Worst 사례는 실제 대기업에서 자주 있을 법한 이야기이다.
대기업이라고 수백 수천억 원의 프로젝트만 따박따박하는 줄 알지만, 천만의 말씀.
프로젝트와 솔루션과 기술, 지원 등이 갈래갈래 갈라져있고,
중소기업보다 더 적은 인원으로 더 큰 커버리지를 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이다.
사업부장을 비롯한 임원들은 그렇게 수많은 프로젝트와 솔루션을 짧은 회의 시간 안에 파악하고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위치이고, 큰 사업부일수록 보고라인은 길어지며, 상황은 더 빠르게 바뀐다.
아무리 임원들이 철인이라고 해도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요즘 임원들은 토요일도 나온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점심도 도시락을 함께 먹으며 보고를 받는다면 (믿으려나)
모르긴 해도 매 순간이 중요도와 시급성, 그리고 방향성이 그분들에게 큰 숙제 일 것이라 생각된다.
이 방향성이라는 것은 여러 갈래로 부는 바람에 따라 움직이는 방향계 같으면 안 되는데
임원이 그런 성향이라면 그 임원 아래로 줄줄이 임원의 생각을 맞추는 스무고개를 하고
앉아있는 기현상이 벌어진다.
임원의 지시를 해석하는 회의가 별도로 생기고, 임원은 내가 원하는 것은 이런 것이라며 반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Worst사례는 곧 실무자와 임원 간의 방향성이 정반대가 되는 경우이다.
실무자의 방향성은 사업과 기획, 개발의 '제한 & 어려움 & 기존의 경험'으로부터 시작하고
그 조합은 그럴싸한 결과물로 포장된다.
하지만 임원이 하필 그 회의 전에 '경쟁력 & 차별성 측면에서 회사의 근간부터 바꾸려는 생각'으로 CEO와 대화를 하고 왔다면 그 결과물이 얼마나 근시안적으로 보일 것인가.
작은 파도의 합으로 임원 보고를 진행하는데 큰 파도 한방으로 뒤집는 경우가 실무자와 임원 간의 컨센서스가 맞지 않는 케이스였다. 일하는 입장에서는 굉장히 허탈하고, 보고 주체가 원망스러운 장면이었다.
반대로 동일 상황에서의 Best사례는 프로젝트 시작부터 직접 묻고, 자주 확인하고, 임원이 자신의 말에 책임지게 하는 것이다. 일개 디자이너 입장에서 그게 가능한가? 당연히 가능하다.
임원들이 얘기하시는데 찍소리도 못하고 받아 적기만 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고,
오히려 Top Management Interview 같은 기술과 문화가 더더욱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프로젝트 시작을 알리는 착수보고에서 CX담당 디자이너가 사업부장에게 똑똑한 질문 하나 던졌던 것이
팀장인 내 입장에서 Best 사례였다.
이 솔루션을 통해 고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뭔가요?
그때부터 그 회의는 일정과 목표가 담긴 착수보고가 아니라
'나도 그렇게까지 고민은 안 해봤는데 같이 고민해 보자'하며 실제적인 방향성이 담긴 워크숍이 되었다.
물론 과제의 특수성과 사업부장의 오픈 성향도 있었고, 비록 결과 때 또 조금 방향성이 달라지긴 했지만.
이렇듯 컨센서스의 힘은 디자이너에게 무기가 되고, 바탕이 되는 것이다.
까탈스러운 와이프에게 게임기 구매에 대한 의사결정을 받듯이,
회사일도 그 종류에 따라 결과물을 한 번에 설득하는 것보다
사전에 길을 잘 닦아서 어쩔 수 없게 만드는 게 무형의 힘이 될 수 있다.
자, 너무 크고 어려운 이야기만 했을까?
컨센서스를 잘 이용하는 사람은 실무자끼리 협업에서도 자주 빛을 발하게 된다.
기획 - 개발 - 디자이너 각 영역과 역할에 더 심취한 한국인은 그건 네 쪽에서 해줘야지 하는
Gray 영역을 만들곤 한다.
문제는 영역 자체를 방치하고, 상호 컨센서스 없이 일을 진행하다 망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프로젝트와 참여 인력에 따라 바로 실무에 들어가지 않고 그런 R&R을 정의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디자이너의 역할 누가 몰라요? 하는 사람은 아직 진짜 뭘 모르는 것이다.
회사 안에서는 생각보다 역할이 겹쳐 있어 Gray 영역이 아예 없거나, 생각보다 Gray 영역이 큰 경우도 있다.
그것을 파악하여 자리 잡게 하는 것이 팀 빌딩이고, 팀 빌딩을 위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컨센서스이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으로 인상 깊은 컨센서스의 달인은
회의 시작 전 1~2분 내에 스몰톡을 적재적소에 날리는 사람들이다.
본 회의랑 상관이 없는데도, 묻지도 않은 앞뒤 회의 목적과 결과를 툭툭 던지며 현 상황과 분위기를
은연중에 전달하는 경우가 있다. '아 사장님이 던지신 화두 때문에 다들 난리예요' 이런 식으로.
회의 전에 주요 의사결정자들에게 복도든 엘리베이터에서든 '오늘은 좀 가볍게 의견 드리려고요' 이런 투의 전달도 회의 분위기를 바꾸고, 결과를 다르게 하는 경우가 있다.
이 외에도 노골적인 컨센서스 회의, R&R/프로세스 미팅, 이슈레이징 미팅 등
누군가의 눈에는 불필요해 보이는 미팅들이 많이 있지만 이를 정확한 타이밍에 활용하는 것이 곧
회사생활하는 소프트 스킬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사진: Unsplash의krakenimag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