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eidi Oct 24. 2021

17. 외딴 성을 찾아

드 하르 성

  수목원을 다녀온 날 밤, 내일은 무엇을 할까 하며 책을 다시 넘겨보았어. 시내는 실컷 구경했으니 근교를 또 한 번 다녀와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 마침, 버스를 한 두 번 갈아타면 갈 수 있는 곳에 드 하르(De haar)라는 성이 있었어. 버스의 종점까지 가서 또 한 번 버스를 타고, 또 마을버스 같이 작은 승합차를 타고 가다가 성에 가려면 내려야 한다는 기사 아저씨의 말에 내려보니, 한적한 시골길이 나타났어. 구글 지도를 켜고는 한참을 걷고 또 걸었지.


드 하르 성을 찾아가던 중 만난 자작나무 길


  성의 입구까지 걸어가는 길은 늦가을 특유의 따뜻한 색을 입은 나무들과, 햇살로 참 예뻤어. 특히, 엄마가 좋아하는 자작나무가 길을 따라 쭉 펼쳐져 있었지. 길 양옆으로는 말과 염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어. 자동차가 아닌, 버스나 기차를 타고 여행을 다니면 목적지까지 가는 여정이 목적지 자체보다 기억에 더 많이 남아. 유명한 곳들은 출발하기 전 이미 사진으로 많이 보아서 놀랍거나 새롭지는 않거든. 반면, 목적지까지 가는 길에 무엇이 있는지, 어떤 풍경을 지나가는지, 특이한 가게가 있는지와 같은 정보를 알 수 있는 사진은 그렇게 많지 않아. 눈앞에 언제 목적지의 모습이 나타날지 기대하고 상상하면서 길을 걷는 순간이야말로 가장 여행을 즐기는 순간이 아닐까.


눈앞에 나타난 드 하르 성


  드 하르 성은 방문객도 거의 없었지만 넓은 정원이 잘 관리되고 있었어. 성의 앞마당에 위치한 카페에도 사람들이 많지 않아 여유로운 오후를 보내기에 딱 좋았지. 우리는 성의 실내보다 야외의 정원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어. 날씨도 따뜻해서 외투를 벗어 허리에 둘러메고 다녔어. 성을 배경으로 서로의 사진도 많이 남겼어. 엄마는 또 내 사진을 많이 찍어주겠다며 지치지 않고 셔터를 계속 누르더라고. 돌이켜보면, 시내에서도 나쁘지 않았지만 특히 근교로 떠난 여정에서 뜻밖에 좋은 장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어.


  역사적인 유적지도, 멋진 작품들이 전시된 미술관도, 유명한 음식점이나 분위기 좋은 카페도 잘 자란 자작나무와 단정하게 전지 된 정원의 나무, 그리고 길가에서 만난 야생화만큼 엄마를 감동시키지는 못했어. 아무리 멋있게 만들어도 흉내 낼 수 없는, 자연 그 자체가 주는 분위기 속에서 엄마는 가장 행복한 것 같아. 그래서 엄마는 청주의 외딴 시골집을 떠나 만족하기가 쉽지 않은가 봐. 가끔 서울에 엄마가 올라오면, 나는 늘 어디를 함께 가야 엄마가 재밌고 즐거워할까 고민해.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를 검색하다가 요즘 분위기 좋게 꾸며 놓았다는, 우리들 말로는 '핫 플레이스'라는 곳에 엄마를 데려가기도 했지. 하지만 그런 곳은 엄마에게는 '핫'하지 않는 듯했어.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 좋다는 엄마를 만족시킬 만한 곳이 과연 서울에 있기는 할까.

이전 17화 16. 보타닉 가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