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을 도시만 돌아다녀서 지쳤는지, 지난날 밤에는 엄마가 수목원을 가보고 싶다고 이야기했어. 네가 가고 싶은 곳에 함께 가겠다고만 하던 엄마가 처음으로 가고 싶은 곳을 먼저 이야기했지. 아마 숙소에서 내가 챙겨 온 네덜란드 여행책을 보다가 근처에 수목원이 있다는 걸 봤던 모양이야. 멀지 않은 곳에 보타닉 가든이 있더라고. 슈뢰더 하우스를 본 후에 우리는 여행책에 소개된 그곳으로 향했어. 버스를 타고 한참을 지나니 오전에 보았던 아기자기한 주택가들과는 또 다른 한적한 마을이 나왔어.
아마 네덜란드 여행에 와서 위트레흐트 끝자락에 있는 이 외딴 수목원을 보겠다고 찾아오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야. 엄마 아니었으면 나도 네덜란드에 와서 크고 작은 도시들의 모습만 가득 보고 갔겠지. 엄마 덕분에 한적한 산책도, 네덜란드의 야생화들도 구경할 수 있어서 좋았어. 꽃씨를 받아서 한국으로 가져가 우리 집 앞마당에 뿌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렇게 하지 못해 아쉬워하는 엄마를 보면 귀엽기도 하고 웃음이 나오기도 했어.
엄마의 말처럼, 흙길은 한참을 걷고 뛰고 언덕도 오르내리고 했는데도 발이 아프지 않았어. 새로 산 신발 덕분인가 하는 생각도 했지만, 흙길을 밟으니 아스팔트 바닥을 밟고 걸을 때 보다 훨씬 몸이 가볍게 느껴졌어. 사실 엄마와 함께 여행을 오면서 크게 고민했던 것들 중 하나가 '걷는 정도'였거든. 나는 친구들과 여행을 가면 시간이 아까워서 아침부터 밤까지 쉬지 않고 여기저기 걸어 다니곤 했어.
이번 여행에서도 카페에 앉아 잠시 쉬거나 밥을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계속 걸었어. 심지어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가도 구경하려면 한참을 걸어 다녀야 하잖아. 매일 일정에 얼마나 걷는 코스를 넣어야 할지 많이 고민이 되었어. 쇼핑을 하거나 서울 도심을 돌아다닐 때를 생각해 보면 엄마는 다리 아프다는 말을 종종 했잖아. 그런데 또 엄마가 걷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은 아니고 심지어 산악회에 가는 엄마를 떠올려 보면 나보다도 오랫동안 잘 걷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어느 정도를 걸어야 엄마에게 적당할지 가늠하기 어려웠지. 엄마의 성격 상 나에게 "힘들다, 그만 걷자."라는 말 대신 "엄마는 괜찮아."라고 할 것이 뻔하잖아. 여행 내내 줄곧 엄마의 컨디션이 걱정되어 눈치를 보곤 했어. 그런데 자연사 박물관에서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신이 난 엄마의 뒷모습을 보고는 깨달았어. 엄마의 컨디션은 우리가 걷는 곳이 '흙'인지 혹은 '포장도로'인지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을 말이야. 자연 속에 있을 때 가장 해맑고 지치지 않는 엄마를 보며 뿌듯한 날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