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산타 : 동심 사수 대작전

진실보다 사랑이 먼저 도착하는 밤

by 아르망

겨울 햇살이 제 시린 이름을 잠시 잊은 듯,
마룻바닥 위에 나른한 황금빛 꿀처럼 누워 있던 어느 오후였습니다.

손을 뻗으면 그 윤기 흐르는 따스한 빛이 손가락 사이로 엉겨 붙어,

금방이라도 달콤한 향기를 풍길 것만 같았지요.


햇살은 아무것도 모른 채 바닥에 몸을 풀고 있었지만,

달달하게 녹아 흐르던 그 오후의 공기가,

갑자기 짓궂은 장난처럼 딱, 하고 멈춰 굳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산타 할아버지 말이야…”

아이의 질문에 눈꺼풀 감기던 제 안의 세포들마저

비상나팔 소리를 들은 병사처럼 일제히 차렷 자세를 취했지요.


아, 올해도 어김없이 산타 청문회가 개막했구나.

저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저의 동공 지진까지도 확인하는 아주 치밀한 조사였기 때문입니다.


'동심 사수 작전'은 매년 크리스마스이브를 기점으로 발동됩니다.

하지만 난이도는 해마다 가파르게 상승 곡선을 그리지요.

그 위험도는 [아이의 나이 × 의심의 농도 × 인터넷 검색 능력]에 비례하거든요.

(천만다행으로 아이들에겐 아직 스마트폰이 없습니다^^)


이번 작전의 목표는 단 하나입니다.

“에이, 사실은 산타 없지?”라는

그 치명적인 질문만은 막아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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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1]


“어떻게 하루 만에 전 세계를 다 돌아?”


첫째의 눈빛은 오류를 찾아낸 철두철미한 과학자 그 자체였습니다.

속도 계산, 동선 체크, 그리고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빈틈들을

하나하나 짚어내는 냉철함까지.


궁지에 몰린 저는 슬그머니 컵을 들어 입으로 가져갑니다.

과학으로 무장한 아이의 논리를 피해 갈 대답을

뚝딱뚝딱 조립할,

그 몇 초의 시간이 절실했기 때문입니다.

천천히 잔을 기울이는 그 동작은 갈증 때문이 아니라,

현실과 환상 사이 벌어진 틈을

그럴싸하게 기워낼 시간을 벌기 위함이지요.


"산타 할아버지는 혼자가 아니야.”

저는 짐짓 태연한 얼굴로 말을 잇습니다.


“엘프들이 있어. 아주아주 많이.

이건 산타 할아버지 혼자 뛰는 게 아니라,

전 세계가 함께 움직이는 ‘글로벌 작전’이야.”


여기서 중요한 건 숫자의 ‘정확함’이 아니라,

‘아주 아주 많이’라는 부사에 꾹꾹 눌러 담은

저의 뻔뻔한 확신입니다.

아이들은 논리의 앞뒤보다는,

저의 눈동자가 흔들리는지 아닌지를 먼저 살피니까요."


[질문 2]


"우리 집은 굴뚝이 없는데 어디로 들어와?"

"창문도 잠갔고 현관도 다 잠갔는데..

산타 할아버지가 못 들어오면 어떡해?"


둘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습니다.

마치 설계도가 잘못된 건물을 걱정하는 꼬마 건축가처럼요.


“걱정 마. 산타 할아버지는 겨울바람이나 달빛처럼,

잠긴 문틈 사이로 스르륵 들어오실 수 있단다.”


아이를 안심시키며 저는 문득 깨닫습니다.

방금 산타 할아버지에게 물리학 법칙을 가볍게 무시하고

건물 외벽을 뚫고 들어오는 ‘초능력’을 선물했다는 사실을요.


[질문 3]


"근데 착한 아이인지 나쁜 아이인지,

그리고 어디에 사는지 어떻게 다 알아?”

틈을 주지 않고 날아오는 추가 질문.

저는 반사적으로 대답합니다.


“엘프들이 망원경으로 보고 있다가,

너희 마음에 예쁜 별이 뜨면 얼른 수첩에 적어두거든.”


말하고 보니 등골이 서늘해집니다.

전 세계 아이들 몰래몰래 돌아다니며

오늘은 웃었는지, 울었는지 적어두고 있다니.


이쯤 되면 선물 주는 산타 할아버지보다,

모든 걸 알고 있는 엘프가 더 무서워지네요.


[질문 4]


"루돌프 사슴은 어떻게 하늘을 날아?"


"루돌프는 별빛을 마시며 달려.

그래서 둥실 떠오르는 거야.”


"아.."


다행히 루돌프의 비행 능력에 관한

더 이상의 질문은 없었습니다.

뉴턴의 사과도, 아인슈타인의 이론도

‘별빛’이라는 두 글자 앞에서는 맥을 못 춥니다.

언제나 그렇듯, 낭만은 논리보다 힘이 셉니다.


[질문 5]


"산타는 어디 살아?”

“핀란드.”

“진짜?”

“진짜야. 거긴 산타 마을도 있고 주소도 있어.”


저는 쐐기를 박기 위해 비장의 무기를 꺼냅니다.

“게다가 지금 어디쯤 왔는지 산타 추적 앱으로도 볼 수 있어.”

아이들이 스마트폰 화면으로 빨려 들어갈 듯 고개를 숙입니다.


그 순간, 산타는 구름 위의 막연한 ‘동화’에서

위도와 경도를 가진 명확한 ‘GPS 객체’로 다시 태어납니다.


“이것 봐. 실시간 위성 생중계라고.”

화면 위에서 깜빡이는 그 작은 붉은 점 하나.

그것은 그 어떤 두꺼운 백과사전보다

강력한 ‘살아 움직이는 증거’입니다.


그 붉은 점을 보는 순간, 과학자와 건축가를 자처하던

날카로운 이성이 눈 녹듯 사라집니다.

거실 가득 채워져 있던 의심의 안개가 걷히고,

아이들의 작은 세상이 지구 반대편 핀란드까지

쭈욱 늘어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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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거실을 둥둥 떠다니던 뾰족한 물음표들은

온데간데없이 녹아 사라졌습니다.

아이들은 다시 ‘의심’이라는 차가운 땅을 떠나

‘믿음’이라는 따뜻한 영토로 돌아왔고,

저마다의 비장한 환영식을 준비합니다.


분주해진 아이들의 등을 보며,

저는 조용히 작년 크리스마스의 기억을 꺼내 봅니다.


“산타 할아버지,
힘드실 텐데 이거 드세요.”


예쁜 접시에 담아둔 쿠키와 삐뚤빼뚤한 메모.

그 소박한 상차림을 보며 저는 알았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과자가 아니라,

추운 밤길을 달려온 누군가의 언 맘을 녹이는

아이의 가장 따뜻한 난로였다는 것을요.


이윽고 밝아온 아침,

아이는 텅 빈 접시를 보며 세상을 다 가진 듯 소리쳤습니다.

“와… 진짜 다 드셨어! 내 선물이 마음에 드셨나 봐!”


그 벅찬 기쁨을 위해, 저는 1년 치 쓸 놀람과 감탄을

그 짧은 순간에 모두 가불해 써버렸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남우주연상감이 될 법한 명연기로 화답했지요.

졸린 눈을 비비며,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것.

비록 제 배 속에는 어젯밤 먹은 쿠키가

아직 소화되지 못한 채 남아 있었지만요.


언젠가 아이들은 알게 되겠지요.

가장 늦게 잠들고 가장 먼저 깨던 누군가가

바로 곁에 있었다는 사실을요.


하지만 오늘 밤만큼은

세상의 모든 논리를 잠시 꺼두고,

설명할 수 없는 설렘 하나쯤

우리 곁에 고요히 남겨두어도 좋을 것 같아요.


내일 아침,
크리스마스트리 아래에서
터져 나올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벌써부터 귓가에 들리는 듯합니다.

그 웃음을 지키기 위해
저는 오늘도
기꺼이 깊은 밤 비밀 산타가 됩니다.


아직은,

설명보다 사랑이 먼저 도착하는 밤이니까요.


올해도,

크리스마스가 왔습니다.


진실보다
믿음이 이기는,
일 년에 단 하루뿐인 날.


메리 크리스마스.
나의 사랑스러운
꼬마 선생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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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동심을 지키느라 오늘도 진땀 뺀

세상의 모든 엄마, 아빠 산타들에게.

그리고 저마다의 숨 가빴던 한 해를 보내신 브런치 작가님들께도.

오늘만큼은 다른 무엇보다 평안이

가장 먼저 도착하는 행복한 밤 되길 소망합니다.

모두 메리 크리스마스!!^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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