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 꽃이, 참 예쁘게도 피었습니다

늦가을 숲 속, 유쾌한 멈춤의 연습

by 아르망

가을이 미처 다 전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바람에 흩날리던 오후.

우리들은 그 아쉬운 뒷모습이라도

붙잡고 싶은 마음으로,

숲이 나무들 사이에 마련해 둔

그 고요한 여백 속으로 들어섰습니다.


발밑은 지친 마음을 받아주듯 더없이 아늑하고 푹신했습니다.

겹겹이 쌓인 낙엽들은

마치 계절에서 떨어진 시간의 파편들이

잘게 부서져 내린 것처럼,

숲의 바닥을 두툼하게 감싸 안고 있었거든요.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마치 잊고 지낸 지난날들이

바스락거리며 말을 걸어오는 것만 같았지요.


아이들의 들뜬 신발이 낙엽에 닿을 때마다,

가을은 눈으로 보는 풍경의 시간을 지나

귀와 마음으로 들을 수 있는

소리의 시간으로 깊어지고 있었습니다.

바스락. 그 건조하고도 풍성한 울림 속에서,

숲은 비로소 가장 솔직한 목소리를

들려주기 시작했습니다.


시선을 위로 옮기자,

잎을 모두 떠나보낸 나무들이

앙상한 팔을 뻗어 하늘을 지탱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이 숲이라는

오래된 극장을 떠받치고 있는

든든한 기둥들처럼 말이지요.


그 헐거워진 가지 틈새로

오후의 볕이 길게 스며들며,

빈 무대의 여백을 아늑한 빛으로 채우고 있었습니다.


햇살은 그렇게 숲 전체를

오래된 갈색 톤으로 따스하게 물들였습니다.

그건 마치 잊고 있던 서랍 속에서 막 꺼낸,

손때 묻은 옛날 사진을 볼 때처럼

가슴 한구석이 몽글해지는 아늑한 색감이었지요.


화려했지만 무거웠던

계절의 치장을 걷어낸 덕분일까요.

숲은 무성한 잎 뒤에 숨겨두었던,

그 투박하고도 순한 ‘옛날의 맨얼굴’을

그대로 드러낸 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뺨을 스치는 공기는

속이 비칠 듯 투명하고 서늘했습니다.

그 청량한 숨결의 끝자락에서,

저는 떠나기 주저하는

이 계절의 아릿한 망설임을 읽을 수 있었지요.

그 깊은 침묵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그 고요한 멈춤은

숨 가쁜 여름을 보낸 이 계절이 구사하는

가장 유창한 언어처럼 다가왔습니다.


저는 낙엽이 깔린 푹신한 바닥 위에

작은 객석을 마련하고,

스미는 한기에 옷깃을 단단히 여미었습니다.

깊어가는 가을이 막을 올린 이 근사한 연극.

그 앞에서 저는 기꺼이 유일한 관객이자,

이 소리 없는 무대를 깊이 음미하는

고독한 평론가가 되어보기로 자처했으니까요.


저만치 껍질이 단단한 참나무 앞에는

아홉 살 첫째가 비장한 뒷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오늘의 술래이자, 이 무대의 엄격한 감독이지요.

그 뒤로 출발선에 선 7, 5, 3세의 배우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감독의 등을 주시하며

브라운 카펫 위로 조심스럽게 등장했습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차가운 공기를 또렷하게 가르는 감독의

쩌렁쩌렁한 큐 사인과 동시에

마치 숲 속 어딘가에 숨겨져 있던

음소거 버튼이 눌러진 것처럼,

요란하게 울리던

낙엽 밟는 소리가 거짓말처럼 뚝 끊깁니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바람에 밀려 구르는 낙엽 소리뿐.

대사도, 설명도 없습니다.

오직 멈춰 선 몸짓으로만 각자의 이야기를 말하는

이 완전한 정지 화면 속에서,

저는 네 가지 색깔의 독특한 캐릭터들이

빚어내는 한 페이지의 아름다운 동화를

천천히 읽어 내려갑니다.



가장 먼저, 무대의 중심인

거대한 참나무 앞을 지키는 아홉 살 첫째.

아이는 지금 이 놀이를 단순한 오락이 아닌,

자신이 지휘해야 할

완벽한 작전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술래의 등 뒤에서 벌어질 동생들의 꼼수쯤이야

이미 다 꿰뚫고 있다는 저 표정.

아이는 마치 결말을 다 아는 작가처럼,

짐짓 의연하고 비장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낙엽이 얼마나 미끄러운지,

동생들이 언제 방심하는지.

첫째에겐 이미 온몸으로 익힌

‘형아의 감각’이 있거든요.


‘무궁화 꽃이...’를 외치는 박자를

요리조리 쪼개고 늘리며

등 뒤의 심리를 쥐락펴락하는 노련한 뒷모습.

웃음이 터져 나올까 봐 입술을 앙다물고,

성급함은 곧 빈틈이 된다는 걸 아는 작은 현자처럼.


아이는 이 숲의 질서를 지키는 공정한 기준이 되고자,

고사리 같은 어깨에 잔뜩 힘을 준 채

단호하고 야무진 등을 보이고 서 있습니다.


그 엄격한 맏이의 등 뒤에서,

일곱 살 둘째는 그 규칙의 틈새를

유유자적 헤엄치는 타고난 낭만가입니다.


첫째가 ‘정확성’을 계산할 때,

이 아이는 ‘즐거움’을 계산하거든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재밌잖아?’ 하는

저 천진난만한 얼굴.

둘째는 팽팽하게 당겨진 놀이의 긴장감을

슬쩍 흘린 반달 눈웃음 하나로

부드럽게 풀어버리는 재주를 가졌습니다.


술래가 획 돌아보기 직전,

굳이 한 발을 더 내딛고는 ‘어이쿠’ 하며

능청스레 눈을 굴리는 저 표정을 보세요.

아슬아슬하게 걸려도 까르르, 안 걸려도 헤헤.


지는 쪽도 이기는 쪽도 결국

다 자기편으로 만들어버리는

저 기막힌 넉살 앞에서,

승패의 냉정함은 힘을 잃고 맙니다.


둘째에게 중요한 건 순위표의 숫자가 아니라,

“그래서 우리 재밌었어?” 하고 묻는

그 순간의 온기인 것 같으니까요.


그리고 그 뒤를 쫓는 다섯 살 셋째.

아이는 숲을 온통 흔들어 놓으며

통통 튀는 고무공 같은 에너지, 그 자체입니다.


형아가 정해둔 출발선은

셋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시작 신호가 떨어지기도 전에 마음이

이미 반 박자 먼저 튀어 나가고,

‘무궁화 꽃이...’가 끝나기도 전에

참지 못한 웃음이 울타리를 넘어

먼저 터져 나오니까요.


두 발은 잠시도 쉬지 않고 낙엽을 밟으며 종종거리고,

작은 두 팔은 연신 허공을 휘젓습니다.

몸집은 작지만, 존재감만큼은

언제나 즐거운 과속을 하고 마는

이 천진난만한 개구쟁이.


가끔은 규칙을 헷갈리고,

대부분은 즐거움에 반해 그마저도 잊어버립니다.

하지만 그러면 좀 어떤가요.

엄격한 질서가 무너진 그 틈새에서

가장 환하게 피어나는 저 생기.

아, 저 엉뚱하고도 찬란한 자유는

오직 개구쟁이 셋째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그리고 맨 앞,

아니 그저 발길이 닿는 곳이 곧 길인 세 살배기 막내.

이 아이는 지금 ‘게임’을 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이 숲을 온몸으로 만끽하며 존재하고 있습니다.


옆에서 뛰면 바람이 부나 보다 하고 따라 뛰고,

옆에서 멈추면 예쁜 꽃을 발견한 듯 우두커니 멈춰 섭니다.

이유는 없습니다. 낙엽이 바스락거려서 한번 밟아보고,

햇살이 반짝여서 한번 쳐다볼 뿐.


술래가 쏘아보는 그 날카로운 눈빛도,

‘잡힌다’는 어마무시한 개념도

이 아이의 투명한 눈동자에는 닿지 못하고 미끄러집니다.


무엇을 해도 다 사랑받는 이 숲의 귀여운 절대 권력.

그저 뒤뚱거리지 않고 잘 걷기만 해도

모든 박수가 쏟아지는 기적 같은 계절을 지나고 있으니까요.

그 작고 경쾌한 발걸음 앞에서,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승패라는 단어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 채 사르르 녹아내리고 맙니다.


하지만 그 평화도 잠시,

숲을 울리던 긴 주문이 뚝 끊기고 술래가 획 돌아보는 순간.

와글거리던 숲은 거짓말처럼 마법에 걸려버립니다.

아이들은 일제히 자신만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기이하고도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굳어버린,

귀여운 석상이 되었습니다.


미처 땅을 딛지 못하고 허공에 발을 둔 채

애처롭게 후들거리는 저 다리,

터지기 일보 직전의 웃음을 억지로 가두느라

풍선처럼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말랑한 두 볼.

이 숨 막히는 정지 화면 속, 오직 아이들의 목에서

‘꿀꺽’ 하고 넘어가는 침 소리만이

이 거대한 정적을 아슬아슬하게 건드리고 있습니다.


그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아이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가장 자신다운 방식으로 멈춰 서 있습니다.


동생들의 빈틈을 놓치지 않으려는

매섭고도 날카로운 정지,

터지는 웃음을 능청스레 삼키며

여유를 부리는 넉살 좋은 정지,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해

몸이 기우뚱거리는 위태롭고 생기 넘치는 정지,

그리고 그저 피어있는 꽃송이처럼 가만히 서 있는

무해하고 순수한 정지.


그 서로 다른 결을 가진 네 개의 멈춤들이

한 장면 안에서 겹쳐질 때, 저는 비로소 깨닫습니다.

저 아이들은 지금 단순한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마주하게 될 ‘삶’이라는 여정 앞에서,

자신만의 속도와 호흡으로 세상을 마주하는 법을 배우는

즐겁고 진지한 예행연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요.



관객석에 앉아 그 우스꽝스럽고도 비장한

‘절대 정지’의 순간을 지켜보던 저는,

문득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지는 묘한 기분을 느낍니다.


단지 아이들의 모습이 사랑스러워서만은 아니었습니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저 알록달록하고 서툰 몸짓들이,

실은 우리가 매일같이 살아내는 날들을

거울처럼 비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대 밖, 어른이 된 우리는

늘 어딘가에 ‘닿기’ 위해 숨 가쁘게 달립니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속도를 조절하고,

위험을 알면서도 한 발을 더 내딛기도 하지요.

뜻대로 되지 않아 비틀거리는 순간조차

멋쩍은 웃음으로 넘기며 중심을 잡으려 애쓰기도 합니다.


시간이라는 술래는 뒤돌아서서

우리를 재촉하는 야속한 박자를 셉니다.

하지만 그저 무심하게 시간의 흐름을 알릴 뿐,

그 시간을 어떻게 버텨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흔들리지 않는지에 대한 정답은 알려주지 않습니다.

단지 돌아섰다가, 때가 되면 다시 돌아볼 뿐이지요.


그 냉정한 침묵과 반복 사이에서,

우리는 스스로 깨우쳐야 합니다.

언제 숨을 참고 멈춰야 하는지,

그리고 언제 용기를 내어 나아가야 하는지를 말이에요.


흔들리는 낙엽 위에서 두 발을 대지에 단단히 박고 버티는 힘.

매서운 술래의 시선 앞에서도

스스로의 중심을 잃지 않는 균형 감각.

그리고 그 숨 막히는 긴장 속에서도

찡긋, 윙크를 보낼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의 여유까지.


아이들은 온몸으로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저 주문은,

술래가 외치는 단순한 신호가 아니란 것을.


우리가 숨 가쁘게 달려온 시간들이 단단한 줄기가 되고,

제대로 멈춰 선 바로 그 순간.

비로소 우리라는 존재가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났음을 알리는

눈부신 선언이라고 말입니다.


"잡았다!"

결국 근질거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한

셋째의 야무진 손바닥이 술래의 등을 터치하는 순간.

숲을 지배하던 엄숙한 정지의 마법은

‘팡’ 하고 유쾌하게 깨져버립니다.


와르르, 댐이 터지듯 쏟아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 맑은 소리들은 바스락거리는 마른 낙엽들과 뒤섞여,

마치 금빛 꽃가루처럼 공중으로 흩날립니다.

등을 치고 달아나는 다급한 뒷모습들,

서로 엉키고 설키며 얼굴 위로 겹겹이 쌓이는 환호성.

숨을 꾹 참고 긴장했던 숲은

그제야 ‘후우’ 하고 막혔던 큰 숨을 몰아쉬며,

다시금 소란스럽고 벅찬 생기로 가득 차오릅니다.


이제 누가 이기고 졌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경계선은,

저 맑은 웃음소리에 씻겨 흔적도 없이 지워졌으니까요.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을 아침 이슬처럼 달고,

바스락거리는 낙엽 위에 한 데 뒤엉켜 노는 아이들.


저것 보세요. 저기 네 송이의 환한 생명들이 모여,

가장 아름다운 ‘살아있는 꽃다발’을 이루었습니다.

기울어가는 늦가을의 햇살도 그 모습이 못내 사랑스러운지,

오래도록 그 위에 머무르며 눈부신 윤슬을 반짝이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소란스러운 기쁨이

한차례 파도처럼 휩쓸고 지나간 자리.

고요해진 객석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저는 비로소 바깥세상을 향해 있던 마음의 렌즈를

조용히 나 자신의 내면으로 돌려봅니다.


과연, 내 삶의 계절은 지금 어디쯤 와 있는 걸까요.

혹시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줄도 모르고,

목적지조차 잊은 채

그저 맹목적인 달리기만 반복하고 있는 건 아닌지.


아니면, 이미 멈춰 서서 아름답게 피어날 때가 되었음에도

남들보다 뒤처질까 두려운 마음에,

정작 꽃망울을 터뜨려야 할

타이밍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불안하게 서성이고 있는 건 아닌지.


그리고 언젠가, 시간이라는 이름의 무심한 술래가

내 삶을 향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외치며 고개를 돌렸을 때.

나는 과연 어떤 얼굴로, 어떤 자세로 그 시선을 마주할 수 있을까요.


그때 나는 부디, 끝이 두려워

잔뜩 겁먹은 얼굴을 하고 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대신 아까 본 네 명의 작은 선생님들처럼,

조금은 짓궂고 유쾌한 표정으로

당당하게 멈춰 서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지금 멈춰 선 내 모습이 제법 괜찮은 장면이라는 듯

넉살 좋게 윙크를 날리면서 말이죠.


“보세요, 술래의 말처럼

무궁화 꽃이 참 예쁘게도 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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