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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보련 May 27. 2021

자연산 나무의 설움

<첼로를 사랑하는 목수 - 나무04>

‘부생모육(父生母育)’이란 한자성어가 있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아버지가 낳으시고 어머니가 기르신다는 것인데 뭔가 좀 이상하다. 낳는 것은 당연히 어머니이고 기르는 과정에서도 어머니의 역할이 더 크기 때문이다. 운을 맞춰 만들어야 하는 사자성어의 특성상 ‘부모’와 ‘생육’을 결합하다 보니 이리 된 것이다. 본래의 뜻은 부모가 낳아서 기른다는 것인데 한자를 배열하다 보니 현실과 맞지 않는 이상한 뜻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어떤 사전에서는 이 한자성어를 ‘아버지는 낳게 하고 어머니는 낳아 기른다’는 다소 기괴한 풀이를 해 놓았다. 이 풀이대로라면 아버지는 무책임하고 어머니는 낳고 기르는 모든 과정의 ‘독박’을 써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성어를 동식물에 적용하면 상황이 조금 달라진다. 철저하게 인간을 중심으로 한 것이기는 하지만 자손을 낳게 하기만 하면 그만인 무책임한 아버지를 좋아하고 기르는 어머니는 아예 없는 것을 좋아한다. 바로 ‘자연산(自然産)’에 대한 집착을 말하는 것이다.


백두산의 미인송, 나무를 실제로 보면 왜 미인이란 이름이 붙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뚝 떨어져 홀로 자라는 것이 훨씬 더 크고 예쁘다.


자연산은 양식한 것이 아니라 자연에서 저절로 생산되는 것을 뜻한다. 동물은 양식을 하지만 식물은 재배를 하니 양식하거나 재배하지 않은 동식물로 정의하는 것이 좋겠다. 양식과 재배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의 손이 닿는 것을 뜻하고 자연산은  좀 과장해서 말하면 누군가가 생명을 준 뒤 무책임하게 아무도 돌보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사람의 인공적인 손길이 닿지 않았을 뿐 동물의 경우는 부모나 무리의 돌봄을 받으니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동물도 그렇지만 자연산 식물에 대한 사람들의 집착은 대단하다. 같은 삼(蔘)이지만 새가 삼킨 삼의 씨가 어딘가에 배설돼 남몰래 자라면 ‘산삼’이 되고, 사람이 그 씨를 받아다 산에 뿌리면 ‘장뇌삼’이 되고, 모종을 밭에 심어 기르면 ‘인삼’이 된다. 같은 삼이어도 가격을 비교가 불가능하다. 표고, 취, 미나리 등도 요즘은 대부분 양식이나 재배된 것을 먹지만 앞에 ‘자연산’이 붙으면 값이 몇 배나 뛴다. 


산삼, 그런데 씨를 가져다 뿌려 기르면 장뇌삼이 되고 모종을 가져다 심으면 인삼이 된다.


자연산이 모양이 예쁘거나 상태가 좋아서는 아니다. 험한 환경에서 모진 생명을 이어간 만큼 약효나 맛이 좋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대량재배를 위해서는 비료와 농약을 많이 쓸 수밖에 없는데 우리의 입에 들어갈 이 작물에 혹시라도 이런 것들이 남아 있을까 걱정해서이다. 할 수만 있다면 자연산을 먹는 것이 좋다. 그러나 대량재배나 양식이 아니었다면 아주 많은 작물들을 아예 먹지도 못하거나 비싼 값에 먹어야 했을 것이다.


그럼 나무는 어떨까? ‘자연산 나무’라는 것이 좀 어색하게 들릴 수는 있지만 산과 들에서 스스로 싹을 틔워 제멋대로 자란 나무가 자연산 나무다. 자연산에 대한 우리의 집착을 감안하면 나무 역시 자연산이 좋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무의 처지에서 보면 자연산은 ‘부생무육(父生無育)’이다. 누군가 낳기는 하되 아무도 돌보지 않는 상황이다. 특히 숲은 말 그대로 전쟁터인데 그 전쟁터에 씨앗 하나만 던져 놓고 알아서 크라는 상황이다. 


숲을 바라볼 때문 우리의 마음은 평온하기 그지없지만 숲을 채우고 있는 온갖 생물들에게는 생존의 현장이다. 동물뿐만 아니라 식물도 그렇다. 나무와 풀은 햇빛, 물, 양분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한다. 필요한 만큼 햇빛을 받아야 하고 생존과 생육에 필요한 물과 양분을 빨아들여야 한다. 나무가 위로 쑥쑥 자라는 것은 태양에 더 가까워져 햇빛을 독차지하기 위한 것이다. 뿌리를 깊고도 넓게 뻗는 것은 물과 양분을 최대한 얻기 위한 것이다. 나무는 크고 강하니 이런 싸움에서 유리하다. 그래서 숲을 보면 키 큰 나무가 주인인 것처럼 보인다. 풀과 키 작은 나무는 그 틈을 비집고 ‘알아서 기며’ 생명을 유지해 나간다.


정글, 말 그대로 식물들도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는 '정글'이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문제가 있다. 경쟁자가 없을 것 같은 나무이지만 사실은 심각한 경쟁자가 있다. 바로 동족의 나무다. 같은 종류의 나무는 좋아하는 환경도 같고 생장속도도 비슷하다. 달리 말하면 같은 집에서 같은 음식을 먹으면서 더 빨리 크기를 경쟁하는 관계이다. 더 빨리 키가 커야 햇빛을 많이 받고 뿌리를 튼튼히 내려 물과 양분을 독차지한다. 같은 시기에 자라는 나무들끼리 치열한 생존경쟁을 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비극은  나중에 싹을 틔운 나무들은 먼저 자란 나무들과 경쟁도 하지 못한 채 죽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막 싹이 튼 나무는 자신에게 생명을 주었을지도 모르는 부모 나무에게 떡잎부터 고통을 당한다. 수십 미터의 부모 거목이 하늘을 가린 상태에서는 빛도 들어오지 않는다. 같은 수종의 나무가 아예 자랄 수 없는 환경이란 뜻이다. 유목민들은 생활력이 떨어지는 막내에게 상속을 하는 말자상속(末子相續)을 하기도 한다지만 말 그대로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 하는 ‘식물(植物)’인 나무는 막내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 부모 나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니가 가라, 먼 땅으로.’란 말밖에 없다.


그래서 특별히 생육환경이 좋은 곳이 아니고서는 울창한 숲에서 크고 굵은 나무가 자라기 힘들다. 아열대의 밀림이나 타이가 숲에는 큰 나무가 많지만 동족끼리 경쟁하지 않았다면 더 크게 자랐을 나무들이다. 자연 상태에서 자기들 마음대로 자란 나무들이라 아무것도 모르지만 만약 이것을 안다면 서운해 할지도 모른다. 잠재력은 훨씬 더 있는데 형제들과 다 같이 사느라 더 성장하지 못했다면 억울할 법도 하다. 이보다 환경이 열악한 곳에서는 나무들이 꼬불꼬불 비리비리 자랄 수밖에 없다. 슬프지만 현실이다.


그래서 자연산이기를 포기하고 인공조림을 할 경우에는 철저하게 관리한다. 애초에 충분한 공간을 두고 묘목을 심는다. 자라는 과정을 보면서 사이사이 생육이 느린 나무를 잘라내는 간벌(間伐)을 하고 위로 쭉쭉 자라나고 옹이도 없게 하기 위해서 가지치기도 한다. 인공조림이 아닌 자연적으로 형성된 숲도 간벌과 가지치기를 해 준다. 될성부른 떡잎만 키우고 싹이 노란 나무은 베어 없애는 것이다. 1등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쓸어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쓸 만한 나무’만 길러낼 수 있다.


빽빽하게 자라고 있는 편백나무 숲, 솎아내기를 하면 훨씬 더 잘 자란다.


이런 관리의 극단을 보여주는 곳은 과수원이다. 과수원은 나무가 아닌 과일을 얻기 위한 곳이지만 나무에게 할 수 있는 모든 관리를 다 한다. 야생의 과일은 볼품없이 작고 시금털털하다. 그래서 수없이 많은 교배를 거쳐 원하는 품종만 얻는다. 과수원에 잘 자라고 관리하기 좋게 심고 필요한 가지만 남긴다. 한 가지에 꽃이 여러 개 피어도 크고 맛있는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꽃만 빼고 죄다 떼어낸다. 말 그대로 ‘나는 한 놈만 살려.’이다.


이쯤 되면 뭔가 무서움이 느껴진다. 나무에 대한 이 이야기를 사람에게 적용하면 끔찍해진다. 인간의 사회가 아무런 통제와 합의가 없이 무한경쟁의 상황이라면 ‘자연산 인간’은 끔찍한 상황을 경험해야 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인간사회는 통제와 합의가 잘 작용해서 이러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은 없다. 앞선 세대들은 뒤를 이을 세대들을 보살피고 가르치며 키우며 더 앞선 세대들을 부양한다. 그 이후의 세대들도 이를 반복하며 오래도록 함께 살아오고 있다. 적어도 인간은 무책임하게 낳고 알아서 크는 자연산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에게는 ‘자연산’에 대한 동경이 있다. 특히 자라나는 세대들이 그렇다. 알아서 제멋대로 크고 싶은데 윗세대들은 가르치려 들고 제재하려 든다. 하지 말라는 것투성이이고 ‘다 널 위해서’라고 하라는 것은 과연 자신을 위한 것인지 필요한 만큼 키워서 당신들이 편하고자 하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때도 있다.


의심의 눈초리를 확대해서 크게 보면 인간사회의 양육과 교육 시스템은 양식, 혹은 재배와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알아서 크게 내버려두면 좋을 텐데 정해진 목적에 따라서 가야할 방향, 도달해야 할 수준, 이루어내야 하는 성과 등을 정해 놓고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가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음 세대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사회를 이끌어갈 수 있도록 키워내는 것이지만 그래야 자신들이 뒤로 물러나도 부양을 받을 수 있으니 합리적인 의심이기도 하다.


그러나 잔소리하는 윗세대가 밉긴 하지만 정말로 이렇게 믿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나무를 키울 때처럼 간벌을 하거나 가지치기를 하는 일은 없다. 있는 그대로, 생긴 그대로 자라나도록 하면서 더 잘 자랄 길을 안내하는 것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키운 나무를 베어서 인간이 쓰는 것과 인간이 다음 세대의 인간을 키워서 대물림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인간이 인간을 위해서 인간과 같이 하는 일이니 자연산이길 극도로 포기한 방법이긴 하지만 더 이상의 방법은 없을 듯하다.


OK, Boomer. 좀 씁쓸한 영어표현이다. ‘Boomer’는 전후의 베이비붐 세대를 가리키니 느낌을 살려서 우리말로 번역하면 ‘됐구요, 꼰대’ 정도가 된다. 말 안 해도 아니 잔소리 좀 그만 하라는 말이다. Boomer Remover. 많이 끔찍한 영어표현이다. ‘Remover’는 제거제를 뜻하니 ‘꼰대 제거제’란 뜻이다. 코로나 19가 나이 든 세대에 치명적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코로나가 ‘잉여의 노인’을 제거할 수 있는 방책이라며 일부 몰지각한 젊은이들이 한 말이다.




마음만 먹으면 기성세대들은 얼마든지 리무버의 역할을 할 수 있다. 나무에게 그러하듯이 떡잎 때부터 솎아내고, 간벌하고, 가지를 칠 수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문명화된 인간사회에서 그런 일은 없었다. 아이들이 말도 안 되게 떼를 써도 ‘OK, Baby!’ 하며 들어주고, 달래주고, 바르게 안내해 줬다. 이해하려고만 하면 어쩔 수 없는 꼰대 짓을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자신도 그 꼰대가 돼서 너무 늦게 깨닫기 전에 말이다.


요즘에는 우리 산도 관리가 잘 돼서 크고 굵은 나무가 잘 자라고 있다. 산에 가서 이런 나무를 기분 좋게 보면서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는 태어나기 전부터 고르고 고른 뒤 심어졌고 떡잎부터 철저히 관리돼 왔다. 안 그랬으면 자연산 나무로 서럽게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 덕분에 자연산보다 천 배는 멋진 ‘나’가 그 나무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함께 모두가 더 클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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