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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라온 Apr 27. 2024

연결하는 싸움을 위해,        왼발 한 보 앞으로

은유, 해방의 밤, 창비, 2024

해방은 구속이나 억압, 부담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이지요. 무엇을 어떻게 자유롭게 하자는 건지 궁금했습니다. 고정된 생각과 편견이 깨질 때마다 해방감을 느낀다고 하셨는데요. 저도 한껏 풀어지고 싶었나 봅니다. ‘밤’으로 초대해 주신 것도 반가웠습니다. 회사 퇴근하고 집으로 출근했다 육아 퇴근하면 나만의 시간이 오니까요. 그 밤마다 책을 보았습니다. 나를 옥죄고 있는 편견, 삐뚤한 생각, 쓸데없는 고집이 생각보다 많더군요. 이렇게 편협하고 쩨쩨하고 이기적인 나였다니요.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몰랐을 겁니다. 잘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관계와 사랑, 상처와 죽음, 편견과 불평등, 배움과 아이들에 대해 나눠 주신 책과 말씀으로 내면을 들여다봅니다. 나의 울타리가 당신, 가족, 사회까지 확장되더군요. 그 안에서 뭘 해야 할지 평생 숙제를 받은 기분입니다.




엄마가 오래 살았다면 연장됐을 가사 노동에 고개를 저으셨죠. 왜 노동은 당사자의 동의 없이 딸에게 대물림될까요. 명절이면 친정 식구 밥을 하며 툴툴거리는 자신을 혼냈다가 다독였다가 결심하셨죠. 끊어내지 않고 연결하겠다고요. 집을 밥의 즐거움을 되찾는 장소로 만들겠다고요. 노동의 주체자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서 말이에요. 끊어낸다는 단절이 아닌 연결을 위한 싸움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당장 명절을 없애고 식사 자리조차 피한다는 게 아니었어요.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는 거거든요. 고민과 소통을 멈추지 않겠다는 선언이 근사했습니다. 불편한 것들은 없애거나 거기서 벗어날 생각만 했지 ‘연결’ 해 볼 생각은 못했네요. ‘손절’만이 살길인 것처럼 잘라서 없애는 시대에 이런 연결은 얼마나 생산적이고 아름다운 가요.

 

십여 일 전이 세월호 10주기였습니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되었나 무딘 저와 다르게 유가족은 억겁의 시간을 견뎠을 겁니다. 416 세월호 참사 작가 기록단의 ‘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 책을 추천받고 굳은살처럼 둔한 감각을 깨웁니다. 슬픔에 무지한 종족이란 말이 먹먹합니다. 슬픔이 허용되는 삶의 모드가 아니었고 슬퍼하는 사람은 약자로 분류되고 슬픔은 각자가 삭여야 할 사적 과제로 여겨진다 하셨지요.


슬픔을 숨기고 억눌러야 하는 사회는 더없이 폭력적입니다. 세월호 사건부터, 이태원 참사, 도색 노동자의 추락사, 컨테이너 작업 청년의 죽음, 특성화고 현장 실습생의 자살까지 폭력 앞에서 슬픔을 은폐하고 느껴서는 안 될 감정처럼 학습해 왔습니다. 세상은 그저 알아서 견디라 하고 울음조차 삼키라고 합니다.  


최근 사내에서 부고를 받았습니다. 업무 접점을 없었지만 최근까지 같은 층을 쓰던 동료의 본인상이었습니다. 고인과 말 한마디 제대로 해본 적 없지만 뚜렷한 이목구비, 씩씩했던 목소리, 당당했던 기개까지 생생해서 믿어지지 않더군요. 조문도 슬픔도 각자의 일로 여겨졌기에 사무실은 여느 날과 같았고 어떤 감정도 공론화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큰 일에 마음을 꺼내 놓고 아픔을 나눌 수 없다는 데서 더 큰 슬픔을 느꼈습니다.


김진영의 책 ‘상처를 관리하는 법’은 말합니다. 사람들이 마음껏 슬퍼하도록 허용하면 대단히 위험할 수 있기 때문에 사회는 일정한 처리 방식을 따라가며 슬픔을 관리하도록 한다고요. 상처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죽음을 어떻게 애도해야 할지 가르쳐 주지 않지만, 이제부터 배우려 합니다. 이웃의 아픔은 연결되어 있고 사회적 상처를 보아야 나의 상처로부터도 해방될 수 있으니까요.




얼만 전 둘째 아이가 그린 포스터를 가져왔습니다. 장애인에 대한 인식 개선이 주제였는데요. ‘우리 모두 같은 사람이에요’라고 크게 써 놓았더군요. 사람을 존중하는 일, 가치를 인정하는 일이 기본이며, 더불어 살아가는데 중요하다는 걸 아이도 알더라고요. 섞여 살며 더 배우고 애써서 변화를 만들자고 하신 말씀을 꼭 기억하겠습니다. 분별력 있는 시민이 되도록요. 세상 밖에서 구경만 하다가 원 안으로 한발 디뎌 봅니다. 이웃의 슬픔을 지나치지 않도록 추천해 주신 12권의 책들도 읽어 나가겠습니다. 해방의 씨앗이 제 안에서 무럭무럭 잘 자라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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