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도 서열이 있다. 벽돌책이 서열이 높은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책이 서열이 높은가. 베스트셀러가 서열이 높은가. 모두 아니다. 우리 집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책은 도서관 책이다. 그중에서도 반납날짜가 임박한 도서관책이 서열 1위다. 다른 책을 읽다가도 반납예정 문자를 받으면 만사를 제쳐두고 그 책을 펼친다. 읽고 있던 책이 그 책이 아니라면, 반납예정인 책이 한 권이 아니라면 그마저 다 못 읽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마음이 바빠진다. 급한 나의 마음을 어찌 알고 축지법 영상이 떴는지 모르겠다. 자, 몰입해서 책을 읽어볼까. 하자마자 띠링, 학교에서 알람이 온다. 이김에 커피를 한잔 일단 타오자. 그래, 물 올린 김에 잠시 주방정리를 할까. 물이 다 끓어올랐다. 뜨거움이 다 식도록 기다릴 수는 없다. 다시 찬물을 붓는다. 그래, 이게 음양탕이지. 호로록 뜨뜻미지근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어본다. 띠리리링, 와치에서 전화가 울린다. 선거가 끝나면 잠잠해질 줄 알았는데 여전히 울려댄다. 하루에 몰입을 4시간씩만 하면 된다고 했는데 4시간이 뭐야.... 40분은커녕 4분도 어렵겠네.
책을 많이 읽고 싶어서 선택한 방법은 '독서모임'이다. 사람들과 한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정말 여러 겹의 삶을 느낄 수 있다. 나와 참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주 다른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있다 보면 나의 경계가 조금씩 허물어지고 넓혀진다. 그 과정이 아주 즐겁다. 힘든 점도 물론 있다. 물리적인 시간을 내야 하고, 말주변이 없는 내가 생각을 정리하는 것은 큰 심리적 부담이다. 그럼에도 몇 년째 독서모임을 하고 있고, 계속 다른 독서모임에도 기웃거리는 이유는 '나의 독서양'을 위해서다. 철저히 이기적인 이유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사람이 되고 싶기도 했다. 몇 번 하다 보니 그것은 내 능력 밖의 일임을 깨닫고 과감하게 포기했다.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자체가 즐겁고 독서모임 구성원 대다수를 내가 좋아하기 때문에 독서양이라는 목표에 집중하고 그 외 다른 고민을 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독서모임을 하면 책 읽고 가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다. 훌륭한 인사이트는 주지 못해도 하나의 사례 정도라도 보태고 싶은 나에게 완독은 필수다. 완독의 무게감에 더해 한 가지 더 있다. 넓어지는 독서스펙트럼이다. 보통 독서모임의 책 리스트는 구성원들의 추천과 투표로 정해진다. 다양한 성향과 기준에 의해 선정된 책 리스트는 나의 것과 겹쳐지는 부분도 있고 아닌 부분도 있다. 아닌 부분이 더 많은 것이 반갑기도 하다. 혼자 서점에 갔다가 몇 번을 보아도 지나쳤던 책이 선정되면 더욱 기쁘다. 그런 책이 단단하게 좁혀져 있는 생각의 틀을 깨 주는 공신이기 때문이다. 아이스크림 정도는 새로운 맛을 쉽게도 잘 고르면서 책은 이상하리만치 새로운 도전이 어렵다. 아예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 존재자체를 알아채기 어려운 것도 있지만 이미 보고 싶은 책들이 너무 많은 이유도 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서열에 밀리고, 독서모임에 밀리는 것이 내가 아끼는 책이라는 것이다. 좋아하는 작가님의 신간을 예약구매하고 오매불망 겨우 받았다. 애타게 기다려놓고 아직까지 다 읽지 못했다. 한참 읽다가도 불현듯 이번주 독서모임 책을 다 읽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사랑하는 연인을 앞에 두고 업무카톡이 올 것 같아서 오랜만에 만난 연인에게 집중을 못하고 자꾸 핸드폰을 들추고 있다. 이제 책의 서열을 야생에 맡겨두지 말아야겠다. 힘없이 저 끝으로 밀려버린 책을 내가 지켜줘야겠다. 내 책장에 쿼터제를 도입해야겠다.